짠돌이 독서 일기

언론의 숙명은 무엇일까?

김민식pd 2023. 10. 30. 05:01

제가 MBC 노조부위원장으로 일하던 2012년, 170일 동안 파업을 했습니다. 제가 피디 출신이라 파업 프로그램 총연출이었는데요. 집회 발언자 섭외가 늘 어려웠습니다. 하루이틀 파업이라면, 집행부 발언이나 조합원 발언으로 엮으면 되는데, 파업이 몇달씩 계속되자 말할 사람도 이제 슬슬 동이나더군요. 외부에서 온 유명 연사가 조합원들의 사기도 북돋워주고 하면 좋으련만, TV에 출연해 대중들에게 자신을 알려야 할 이들에게 방송사 노조 지지 방문은 쉽지 않은 결정이지요. 경영진에게 미운털 박히기 딱 좋으니까요.

그때 집회 현장을 찾아준 분 중 철학자 강신주 선생님이 있어요. 그가 조합원들 앞에서 마이크를 쥐고 한 첫마디에 모두 기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청부 폭력배입니까, 언론사 직원입니까?” 처음에는 이게 뭔 소린가 싶었어요. 선생님은 학교 교사들을 상대로 강연할 때도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고 했어요. “여러분은 유괴범입니까, 스승입니까?” 아이를 볼모로 부모한테 돈을 뜯어내면 유괴범이고, 아이를 가르치는 일이 천직이라 여겨 열심히 가르쳤을 뿐인데 나라에서 월급도 준다면 그 사람은 참 스승이라는 거죠.

언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자가 권력의 편에 서서 약자를 짓밟으면 돈 받고 폭력을 휘두르는 청부 폭력배고, 약자의 편에 서서 강자와 맞서 싸우면 진정한 언론인이라고요. 언론의 본질은 권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 기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문제는 그러다 권력의 눈밖에 나기 쉽고요. 자칫하면 날아가기 십상이지요.

제가 좋아하는 회사 선배님 중에 박성제 선배가 있어요. 2012년 MBC 파업 때, 부당해고를 당했고요. 해직 기자 시절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목공을 배우다 수제 스피커 장인으로 직업이 바뀐 분이지요. 저는 그 선배가 예전에 쓴 <어쩌다 보니, 그러다 보니>라는 책을 참 좋아합니다. 어쩌다 보니 해직기자, 그러다 보니 스피커 목공. 삶을 살아가는 좋은 자세를 알려주는 책이고요. 그 선배가 2017년에 복직해서 MBC 보도국장을 거쳐 사장이 되었어요. 매년 천억원대의 적자를 내던 회사를 흑자 경영으로 전환했고요. 망가진 MBC 뉴스를 살려 언론사 신뢰도 1위에 복귀시켰지요. 해직언론인이 사장이 되어 회사를 살렸으니, 제게는 영웅인데요, 이번에 내신 책의 제목은 자못 비감합니다. 

<MBC를 날리면> (박성제 지음 / 창비)  

대한민국에서 센 상대와 맞붙어 싸우는 게 숙명인 직업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검사, 또 하나는 기자. 검사들은 '센 놈을 수사해서 잡아넣은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기자들은 '센 놈을 조지는(비판하는) 기사를 쓴 것'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이 지점에서 검찰과 언론의 공생이 탄생합니다. 검찰이 수사 단계에서 혐의 내용을 유출하고 언론은 이를 받아써서 확정된 범죄인 것처럼 묘사합니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을 당연히 생각할 뿐 아니라, '정의롭다'고 여기는 거죠. 

과거에는 검사와 기자가 '정의로운 합작'을 통해 권력의 비리를 단죄하는 쾌거를 올린 경우도 있어요. 1987년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서울대 박종철 군 고문치사 보도'가 대표적인 장면이지요. 영화 <1987>의 도입부인데요. 경찰의 은폐 시도에 분노한 평검사(영화에서는 하정우가 연기한)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던 대학생이 사망했다'는 정보를 <중앙일보> 기자에게 흘려준 것이 87년 민주화 항쟁의 도화선이었어요. 그 영화를 보면,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소임을 다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역사를 한걸음씩 진보시키는 지 알 수 있어요. 

요즘은 어떤가요? 요즘도 검찰과 언론의 '정의로운 합작'이 이루어지나요? 지금 제일 센 놈은 누구인가요?
건폭? 건설노동자? 파업노동자? 민주노총? 그래서 검찰과 언론이 그렇게 노동자를 조지고 있는가요? 검찰과 언론이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고민해봤으면 좋겠어요. '나는 센 놈을 조지는 영웅인가, 약자를 짓밟는 조폭인가?' 검찰과 언론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축입니다. 시민들의 존경을 받으며 일했으면 좋겠어요.

MBC 피디로 일하며 선배들에게 배운 것 중 하나는, '시청률은 언제나 옳다'라는 겁니다. '아니, 내가 이렇게 재미난 프로를 만들었는데, 왜 시청률이 안 나오는 거야?'하면, 제대로 된 성찰을 하기 힘들어요. MBC피디라면 무조건 시청률이 잘 나오는 프로를 만들어야해요. 광고는 시청률에 따라 늘어나니까요. 

저는 그래서 상대적으로 KBS 피디들이 부러웠어요. 그들은 시청률보다는 공영방송 본연의 역할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거든요. 광고로만 제작비를 충당하는 게 아니라 시청료를 받으니까요. 책에는 KBS 보도국에서 일한 김경래 기자의 글이 실려 있어요. KBS 수신료 분리 징수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KBS가 다른 언론과 다른 게 딱 하나 있다. 취재를 할 때도,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도, 기사를 쓸 때도, 편집을 할 때도, 출장을 갈 때도, 출장비를 정산을 할 때도 KBS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수신료'를 생각하게 돼 있다. 

나라가 주는 월급을 받는다는 느낌과는 다르다. 정부가 아닌 공적인 영역에 종사하고 있다는 책임감과 자부심은 사람을 다르게 행동하게 하고, 결국 프로그램이 달라지게 된다. 이런 제약을 가진 미디어가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귀하다. 2500원을 내고 이런 종류의 자산을 가지는 건 사실 남는 장사다. 반면에 기업이 주는 광고로 먹고사는 미디어는 흔하디흔하다. 너무도 희귀한 우리의 자산을 이렇게 쉽게 망쳐버려도 되는 건가. 

분리 징수 시행. 대단하다. 이건 박근혜이건 문재인이건 역대 정부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던 부분이다. 노골적으로 치사한 수라는 걸 누구나 알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없는 시대다.'

2012년 이명박 정부의 언론장악에 맞서 MBC, KBS, YTN 방송 3사가 공동 파업을 했지요. 저는 그 시절, 방송독립을 위해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검찰로부터 징역 2년형을 구형받았고요. 10여년의 새월이 지나, MB 언론장악의 기술자였던 이동관은 방송통신위원장이 되었습니다. KBS는 시청료 분리 징수라는 직격탄을 맞고, YTN은 대주주가 바뀌어 민영화의 길을 가고 있어요. 이제 MBC는 어떻게 될까요? 힘들게 언론인들이 싸워 일궈온 방송 독립이라는 가치는 다시 바람앞의 등잔불 신세가 되었군요. 가끔 우울해집니다. 역사는 왜 항상 불행한 과거를 되풀이하는가... 

박성제 선배의 글로 마무리합니다.

 

'다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오랜 시간 피 흘리며 쫓아 보낸 어둠의 시간이 또 덮치고 있다. 

불행한 역사는 반복될 것인가, 알 수 없다.

그 답은 과거에도 그랬듯, MBC 구성원과 시민들에게 달렸다.

꺾이지 않는 저널리스트들이 신념과

잠들지 않는 시민의식이

죽었던 MBC를 살려냈다.

이제 다시 싸움의 시작이다. MBC 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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