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로 즐기는 세상

타인을 수단으로 대하지 않기

김민식pd 2023. 9. 25. 05:18

오래 전에 만난 적이 있는 분에게 연락이 옵니다. "새 책 나온 거 잘 봤어요! 우리 밥이나 한번 먹을까요?" 만나서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를 하다 그분이 그럽니다. "혹시 MBC 모 예능 프로 연출하는 피디 알아요?" 같은 직장을 24년을 다녔으니 모른다고 하면 거짓말이지요. 친하지는 않아도 아는 후배가 많으니까요. 그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힙니다. 저는 무척 난감합니다. 피디로 일할 때, 제가 제일 싫었던 게 일반인 출연 청탁하는 선배였거든요. 

예능 피디는 사람 장사하는 사람입니다.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을 찾고, 보고, 만나서 그중 어떤 사람이 진짜 매력적인 사람인지 가려내는 게 일이에요. 부지런한 예능 피디들 덕분에 우리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TV에서 만나게 됩니다. 예능 프로에 소개되며 숨어있던 고수들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지요. 그러니 출연을 욕심내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요, 피디들은 TV 출연하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보다는 그냥 묵묵히 자신의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을 더 좋아해요. 진솔하고 인간적인 매력이 있거든요.

식사 자리가 끝나갈 무렵, 씁쓸해집니다. '아, 이분은 오늘의 만남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구나.' 저 분은 나를 이제 원망하겠지요. 후배에게 다리를 놓아주지 않는 야박한 사람이라고. 저 분은 나를 수단으로 여긴 겁니다. 당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나쁜 사람 되기 싫어서 내가 이 공을 후배에게 넘기잖아요? 그럼 후배가 회의실에 작가들을 불러놓고 난감한 이야기를 하겠지요. '회사 선배가 청탁한 출연자인데 이걸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자, 이제 내가 후배를 수단으로 삼은 겁니다. 나쁜 사람 되기 싫어서 공을 넘긴 거니까. 나쁜 사람 여럿 만드는 것보다, 나 혼자 나쁜 사람 되고 마는 게 나아요. 

<외로움 수업>을 보면, 제가 정기적으로 만나는 친구나 모임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만남들의 특징은요, 상대를 수단으로 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냥 만나서 즐거운 거예요. 같이 길을 걸으며 수다를 떨고 맛있는 식사를 즐기는 걸로 마냥 좋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세요. 나는 이 사람을 목적으로 만나는가, 수단으로 만나는가. 사람을 목적으로 두는 사람은, 그냥 그 사람을 만난 것 자체로 즐겁고 행복한 겁니다.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요.

명예퇴직하면서 결심했어요. '나는 이제 목적 없는 삶을 살겠다.' 목적이 있는 사람은 타인을 수단으로 삼게 됩니다. 돈을 벌고 싶은 이는 만남을 통해 돈을 벌려고 하고요. 권력을 얻고 싶은 이는 타인을 통해 영향력을 얻으려 하지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사진은 작년 크레타 여행 때 갔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입니다. 그의 묘비명처럼 살고 싶어요. 쉽지는 않겠지요. 노력은 해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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