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로 즐기는 세상

강원국 선생님의 라디오에 출연했어요

김민식pd 2023. 4. 5. 05:27

강원국 선생님이 진행하시는 KBS 1 라디오, <강원국의 지금 이 사람>에 출연했습니다. 저는 녹화 전 사전에 받은 질문지에 답변을 글로 쓰며 생각을 정리하는 습관이 있어요. 오늘은 그 원고를 조금 공개합니다.

Q : 피디라는 직업은 어떤 일인가요? 

A : 피디는요, 리더입니다. 리더의 일은 주위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거지요. 작가의 대본을 살리고, 배우의 연기를 빛나게 하고, 스탭진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작품이 잘 되면 다 남들 덕분이라고 말하고요. 안 되면 다 내 탓이라고 합니다. 대박이 나는 건, 작가님이 대본을 잘 쓰고, 배우가 연기를 잘 하고, 스탭이 잘 만들어주신 덕분이고요. 쪽박을 차는 건, 오로지 감독인 내가 일을 잘못한 겁니다. 

그래도 제가 운이 엄청 좋았습니다. 공대 나와서 영업사원, 통역사로 일하며 방송 일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입사했는데요. 입사 4년 만에 만든 시트콤 <뉴논스톱>이 잘 된 덕분에 백상예술대상 신인 연출상도 타고요. 나이 마흔에 드라마 피디로 전직해서 이직 3년 만에 만든 드라마 <내조의 여왕>으로 백상예술대상 연출상을 공동 수상하고 그랬거든요. 한마디로 인복을 타고 난 거죠. 제가 평소 강원국 선생님의 <지금 이 사람>을 즐겨 듣거든요. 오늘 오는 길에 느꼈습니다. 늘 존경하던 강원국 선생님의 라디오에 내가 출연자가 되다니! 아, 난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이구나! 불러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Q : 그 좋아하는 일을 그만두셨어요. 회사도 나오셨고요. 요즘 뭐하고 사세요?

A : 세상을 아는 건 차라리 쉬운데, 자신을 아는 게 제일 어렵더라고요. 제가 그렇게 역량이 뛰어난 연출가는 아니라는 걸 깨닫고 퇴사했습니다. 평생을 '나는 할 수 있다' 정신으로 살았는데요. 나이 쉰셋에 '나는 할 수 없다'를 깨닫고 사표를 냈습니다. 

드라마 피디는 대단한 전문가인 줄 알았는데요. 회사에서 일을 안 주니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바보더라고요. 작가가 대본을 쓰고, 배우가 연기를 하고, 편집자가 편집을 해야 뭔가 만들어지거든요. 누가 일을 주거나 말거나, 자기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나이 마흔이 넘어가면 자신의 업을 새롭게 정의해야 합니다. 직장 내 직책으로 나의 일을 정의할 게 아니라, 퇴직하고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나의 직무 영역 안에서 그걸 찾아봐야지요. 

그걸 제일 잘한 사람이 강원국 작가님이십니다. 회장님 비서로, 또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으로 일하셨잖아요? 평생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고 그분들의 생각을 글로 다듬으며 사셨는데요. 처음 내신 책이 <대통령의 글쓰기> 다음 책이 <회장님의 글쓰기> 그리고 <강원국의 글쓰기>, 2014년에 내신 첫 책부터 최근에 나온 <결국은 말입니다>까지 강원국 선생님 책은 다 읽었는데요. 평생 다른 사람의 생각을 글을 다듬던 분이 이제는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표현하며 사신다고 느꼈어요. 저는 아름다운 삶의 경로는 이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주는 사람. 나의 경험을 사회적 자산으로 만드는 사람. 저도 선생님처럼 살고 싶어요. 


Q : 김민식 피디 보면 재미없이는 못사는 사람 같아요. 재미를 위해 온갖 열정을 쏟아내는 것 같은데,
원래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인가요? 

A : 너무 억울해서 그랬어요. 제가 어려서부터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해서 문과에 가는 게 꿈이었는데, 아버지는 꿈이 아들을 의사로 키우는 거였어요. 그래서 저를 억지로 이과로 보내고, 의대 갈 성적이 안 되니까, 그냥 공대를 보내셨어요. 제가 1987년도에 대학에 들어갔는데요. 적성에 안 맞아서 공부를 너무 못했어요. 제가 대학 시절, 과 전체 72명 중에서 70등 했거든요. 아, 꼴찌는 면했네? 아니에요. 제 뒤에 있던 2명은 수배중인 운동권이라 아예 시험도 못 봤어요. 

어려서 사는 게 하나도 재미가 없었어요. 어느 날 깨달았어요. 내가 선택한 일을 하면 재미있고, 남이 시킨 일을 하면 재미가 없구나. 책도 그렇잖아요.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건 취미인데, 남이 읽으라고 시킨 책을 읽으면 숙제에요. 그걸 깨달은 후로는 남들 눈치 안 보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어요. 열심히 춤도 추러 다니고, 기타 치고 노래하고, 학과 야유회 가면 마이크 잡고 사회도 보고, 엄청 열심히 놀았어요. 그랬더니 나중에 예능 피디가 되더라고요. 

예능 피디는 전 국민을 상대로 놀아주는 직업이거든요. 예능 피디로서 저의 연출 철학은, ‘만드는 사람이 즐거워야 보는 사람도 즐겁다’ 였어요. 그래서 촬영장에서도 늘 즐겁게 일했습니다. 이제 꿈은 노후에도 재미나게 사는 겁니다.

PS.

강원국 선생님을 만나, 덕질하는 심정으로 즐겁게 수다를 떨었습니다. 오늘부터 이번 주 수,목,금 방송됩니다. KBS 1라디오, 오후 3시 반, 밤 9시 반 하루 두 차례 나갑니다. 저와 강원국 작가님의 티키타카 수다, 라디오로 즐겨주시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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