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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날라리 영화 감상문62

기다림에 지쳐갈 때, <서칭 포 슈가맨> (에 기고한 영화 리뷰입니다.) 드라마 피디로 일하며 나는 늘 기다린다. 좋은 대본을 기다리고, 편성 기회를 기다리고, 촬영 세팅을 기다리고, 배우의 준비를 기다린다. 기다릴 때 잘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다 지쳐, 재미없는 대본을 선택해도 안 되고, 편성 욕심에 급하게 들어갔다가 사지에 들어가도 안 된다. 레일 깔고, 조명 설치하고, 카메라 세팅하는 스태프들을 재촉해도 안 되고, 좋은 연기를 펼치기 위해 감정을 잡고 있는 배우에게 “밤 샐 거야? 얼른 촬영 시작합시다!”해서도 안 된다. 감 없는 감독이라 소문나 다음에 일하기 힘들 테니까. 꾹 참고 잘 기다려야 한다. 지금도 그렇다. 코로나가 끝나지 않는다고 답답한 마음에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모임을 위해 달려 나가도 안 된다. 잘 기다려야한다. 마냥 기다.. 2020. 11. 3.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왓챠의 브런치에 기고한 글입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노력 중독자다. 어쩌면 자기착취에 길들여진 사람인지도 모른다. 20대에 공대를 나와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던 나는 퇴근하면 외국어학원에서 영어공부를 했다. 7시에 시작한 학원 수업이 9시에 끝나면 집 앞 도서관에 가서 12시까지 그날의 공부를 되새겼다. 아침 6시에 일어나면 회사 옆 수영장으로 가서 7시부터 운동을 하고 8시 반에 출근했다. 매일 양복차림에 넥타이를 매고 나타나는 내게 어느 날 학원 선생님이 물으셨다. “김민식 씨, 혹시 통역대학원 입학시험 볼 생각은 없어요?” 마침 직장 내 괴롭힘으로 퇴사를 고민하던 시절이라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6개월 동안 하루 15시간씩 영어를 공부해서 그해 외대 통역대학원 입시에 합격했다. 하루 24시간을 .. 2020. 9. 15.
집착을 버려야 할 때, <무사 쥬베이> 우리 집은 거실 한쪽 벽면이 다 서가다. 빼곡하게 책이 꽂혀있는데 아이들이 자라면서 새 책을 꽂을 자리가 부족하다. 오래된 책들을 버려야 하는데 차마 모진 마음을 내지 못해 발을 동동거리는 참에 서재 한 칸을 차지한 DVD 컬렉션이 눈에 띄었다. DVD 플레이어에 전원을 넣은 지도 어언 몇 년인가. 그래, 이참에 DVD를 정리하자. 버리는 것도 이제는 쉽지 않다. 분리수거를 위해 비닐을 벗기고 종이 표지를 빼내고 플라스틱만 남긴다. 그러다 DVD를 봤다. ‘아, 수병위인풍첩!’ 1996년도에 MBC에 함께 입사한 동기들 중에는 영화광이 많았다. 충무로에서 영화를 찍고 싶었으나, 집안의 반대로 방송사 입사한 친구도 있고, 나처럼 영상 제작 관련 일을 하고 싶다는 욕심에 피디가 된 사람도 있었다. 동기들끼리.. 2020. 9. 1.
가정의 평화가 위태로울 때 <우리 집> 윤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을 이수역 아트나인에서 봤다. 영화가 시작하고 초등학교 4학년 아이의 얼굴이 극장 화면을 가득 채운다. 주변 소음과 아이의 표정만으로 따돌림 당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탁월하게 잡아냈다. 영화 에서도 감독은 같은 방식으로 첫 컷을 연출한다. 초등학교 5학년 하나(김나연)의 표정 위로 엄마 아빠의 대화가 들려온다. 말이 한마디씩 오고 갈 때마다 긴장은 고조된다. 엄마는 아빠가 못마땅하고, 아빠는 엄마가 불만이고, 아이는 가운데서 눈치만 살핀다. 이러다 우리 엄마 아빠 이혼하는 거 아냐? 가정의 평화를 지키고 싶은 아이의 애달픈 노력이 시작된다. 영화를 보는데 주인공 아이의 표정 위로 열 살 때 내 모습이 포개졌다. 어린 시절,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부싸움을 심하게 하셨다. 한번 .. 2020. 6.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