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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9.01 집착을 버려야 할 때, <무사 쥬베이> (12)

우리 집은 거실 한쪽 벽면이 다 서가다. 빼곡하게 책이 꽂혀있는데 아이들이 자라면서 새 책을 꽂을 자리가 부족하다. 오래된 책들을 버려야 하는데 차마 모진 마음을 내지 못해 발을 동동거리는 참에 서재 한 칸을 차지한 DVD 컬렉션이 눈에 띄었다. DVD 플레이어에 전원을 넣은 지도 어언 몇 년인가. 그래, 이참에 DVD를 정리하자. 버리는 것도 이제는 쉽지 않다. 분리수거를 위해 비닐을 벗기고 종이 표지를 빼내고 플라스틱만 남긴다. 그러다 <Ninja Scroll> DVD를 봤다. ‘아, 수병위인풍첩!’

1996년도에 MBC에 함께 입사한 동기들 중에는 영화광이 많았다. 충무로에서 영화를 찍고 싶었으나, 집안의 반대로 방송사 입사한 친구도 있고, 나처럼 영상 제작 관련 일을 하고 싶다는 욕심에 피디가 된 사람도 있었다. 동기들끼리 모여 영화 이야기를 하다 최고의 애니메이션을 꼽을 때,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을 대면, ‘음.......’했고, <아키라>를 이야기하면 ‘오홀!’하는 정도였는데, <수병위인풍첩>을 말하면, ‘앗!’했다. ‘저 친구, 내공이 상당한 고수로군!’

1993년에 가와지리 요시아키가 원작, 각본, 캐릭터 원안, 감독을 모두 맡아 제작한 성인용 애니메이션인데, 노출의 수위가 높고 폭력 묘사도 거침없다. 1990년대 중반에 이 영화를 무협활극 애니메이션이라고 수입했던 분이 음란물 판매 혐의로 감방에 가기도 했단다. 2000년대 초반, 미국 여행을 갔다가 <Ninja Scroll>이라는 이름으로 영어 더빙판 DVD가 나온 걸 보고 냉큼 샀다. 어렵게 구했고, 나름 추억이 깃든 물건인데 버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다 왓챠플레이에서 검색해봤다. 있다! <무사 쥬베이>!


주인공 쥬베이는 떠돌이 닌자다. 쇼군이 하사한 보검을 마을의 보물로 간직한 시골에 어느 날 좀도둑이 들어 칼을 훔쳐간다. 300냥을 내놓으면 보검을 돌려주겠다고 하지만, 가난한 농군들은 대신 쥬베이를 고용한다. 그는 20냥에 좀도둑을 잡아 칼을 되찾아준다. 도둑들은 쥬베이를 비웃는다. 만금을 주고도 팔 수 있는 보검을 어찌 푼돈에 돌려 주냐고. 천하의 보검을 가진 자는 모든 이의 표적이 된다. 목숨을 보전하는 길은 욕심을 버리는 길이다.


곤경에 처한 여인을 우연히 구한 탓에 쥬베이는 귀문 8인조와 원수가 된다. 그들은 절세무공을 자랑하는 악랄한 고수들이지만 쥬베이를 당해내지 못한다. 지나친 욕심 탓이다. 연인에 대한 독점욕이 강한 자는, 타인의 질투 때문에 목숨을 잃고, 자신의 검술이 천하제일이라 여기는 자는 바로 그 자부심 때문에 죽는다. 내가 집착하는 허명, 내가 집착하는 돈, 내가 집착하는 지위가 바로 나의 약점이 된다. 고로 천하제일을 꿈꾼다면 욕망을 버려야 한다. 바라는 게 없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사람이다.


DVD 한 장을 버리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집착을 끊어내는 게 이렇게 어렵다. 이제 나는 수십 년간 모은 영화 컬렉션을 버리는 비운의 덕후가 아니다. 탐욕을 끊어내는 떠돌이 닌자다. DVD여, 안녕, 내게는 왓챠가 있단다.

(왓챠의 브런치에 기고한 글입니다.)

(영화를 보실 분은 아래 링크로~)

 

 

무사 쥬베이 - 왓챠

무사 쥬베이는 카게로를 요괴로부터 구해준 대가로 추격을 당하는 신세가 된다. 그러던 중 계략에 휘말려 온몸에 독이 퍼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쥬베이는 최후의 결투에 나선다.

play.watcha.net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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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섭섭이짱 2020.09.01 06: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저두요저두요 🙋🏻‍♂️🙋🏻‍♂️🙋🏻‍♂️
    책장 정리가 어찌나 어렵던지..
    책집찹이 은근 심해서 말이죠.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전자책으로 구매, 대여가
    가능한건 언제라도 볼 수 있으니 미련없이 떠나 보내고 있어요.
    책들이여안녕, 내게는 전자책이 있단다 하면서 말이죠

    피디님을 집착하게 만든 쥬베이~~~
    과연 어떤 내용일지... 이번 주말에 꼭 봐야겠어요.

    그러고보니 오늘이 9월 첫날이네요
    시간이 진짜 빨리 지나가는거 같아요.
    날씨도 선선해지고 가을이 오는거 같은데
    9월달에는 모두들 건강하고 무사히 지내길 바래봅니다.
    피디님도 건강하시고 행복한 9월달 보내세요

  2. 달빛마리 2020.09.01 07: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모아왔던 음반 CD를 버릴 때 이런 마음이지 않았나싶어요. 저희 집도 서점을 방불케하는 책의 양에 압도되어 비우기를 시작한 이후로 이상하게 맘의 고요가 찾아오더라고요. 그나저나 DVD 한장으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작가님 글쓰기게 푹 매료되었네요. 저도 이런 글을 써보고 싶단 생각을 몇 초 해봤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

  3. 김주이 2020.09.01 07: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DVD 하나를 버릴때에도 이렇게 재밌게 풀어내시는 PD님 클라쓰~~ㅋㅋ
    저도 마크주커버그의 옷장 사진을 보고 옷장을 싹 정리했습니다.
    한번은 더 입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쌓아둔 옷들은 결국 안입게되더라고요.
    옷을 고르고 사고 어떤옷을 입을까 고민하는데 쓰는 시간이 적지 않다는 걸 깨닫고 입을옷들만 남기고 많은 옷을 처분했습니다.
    그 시간은 보다 알차게 다른일에 써보렵니다^^

  4. 오달자 2020.09.01 08: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모프로그램에서 집을 정리해주는 프로가 인기더라구요.

    정리를 하기 전 우선 '버리기'과정을 거치는데요~
    색색깔의 정리 박스3개를 준비해서 욕구박스,필요박스,버림 박스, 구분해서 버리기부터 시작해서 공간의 재구성까지~~
    아~~주 신박한 프로그램이더라구요.

    누구에게나 소중한 물건이고 추억이 깃든 물건이지만, 그 프로그램에서 말하기를~~
    정리의 기본은 '비우기'

    저도 오늘은 아이들 어렸을때 모아뒀던 DVD를 버릴까합니다.^^

    • 새벽부터 횡설수설 2020.09.01 09: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달자님, 저도 정리 프로그램을 보고 방을 정리했어요. 80권 가량의 책을 기부하거나 버렸고, 옷은 속옷, 양말 등 자잘 구레한 것들을 포함해서 100벌 정도 버린 것 같네요. 추억의 사진들과 물품까지 다 정리해버렸어요. 그랬더니 방 안에 생긴 공간들에 햇볕이 비치면서 방에서 빛이 나는 거 있죠. 인간관계도 좋은 인연들을 많이 만났구요. 추천합니다. 정리! ㅎㅎ

  5. GOODPOST 2020.09.01 0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살다보니 버리기가 제일 힘든것 같습니다.
    마음의 욕심, 가지고 있는 집착, 소중하게 여겼던 물건 등

    저도 pd님처럼,,, 하나씩 버리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먼저 보이는 물건부터,,,
    오늘도,,,무협영화에서 삶의 지혜를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

  6. 새벽부터 횡설수설 2020.09.01 09: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버리지말고,, 알라딘에 판매하세요....ㅎㅎ^^;;;

  7. 꿈트리숲 2020.09.01 09: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10년 전부터 아름다운 가게를 애용하고
    있습니다. 책, CD, DVD 가전, 인테리어 용품,
    옷까지 기부를 하고 있지요.

    알라딘도 저의 가계에 작게나마 일조하고요.
    나에게 필요없다는 걸 인식하는 거부터 정리의
    시작이라고 봐요. 정들었던 걸 잘 떠나보내는 게
    정리의 한 방법이라고 사진으로 남기는 걸 종종
    봤어요.

    근데 피디님처럼 글로 남기는 것 또한 아주 멋진
    방법으로 생각됩니다. 사람에게만 이별 편지를
    쓸 게 아니라 내가 아끼던 물건에게도 이별 편지
    쓰는 것, 작가님에게 꼭 맞는 방법 같아요~~

  8. 보리랑 2020.09.01 12: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Death Cleaning 이라는 말이 와닿아요. 남겨진 사람이 치우느라 고생하지 않도록 내가 미리미리 치우기.

    1일1버리기 555일 했는데도 못버리는게 있어요. 건강에 대한 책들요. 언젠가 내 신념이 바뀌면 버리겠죠 ㅎㅎ

  9. 아빠관장님 2020.09.01 18: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맞습니다!!

    우리 집에도 마따히 버려야하는데, 그러지 못한 책, 옷 등이 한 트럭 이상 있지요. ^^;;

  10. 아리아리짱 2020.09.01 19: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 피디님 아리아리!

    저도비디오 테입부터 클래식 음반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는데
    이번참에 정리 해서 버려야겠어요!

    쓰던 물건 정 떼기가 쉽지않아
    될 수 있는대로 사들이기를 참고 있습니다.
    미니멀 라이프 제대로 실행해 볼 참입니다. ^^

  11. 옥포동 몽실언니 2020.09.03 11: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하! 재밌네요! 영화 내용이 딱 제 남편이 좋아할 스타일이라 남편도 이 영화 봤는지 내일 일어나면 물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