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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4.07 다시 오지 않는 시간 (17)

동네 도서관에 책 반납하러 갈 때마다 저는 반납도서대 위의 책을 살펴봅니다. 이게 나름 책 고르는 요령 중 하나에요. 도서관에는 수 만권의 장서가 있지요. 그 중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요? 반납도서대 위에 놓인 책은 누군가 나 대신 책 고르는 수고를 해준 책이에요. 여기에 좋은 책이 있을 확률이 더 커요. 누군가 이미 고르고 고른 책이니까요. 최영미 시인의 시집이 놓여있는 걸 보고 오랜만에 시집을 읽을까 해서 빌렸어요. 

<다시 오지 않는 것들> (최영미 / 이미)

제목이 아련합니다.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것들 중에는 시간이 있지요. 지금은 힘들어도, 지나고 나면 언젠가 그리워질 시간까지도. 시인이 6년 만에 낸 신작 시집인데요.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으며, 한 시대가 저물었음을 함께 슬퍼한 적이 있어요. 2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떤 변화가 시인을 찾아왔을까요? 책의 첫번째 수록작입니다. 

<밥을 지으며>

밥물은 대강 부어요
쌀 위에 국자가 잠길락말락
물을 붓고 버튼을 눌러요
전기밥솥의 눈금은 쳐다보지도 않아요!
밥물은 대충 부어요, 되든 질든

되는대로
대강, 대충 살아왔어요
대충 사는 것도 힘들었어요
전쟁만큼 힘들었어요

목숨을 걸고 뭘 하진 않았어요
(왜 그래야지요?)
서른다섯이 지나 
제 계산이 맞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답니다! 

(11쪽)

시련이 올 때마다 생각합니다. '아, 내가 너무 계획을 철두철미하게 세웠나보다.' 일의 계획을 꼼꼼히 세울수록 세상은 알려줍니다. '얘야, 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란다.' 그렇다고 인생을 대충대충 살기는 힘드니, 취미 생활이라도 대충대충 합니다. 책을 고르는 저의 자세가 그래요.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손끝에 집히는 대로 읽습니다. 그렇게 읽다가 마음에 드는 걸 찾아내면,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고, 서점으로 달려갑니다. 이 시집은 소장욕구를 발동시킵니다. 이따금씩 꺼내어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시들이 많아요. 그중 또 하나가 <낙원>입니다.

<낙원> 

"인생은 낙원이에요
우리들은 모두 낙원에 있으면서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지요"

카라마조프 형제의 말을 베낀 그날은
흐린 날이었나, 맑았다 흐려진 하루의 끝,
까닭 모를 슬픔이 쏟아지던 저녁이었나

아낌없이 주는 나무 밑에서 낙엽을 줍던 소녀에게
슬픔도 고독도 핑크빛이었던 열다섯 살에게 
가장 먼 미래는 서른 살이었다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던 서른을 넘기고 
오십이 지나 뻣뻣해진 손가락으로 쓴다
어제도 오늘 같고 오늘도 내일 같아
달력을 보지 않는 새벽,

인생은 낙원이야. 
싫은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하는 낙원.

(74쪽)

<사업자등록>이라는 시를 보면, 아무도 최영미 시인의 시집을 내주지않아 직접 출판사를 차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드나들던 머리에 계산서와 어음과 물류창고를 집어넣습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매 순간이 싸움의 연속입니다.  

시를 읽다보면, 문득 과거 내가 겪었던 일이 떠오릅니다. 시와 소설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소설은 나를 주인공의 세계로 데려가고, 시는 나를 내 안의 세상으로 데려갑니다. 시를 읽으며 다시 오지 않는 날들을 되새겨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을 떠올리면, 지금 이 순간 내 곁에 있는 것들의 소중함이 새록새록 돋아나거든요.

뜻하지 않게 모든 가족들이, 재택근무로, 개학연기로, 집안에 옹기종기 모여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가족이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며, 힘든 순간도 있겠지요. 언젠가는 이 시간도 웃으며 추억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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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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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주이 2020.04.07 06: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사람들이 반납한 책에서 가끔 빌려갈 책을 고르는데^^

    언젠가는 이 시간도 추억할 수 있는 그날이
    빨리 오면 좋겠네요.

    인생은 낙원~
    삶은 사람들과 함께 같이 살아야하는 낙원~

    감염병으로 많은 것들이 무너지고 있는 현재에 더욱 따뜻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글귀네요.

    오늘도 낙원을 즐겨보렵니다!
    건강하세요. 모두~

  2. 아리아리짱 2020.04.07 07: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PD님 아리아리!

    오늘 덕분에 시집을 읽어보고 싶은 날입니다.
    낙원에 있으면서 알지 못하고 있는
    그 낙원을 찾으려 애써 보렵니다.
    그 낙원에서 건강하게 견디는 모두 되세요! ^^

  3. 제니스라이프 2020.04.07 07: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철두철미하고 꼼꼼한 남편이 항상 저보고 '넌 맘 편해서 좋겠다' 라고 말하는데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게 참으로 위로되네요.
    대충 사는 죄로 대한민국에서 참 많이 치였거든요 ㅎㅎ

    한 편이 있으니 앞으로도. 계속 대충 살렵니다 ^^

  4. 보리랑 2020.04.07 07: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서관에 가면 여러권 뽑아 자리 잡습니다.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피디님 책은 읽기 쓰기 경험 내공 팍팍, 넘사벽, 넘나 좋은데 표현할 말이 부족합니다. '피디님 글은 보석처럼 홀로 빛난다~' 오늘 글은 시심 발동입니다.

    가정은 때때로 정말 미운 이도 함께 해야 하는 낙원입니다. 자다가 낄낄 웃는 작은딸, 제가 망가지면 백만불 미소를 보이는 큰딸. 짝사랑이지만 지금 이순간 저를 젊게 해주는 보물들입니다.

  5. 아프리칸바이올렛 2020.04.07 07: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 몇 달만에 많은 것들이 변한 일상
    참 뜻대로 살아지지않는다는거 많이 느껴요
    벚꽃이 피어있는 시간도 곧 올 해는
    다시 오지않는 시간으로 남겠죠
    싫은 사람들과 함께 같이 살아야 하는
    현실적인 낙원말고
    비 오는 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쓴 우산 밖으로 빗소리 들으며 성당 옆 계단을
    걷는 꿈같은 낙원을 상상해봅니다

  6. 오달자 2020.04.07 09: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의 최영미 시인...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이 시대의 낙원은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되짚어보게 되는 시구절 이네요.

    인생...되는대로 살아도 전쟁이다.
    라는 구절에 격한 공감이 갑니다.

    모처럼 피디님 추천해 주신 시집.
    도서관엔 못가니 주문해서 읽어야겠어요~

    오늘의 낙원을 찾으러 고고~~~

  7. GOODPOST 2020.04.07 09: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설은 나를 주인공의 세계로 데려가고 시는 나를 내안의 세상으로 데려갑니다.
    우와,,,어찌,,이런 적절한 표현을~~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최영미 시인
    다시,,,<다시오지 않는 시간>으로 만나게 되어 넘 반갑습니다.
    pd님 좋은 시 소개로 우울한 세상 내안의 세상과 시로 랑데뷰 해볼렵니다.
    감사합니다.

  8. 코코 2020.04.07 10: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올려주신 시들이 참 좋습니다.
    저도 이 시집 사야겠어요.
    며칠 전엔 중간 정도만으로 사는 것도 참 쉽지 않구나..
    참 힘들다.. 란 생각을 했습니다.
    나이 서른엔 지나 온 이십 대 때의 결정들에 후회하지 않는다
    라고 스스로 꽤 자부했었는데요.
    그 확신에 찬 마음도 삼십 대를 정신없이 살다 보니 변하더라구요.
    지난날 이렇게 살았으면 어땠을까, 이런 결정을 내렸음 어땠을까..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좀 알았다면 덜 실수하고
    좀 더 미래를 위해 나은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까..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올라옵니다.

    꼬꼬독 영상도 너무 즐겁게 잘 보고 있습니다. ^_^
    오늘도 건강한 하루 보내세요.

  9. 꿈트리숲 2020.04.07 13: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음이 어지럽고 두꺼운 책이 잘 잡히지 않을 때 시집만큼 좋은 책도 없다 싶어요.

    한권을 완독하지 않아도 단 한 편만으로도 완독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읽으면서 서른에 진입한 때가 생각나네요. 서른은 정말 많은 나이라 여겼는데 지금 보니 완전 애송이였어요.

    서른도 마흔도 다시 오지 않는 시간이고, 지금의 시간도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니... 다가올 시간을 위해 오늘 좀 더 재밌게 보내야겠어요.

    좋은 시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0. 봄처녀 2020.04.08 08: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집 잘 안읽은데 마음에 성큼 와닿네요~~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인데 참 낙원같이 지내기 어렵고 어렵습니다...

  11. 햇살사람 2020.04.08 10: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가님 덕분에 시로 시작하는 아침이 좋습니다^^
    가장 먼 나이가 서른이었던 열다섯을 저도 보냈는데, 이젠 서른은 푸르른 젊은 날로 기억되네요.
    내 안의 나로 데려가준다니.. 책장에 시집 하나 꺼내 읽고 싶은 하루에요. 감사합니다!!

  12. 깃털경운기 2020.04.09 07: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강 대충 살아도 전쟁이었다는 글귀가 참 와닿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아침이네요 지금도 빼곡하게 일정을 짜지만 돌아보면 대충넘긴게 많더라구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13. 돌체 2020.04.10 00: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 안녕하세요 매번 좋은 책, 지혜와 경험 혼자 간직하지 않으시고 함께 나눠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피디님이 공유해주시는 이야기에 큰 힘을 얻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세요. 제가 지금 쓰고 있는 책도 부디 피디님의 레이더망에 잡힐 만큼의 수준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답니다 ㅎㅎ 언젠가 (너무 늦지 않은 때에) 작가로서 피디님을 직접 뵙게 되는 그 날에 이 댓글을 다시 보여드릴게요:) 몸 조심하세요!!

  14. 섭섭이짱 2020.04.10 07: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시집은 잘 생각을 못했는데
    내안의 세상으로 데려가줄 시집들도 찾아 읽어야겠어요
    요 시집도 읽을 책 목록에 저장~~~~~

    좋은 시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5. 나겸맘 리하 2020.04.10 14: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국에 출판사가 2-3만 곳이 넘는다고 해요.
    책을 읽는 사람은 점점 줄어드는데
    출간하고자 하는 사람은 오히려
    늘어나는 상황이다보니
    팔리는 책만이 출간기회를 잡을 수
    있는 거죠.

    그 속에서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유명작가가 아닌 이상 말이지요.

    아는 시인 몇 분도 자비로 시집을 출간했습니다.
    최영미 시인의 <사업자등록> 시가
    어떤 마음에서 쓰여졌을지
    바로 이해가 되네요~
    피디님처럼 이렇게 시를 읽어주시는 분들이
    계시니...시인들이 직접 출판사도
    차리게 되는 것 같아요.
    감사한 일이지요~

  16. 슬아맘 2020.05.27 17: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충 짓는 밥 ~~~그래도 밥이고 심지어 맛도 있어요.
    싫은 사람들과 사는 낙원
    결국 낙원에도 인생사는 똑같은가봐요.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17. 진주늘해랑 2020.06.04 18: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상에 세상에 "영어책 한권읽어봤니?"
    한권읽고

    이렇게 공짜세상까지 연결되다니...
    감동으로 졸도수준입니다.

    뭉클한 감동을 안겨주시는 글들로
    일상을 반성하고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