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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3.13 약속이 이뤄지기도 하는구나 (21)

종종 만나 좋아하는 책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 중, MBC 라디오 장수연 피디가 있어요. 그가 쓴 책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를 참 좋아하는데, 부지런한 후배가 새 책을 냈어요.

<내가 사랑하는 지겨움> (장수연 / Lik-it)

장수연은 라디오 피디가 되는 게 오랜 꿈이었다고요. 2007년 대학 졸업하고 MBC 공채 면접까지 올라갔다가 떨어집니다. 내심 필기만 붙으면 면접위원들은 자신을 알아볼 거라 생각했다가 낙심합니다. 라디오 피디는 뽑는 인원도 워낙 적고 자주 뽑지도 않기에 이제 다른 직업을 알아봐야하나 싶습니다. 시련이 찾아오면 그도 책을 읽나 봐요. 김연수 작가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읽습니다. 취업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장편소설을 읽고, 작가의 북토크에 찾아갑니다.

‘대학로 연우소극장에서 열린 작가와의 만남 행사는 소박하고 따뜻했다. 아주 가까운 자리에서 작가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들었다. 작가의 목소리는 작았고, 사투리 투가 있었고, 이런 행사가 쑥스러운 듯 자주 웃었다. 그의 이야기가 재미있고 그 공간에 흘러넘치는 기운이 너무 좋아서 서러워졌다. 이런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은데....... 정말 만들고 싶은데....... 질문을 받는 시간에 나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제가 라디오 피디가 꿈인데요, 만약에 진짜 라디오 피디가 되면, 혹시 제가 만드는 프로그램에 출연해주실 수 있으세요?” 포기하겠다고 결심한 상태였는데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아무튼 작가는 웃으면서 그러겠노라고 대답해줬다.’

(12쪽)

다음해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던 저자는 다시 MBC 공채 소식을 듣습니다. 기대보단 미련에 가까운 마음으로 접수하고요. 거짓말처럼 최종 합격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있었다고요. 피디라는 직업을 마음에서 내려놓은 상태였지만, 그때 그 소극장에서 "만약에 제가 라디오 피디가 되면..."이라는 말로 가느다란 실 하나를 남겨놓았던 일이 계기였다고 해요.

입사하고 처음 배정받은 프로그램이 <장진의 라디오 북클럽>인데요. 담당 작가와 회의를 하던 중, 김연수 소설가는 새 책이 나올 때마다 섭외를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계속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씩 웃어요. "제가 한번 전화해볼게요!" 작가에게 연락처를 받아 전화를 합니다. “혹시 2년 전 대학로에서 하셨던 북토크 기억하시나요?” 독자로 만났던 김연수 작가와 피디가 되어 다시 만납니다.

책을 보니, 여기에는 또다른 사연이 있어요. 김연수 작가의 산문 <소설가의 일>을 보면 작가가 처음 사인회를 했을 때 일화가 나옵니다. 평일 오후라 독자가 없을까봐 출판사에서 저자의 사인을 받으면 책을 할인 판매하는 이벤트를 했어요.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드는 바람에 알바 뛰는 기분으로 사인을 해치웠다고요. 그 트라우마 때문에 김연수 작가는 독자 기피증 비슷한게 걸렸답니다. 그 증상을 이겨낸 사연이 있어요. 난생처음 독자와 대화하는 행사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손을 들더니 라디오 피디가 꿈이라며 나중에 피디가 되면 꼭 섭외하고 싶다고요.

‘2009년 5월, 그 독자에게서 정말 연락이 왔다. MBC 라디오의 피디가 됐으니 약속을 지켜달라고. 알았다며 전화를 끊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약속이 이뤄지기도 하는구나. 그 말을 혼자 중얼거리는데, 아, 놀라워라, 내 안에서 벽 하나가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일을 겪은 뒤로 모든 일의 선의를 믿자고 생각하게 됐다. 1994년 서울도서전에서 내 사인을 받은 사람들도 단순히 공짜 책을 받으려는 욕심에 그렇게 긴 줄을 선 게 아니라 젊은 작가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줄을 선 것이라고.’

-김연수,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2014, 136쪽

 

그래요, 약속이 이뤄지기도 하는군요. 예전에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 책이 나왔을 때, 장수연 피디와 김소영 아나운서의 책방에서 북토크를 한 적이 있어요.

(저자의 브런치에서 가져온 사진입니다. ^^)

좀 부끄러웠어요. 아나운서 앞에서 피디 둘이서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 이번에 장피디와 제 책이 거의 같은 시기에 나왔기에, 둘이 합동 북토크를 하려고 했는데요. 코로나 때문에 취소되었어요....... 흑흑.......

우리 둘 다 사랑하는 지겨움이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피디라는 직업도, 독서라는 취미도, MBC라는 회사도, 심지어 저자 북토크 쫓아다니는 것까지.

언젠가 출근길에 책 사진을 올렸더니 누가 요즘 시기에 딱 맞는 제목이라고. 맞아요. 요즘처럼 지겹게 집에서 틀어박혀 지내야 할 때 읽기 딱 좋은 책이에요. 어린 후배지만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인생 선배의 얘기를 듣는 기분입니다. 새삼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봅니다.

'내가 사랑하는 지겨움'은 또 무엇이 있을까?

코로나로 인해 우리의 일상이 흔들리고 있어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 고 믿습니다. 언젠가 둘이 다시 웃으며 합동 북토크를 하는 날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약속이 이뤄지기도 한다는 걸, 우린 아니까요.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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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0.03.13 06: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 나중에라도 꼬꼬독에서 북토크 볼수 있나요?

  3. 김주이 2020.03.13 07: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책도정말 예쁘고 제목도 매력적이네요.
    출근 길에 글을 읽는데 왜 이렇게 뭉클할까요...
    내가 사랑하는 회사도...
    오늘도 모두가 무사하기를 바랍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4. 아리아리짱 2020.03.13 07: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 PD님 아리아리!

    책 제목이 참 정겹습니다.

    김연수 작가도 함께 소개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코로나가 진정되고
    두 분이 함께 따뜻한 북 콘서트
    얼른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5. 보리랑 2020.03.13 08: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장수연 피디님은 김연수 작가님을 모셔야 했기에 합격하게 된듯요. 작가님도 마찬가지로 극복할게 있었기에... 두분 성함도 비슷하네요 😄

  6. 아빠관장님 2020.03.13 09: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서 이 또한 지나가서, 김피디님 장피디님 합동 북토크의 약속이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7. GOODPOST 2020.03.13 09: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삶에서 실패를 겪으면서 우리는 좌절합니다.
    말로는 포기라고 말하지만,,맘속에서는 가느다란 실 하나를 남겨 놓습니다.

    그 가느다란 실의 인연이 두 작가의 희망으로 연결된 것 같아 감동입니다.
    김연수 작가의 말처럼 "약속도 이뤄지기도 하는구나"
    이 말이 힘들게 실패를 겪고 있는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0.001%라도 희망의 말이
    되기를 기원해봅니다.

  8. 꿈트리숲 2020.03.13 10: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다가 저 소오름 돋았어요.
    지상에 드러나는 우연 같은 인연이
    실은 땅속 어딘가에서 계속 이어져서
    나타나는거라는 생각에서요.

    북토크 열심히 다니던 저는 손을 들고
    아직 질문을 못해봐서 어떤 약속도
    안 이뤄졌나 모르겠어요. ㅎㅎ
    두 분 북토크 할 때 꼭 가보고 싶어요.~~

  9. 꿈꾸는 강낭콩 2020.03.13 1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멋진 사연이네요:) 북토크가 취소돼 안타깝습니다ㅠ 코로나 사태가 얼른 진정돼서 모든 일상이 제자리를 찾았으면 좋겠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10. 곰팡이 2020.03.13 1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사랑하는 지겨움.. 과연 어떤 내용일까요? 호기심을 일으키는 책제목입니다. 나이도 들어가고, 매일의, 매년의 생활이 거의 변함없이 지나는 가운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지겨움의 대상은 무엇일까요? 일상? 직장? 지겨움과 꾸준함의 차이는 또 뭘까요? 책을 보기 전에 먼저 조용히 생각해보고 책을 펼쳐보렵니다.

  11. 새벽부터 횡설수설 2020.03.13 11: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mbc에는 정말 훌륭하신 분들이 많이 계시네요^^

  12. 섭섭이짱 2020.03.13 11: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제가 장수연피디님 책 나온걸 보고 북토크 하실거라 생각했는데 역쉬 통했네요. 장피디님 이전 책도 잘 봤는데 이번 책도 기대되네요. 저도 지겨움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아니 그것보다는 지겨움을 잘 모르게 되었다가 맞는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제가 피디님 만나고 부터는 매일 공즐세 블로그 글 읽고, 피디님 영상, 기사 찾아보고, 또 블로그에서 소개해주신 책 읽고, 영화 찾아보고, 여행지도 궁금해서 가보고. 그리고 소개해주신 작가들의 또 다른 책도 찾아보고, 그러다 또 새로운 영상들도 찾아보게 되고...이러다보니 지겨움이라는건 있을 수 없게 되었더라는 ^^

    매일 민식비우스의 띠에 갖혀지내다보니 지겨움 따위는 물러가게 되었네요 ㅋㅋㅋ

    하루빨리 김민식 피디님과 장수연피디님이 같이 북토크 하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코로나야 물러가라~~~

  13. 순양 2020.03.13 14: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다가 눈물이 왈칵 솟구쳤어요
    내용이 왜 이리 팍 가슴에 오는지...
    그러다 피디님" 코로나----흑흑"에서 웃음 팍 터지는 이 순간.
    오늘 좀 힘든데 기분이 갑자기 좋아지내요.
    책 사서 조고 싶어요^^

  14. James K 2020.03.13 17: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으앗! 합동 북토크가 취소되다니요ㅠㅠㅠ
    너무 슬프네요ㅠㅠ

    오늘 드디어 '나는 질 때마다 이기는 법을 배웠다' 다 읽었습니다:)
    피디님의 투쟁 서사를 읽고 피디님에 대한 존경심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15. 2020.03.14 06: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6. 오달자 2020.03.14 12: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사랑하는 지겨움' 이란.....

    두 피디님의 북토크가 코로나로 인해 무산됨을 아쉬워하며....
    언젠가는 만나 뵐 소중한 인연들...
    깊이깊이 간직하고 기대해 보며 살아야겠습니다.

    코로나.썩 물럿거라!

  17. 최원장 2020.03.14 16: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간단히 제 소개를 하자면 부산에서 가족들이랑 조촐하게 학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교육청의 강력한 권고로 1달간 휴원을 하게 되었는데요.
    이러한 기간에 작가(피디)님의 새로운 책을 임승수 작가의 페이스북에서 소개받아 주문하였고,
    몰입감있게 일독했습니다. 그리고 "영어책 한권 외워봤니?" "매일 아침 써봤니?"도 이 글을 쓰는
    시간부로 일독을 끝냈습니다. 글이 참 잘 읽힌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그 답은 작가님이 쓰신
    책 내용에 있더군요. 말하듯이 글을 쓰신다고.
    동기부여가 많이 되더군요. 제 스스로를 돌이켜보게 되구요. 처음 겪는 상황에서 주늑들지 않고
    더 힘내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글을 쓰는 이유는
    감사합니다란 말을 좀 길게 썼네요.
    작가님이 쓰신 내용 완전 몰랐던것은 아닌데 실천을 하지 않았더라구요.
    작가님이 아침에 글을 쓰실 때 전 작가님의 글을 기다리며 저도 글쓰기, 영어 공부에 매진하겠습니다.^^
    떠오르는 라이벌이 될 수 있도록요.(한 15년 후에나 가능하겠죠? 글쓰기 실력도 쌓이는 것인데)

  18. 아프리칸바이올렛 2020.03.16 07: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장피디님과 김연수 작가의 만남은
    가슴 뭉클합니다
    서로가 모른 채 큰 힘이 되어
    한 사람의 꿈을 이루게 하고
    선의를 믿게 변했군요
    왠지 비슷한 느낌의 두 피디님의
    기대되는 합동 북토크가 코로나로
    취소되었다니 무척 아쉬어요

  19. littletree 2020.03.17 2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일상을 돌아볼 시간이 주어지니 다시 피디님의 블로그가 선물로 다가와요. 어떤 책을 고를까 고민될 때마다 추천해 주신 책들이 실마리를 주네요. 변함없는 이 곳과 피디님의 글쓰기 습관에 감동합니다♡

  20. 더치커피좋아! 2020.03.17 20: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장수연 피디님과 김민식 피디님의
    합동 북토크 기다려집니다!
    꼭 찾아갈게요~~^^

  21. 날아랏 2020.03.20 17: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춘기 딸이 요즘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지겨워.. 입니다. 워낙 세상 시큰둥, 시크한 애가..
    집에만 있으려니.. 입에 달고 삽니다.. ."지겨워..."
    정말 세상 듣기 싫은 지겹다... 라는 단어가..
    책으로.. 문장으로 보여지니 다른 세상이 되네요.
    참고로 저는 해외교민입니다.
    영어도 못해 원서도 못읽고..
    한글책을 구하기 힘들어 못읽고..
    여전히 종이책만 책이라고 믿는 저의 촌스러움이 독서를 멀리하는 저의 핑계일까요? ㅎㅎ

    피디님 책 리뷰를 읽으며 대리만족을 합니다.

    지겹다... 라는 다른 시각...
    같은 환경을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작은 기적을 경험한 오늘..
    지겹다.. 라고 말하는 딸아이의 말에..
    한숨으로 대답할 것이 아니라... 그래..그렇구나..
    동조로.. 긍정으로 답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