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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0.01 실패에 대처하는 자세 (37)

(오늘자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고등학교 진로특강에 가면 아이들이 물어본다. “드라마 피디로 살면서 가장 힘든 때가 언제인가요?” “내가 이 학교 전교 꼴찌라고 생각해봐요. 그걸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좀 덜 힘들어요. 그런데 전교생이 그걸 알고 우리 동네 사람들까지 안다고 생각해봐요. 사는 게 힘들겠지요? 저는요, 드라마 시청률 꼴찌를 하면 뉴스에 나고 온 국민이 다 알아요.” “그렇게 힘들 땐 어떻게 하나요?” “일단 이게 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야 덜 힘들거든요.” “다 내 탓이라 하면 더 힘들지 않나요?” “지금은 힘들지 몰라도, 나중에는 이게 덜 힘들어요.”

시청률이 부진할 때 찾아오는 유혹이 있다. 남 탓을 하자는 유혹이다. ‘작가가 대본을 잘 못 쓴 거야.’ ‘배우가 연기를 잘못한 거야’ ‘카메라 감독이 잘 못 찍은 탓이야.’ 이런 유혹에 굴복하면 당장 내 마음은 편해질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성장의 기회를 잃게 된다.

작가나 배우는 예민한 사람들이다. 대중의 외면을 받으면 상처받는다. 이때 리더로서 감독의 역할은 상처 받은 이들을 돌보는 것이다. 그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다면 위로가 어렵고, 결국 상대를 외면하게 된다. 시청자의 무관심보다 더 아픈 건 감독의 배신이다. 결국 소문이 퍼진다. ‘그 감독은 작품 안 되면 작가/배우 탓 하더라.’ 인생은 평판 게임이다. 나와 함께 일을 한 사람들을 등지고 좋은 평판을 쌓는 길은 없다. 

드라마 피디가 살 길은 하나다. 드라마가 대박이 나면 모든 걸 다른 사람 공으로 돌리고, 쪽박을 차면 모든 게 자신의 탓이라고 고개를 숙인다. 작가와 대본을 고르고, 배우와 촬영진을 꾸리는 것도 감독의 일이다. 나와 함께 일을 하는 전문가들이 일을 제대로 못했다면, 둘 중 하나다. 사람을 잘못 뽑았거나, 업무 지시를 잘못 했거나. 둘 다 감독의 잘못이다. 리더십은 극한의 오너십이다. 일이 잘못되었을 때 결과에 책임지는 사람이 바로 리더다.

나이 스물에 나는 무척 불행했다. 어려서부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걸 좋아했기에 문과에 진학하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나를 의사로 만들고 싶어 했다. 수학을 못하는 나를 억지로 이과로 보냈고, 성적이 낮아 결국 공대에 진학했다. 대학에 가서는 하루하루가 다 괴로웠다. 국문과나 영문과 학생들을 부러워하며, 매일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았다. 어느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나이 스물에 불행한 건 아버지 탓이다. 그런데 내가 나이 마흔에도 불행하고, 쉰에도 불행하다면 그것도 아버지 탓일까? 나이 스물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공대 전공을 포기하는 대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는 마음으로 도서관을 매일 찾아갔다. 국문과 청강생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읽고 싶은 소설을 읽고 저자들의 강연을 쫓아다녔다. 영문과 독학생이라는 자세로 혼자서 영어 회화 교재를 외우고 도서관에서 빌린 원서를 탐독했다. 내 삶의 조건을 바꿀 수는 없어도, 내 삶의 태도는 내가 정할 수 있다. 인생의 전환점은 언제 찾아오는가?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탓이라고 믿는 순간, 삶은 변화한다. 남이 망친 인생이라며 남 탓만 해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해결책이 내게 있다고 믿어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드라마가 망하면 나는 또다시 도서관으로 간다. 내가 하는 고민을 누군가 했을 것이다. 그 사람은 고민의 결과, 자신이 찾은 답을 책에 글로 남겼을 것이다. 상처 받은 사람을 위로하는 법, 실패의 두려움을 딛고 다시 도전하는 법, 창작의 고통을 극복하는 법을 책에서 찾아본다. 내가 공부한 내용을 함부로 타인에게 적용하지는 않는다. 작가에게 작법의 기본에 대해 충고하는 대신, 내가 더 좋은 대본을 고르는 방법을 고민한다. 내가 배운 것을 남에게 적용하면 상처가 될 수 있다. 나 자신을 향할 때 진짜 공부가 된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이제는 기뻐한다. 내게 또다시 성장의 기회가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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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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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팬입니다 2019.10.01 1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0월의첫날에 피디님 글보며 눈물을 흘리고있습니다.
    제 탓이라고 생각하니 상대에게 미안함 마음이있어서요ㅠㅠㅠ
    늘 힘을 주시니 고맙고 감사합니다^^

  3. 새벽부터 횡설수설 2019.10.01 11: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PD님과 비슷해요. 고비때마다 저는 책을 통해 그 문제들을 풀어나가곤 했거든요. 정말 처절하게 책을 읽었던 것 같아요. 아마 그때 읽은 첫 책이 '이근후' 박사님의 책이였던 것 같은데 제목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요. 언제 한번 다시 읽어보려고요. 초심의 마음으로요!! :)

    우리 주변 몇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보다 깊은 통찰이 담겨있는 책 한 권을 보는 것이 내 삶에 훨씬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모두들 본인만의 깊은 고민을 책을 통해 해결해나가시길 바라요. 화이팅~!

  4. joyful life 2019.10.01 1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뻐하라, 또 성장의 기회가 왔다!!
    도서관입니다. 피디님 글이 위안을 줍니다. 감사합니다. 제 삶의 태도를 다시 긍정적으로 바꾸겠습니다. 얍!

  5. 라엘 2019.10.01 1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기간 읽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리액션을 합니다.
    실패를 맛보는 게 참 힘든데, 남 탓이라는 달콤함을 버리고 내 탓이라는 성장의 기회 속에 우직하게 서야겠습니다. 무엇이든 이 또한 지나갈테니, 지나가는 과정을 제 성장의 기회로 삼겠습니다. 항상 포스팅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6. 초현 2019.10.01 13: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생은 평판 게임이다. 나와 함께 일을 한 사람들을 등지고 좋은 평판을 쌓는 길은 없다.
    와~~~오늘 피디님 작두 타셨네요^^!
    가슴이 뜨거워지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7. 꾸반 2019.10.01 13: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으면 힐링도 되고 충전도 되고

  8. 더치커피좋아! 2019.10.01 15: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언가를 잘 하고 싶을때
    잘 하는 길은..
    매일 꾸준히 하는것입니다.'
    아침에 읽은
    '매일 아침 써봤니? '
    P.106
    오늘도 감사합니다!
    피디님~파이팅!^^

  9. 김밥과 팥빙수 2019.10.01 15: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못을 내안에서 찾아야 해결책을 찾을수있다는 말씀이 와닿습니다. 피디님 좋은말씀으로 충전하고, 하교한 아이들과의 바쁜 오후시간 큰소리없이 잘 보내보겠습니다. ^^

  10. 봄처녀 2019.10.01 16: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난이 올때 성장의 기회가 왔구나 생각할수 있는 경지?가 되기까지.....

  11. 맘관리 2019.10.01 18: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좋은 말씀입니다. 일이 풀리지 않을때......성장기회....
    좋은글 앞으로도 기대할께요. 축복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12. 2019.10.01 19: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3. 김주이 2019.10.01 19: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PD님의 강인한 멘탈에 박수를!
    본받고 싶어요.

    안좋은 상황에서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보렵니다.

  14. 오달자 2019.10.01 21: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남탓 하지 않기!
    피디님께서 오늘 저를 꽤뚫어 보신듯.ㅠㅠ

    사실, 오늘 왠종일 업무적 스트레스로 인해 같이 일하는 동료 원망을 많이했거든요.
    제게 일침을 가하는 한마디!
    "남탓하지 않기!"

    그래요~
    제가 부덕한 탓이지요.
    내일은 휴무날^^
    남 탓 하지 않고 수양하기 나서봐야겠어요~~

  15. 두기탁 2019.10.01 22: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이제는 기뻐한다.
    내게 또다시 성장의 기회가 왔구나!

    역시 한 차원 높으시군요^^

    저도 도전해보겠습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기뻐하며 글도 쓰고, 전환도 하며
    성장의 기회가 왔음에 감사하는 삶으로의 변화를 위해서.

  16. 뽀로로 2019.10.02 14: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남이 망친 인생이라며 남 탓만 해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해결책이 내게 있다고 믿어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 말씀이 저를 콕 찌르네요. 저도 오랫동안 남 탓을 많이 했습니다. 내 잘못이 아니라 다 누구때문에 내가 지금 이렇게 안좋다고 원망 많이 했죠.부모님,친구,신...
    김민식피디님을 알게 된 이후 조금씩 조금씩 저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었어요. 저도 책에서 답을 구하려고 하구요.현실이 싫어서 책으로 도피하기도 하구요. 감사합니다. 김민식피디님을 알게 되어 너무 좋고 감사합니다.꾸벅.

  17. 모과 2019.10.02 19: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하루를 수많은 불안과 고민으로 보낸 후 피디님의 글을 보니, 지금의 상황을 남탓으로 돌리고 있던 게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오늘도 삶의 태도를 배워갑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18. vivaZzeany 2019.10.04 09: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유머있고 재치있는 PD님 속에 이런 삶에 대한 진지한 모습이 참 좋아요!
    웃다가 보석을 발견하는 짜릿한 기분!
    그래서 제가 PD님을 쫓아다니고 있나 봅니다! ^^

    마지막 사진 속 PD님의 웃는 모습이 어쩜 저리도 멋진지!! (아항항항항하~~~)

    모든 것을 내 책임으로 가져간다! 정말 멋지십니다!
    책임으로 가져오는 게 자책이 아니라, 배움과 성장의 기회라는 것!
    그것을 실천하고 계신 PD님, 존경합니다!! (PD님은 반전매력덩어리~)

  19. 포도포도 2019.10.11 19: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 삶의 조건을 바꿀 수는 없어도, 내 삶의 태도는 내가 정할 수 있다. 인생의 전환점은 언제 찾아오는가?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탓이라고 믿는 순간, 삶은 변화한다. 남이 망친 인생이라며 남 탓만 해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해결책이 내게 있다고 믿어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공감하고 갑니다!!!

  20. 한방 2019.10.12 1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 그런 사람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실패 후 누군가를 붙들고 빠져나갈 변명을 늘어놓는 저를 발견할 때가 있어요.

    책임은 내가 진다 생각하지만
    후배가 그 순간을 자신의 기회로 이용한다고 의심(?)이 들 때 확 무너지더라고요.

    헌데 지금 댓글을 다는 순간 마음 속에서
    당당하게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소리가 들리네요.

    비겁해지는 건 쉽고도 순간이라……
    내가 얼마나 간장종지같은 사람인지…

    그래도 털고 씩씩하게 용기냅니다.

  21. 인도공주 2019.11.04 2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승진시험 떨어져서 자존감 바닥인데 좋은 글에 힘을 얻습니다~ 그래 나에게 성장의 기회가 한번 더 주어진것이라고 다른 탓 하지말고 내 자신에게 해결책을 찾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