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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4.22 이토록 즐거운 독서라니 (15)
외대 통역대학원 다니던 시절, 서울대 영어교육학과를 나온 친구가 있었어요. 시골에서 학교를 다닌 친구가 자신은 중고등학교 시절 단 한 번도 전교 일등을 놓친 적이 없다고 하기에 깜짝 놀랐어요.
"전교 일등을 놓친 적이 없다고? 나는 전교 일등은커녕 반에서 일등을 해본 적도 단 한 번도 없는데."
이번에는 친구가 놀랐어요. 
"일등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다고?"

오늘 글을 쓰면서, 제가 그 친구처럼 물정 모르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닐까 조심스럽습니다. 도서관 저자 특강에 가면 다들 물어요. "책을 그렇게 많이 읽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독서가 즐거우니까요. 이토록 재밌으면서 유익한 취미도 없거든요. 책보다 재미난 것도 많은 세상이지만, 여전히 저는 책읽는 즐거움을 믿습니다. 저만 이상한 사람인줄 알았더니, 독서가 쾌락이라고 말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개인주의자 문유석의 유쾌한 책 읽기' <쾌락 독서> (문유석 / 문학동네) 

문유석 판사님은 책에서 다양한 책읽기의 즐거움을 말씀하십니다. 책을 많이 읽는줄은 알았지만, 순정만화도 즐겨 읽으신 줄은 몰랐어요. <유리 가면>으로 순정만화에 입문한 문 판사님은 이후 다양한 작품을 섭렵하는데요.

'황미나 작가의 <굿바이 미스터블랙>을 본 후로 생긴 좋은 버릇이 있다. 인생 살다 소소하게 즐거운 순간을 만날 때마다 "그는 아직 몰랐다.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이라는 대사를 떠올리곤 하는 버릇. 나는 에드워드 다니엘 노팅그라함처럼 후회하지 말고 미리미리 알기로 했거든. "인생은 언제나 예측 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라는 <아르미안의 네 딸들>(신일숙)의 명대사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어른이 되어 '레 마눌'을 모시고 살고 있는 지금까지도.'

(위의 책 102쪽)

순정만화의 대사까지 기억하시다니, 보통 덕후가 아니시군요. 저도 만화를 즐기며 책읽는 습관을 길렀어요. 허영만의 <국경의 갈가마귀>를 보며 나라 잃은 슬픔을 알았고요. <슬램덩크>를 보며 협업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니까요.

요즘 아이들이 독서와 멀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엄마 아빠의 욕심 탓이 아닐까 싶어요. '서울대 추천 인문 고전 100선'이나 SKY 캐슬에 나오는 토론용 책만 읽다보면 독서가 지겨워집니다. 독서의 순수한 쾌락을 일깨워주는 일이 중요합니다. 

'독서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세상에 쉬운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80년대 대학가의 조급함은 정답을 정해놓고는 신입생들을 그곳으로 빨리 이끌려 했다. 그것은 독서가 아니라 학습이다. 독서란 정처 없이 방황하며 스스로 길을 찾는 행위지 누군가에 의해 목적지로 끌려가는 행위가 아니다.'

(위의 책 132쪽)


부모의 조급함이 아이의 독서 습관을 망칠 수도 있어요. 아이에게 좋은 책을 강권하지 말아요. 그냥 아이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책읽는 습관을 기르도록 놔두세요. 어떤 책이 좋고, 어떤 책이 재미있는지, 스스로 찾아가는 게 평생의 공부입니다. 

저의 추천 도서 목록 또한 정답이 아닙니다. 그냥 개인적 책읽기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공간입니다. 저의 독서일기를 보고 부담감을 느끼실 필요는 전혀 없어요.  책읽기는 즐거워야 합니다. 시험 공부처럼 정답을 향해 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즐거운 방랑이어야 하니까요.

'SF는 인류의 미래가 아니라 현재'라는 글에서 문유석 저자는 알파고를 보며 공포를 느낄 게 아니라,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 나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미래에 우리는 무슨 일을 하지?'라는 질문만 하지 말고 '그런데 우리는 꼭 일을 해야 되나? 그런데 일이라는 게 뭐지?'라는 질문도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왜 기계에게 일을 빼앗기는 상상만 할 뿐 기계에게 일을 시키고 우리는 노는 상상을 하지 못할까.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 시대에 우리가 '일'이라고 부르는 많은 것들이 과거 시대 사람들 눈에는 그냥 쓸데없는 놀이나 미친 짓일 뿐일 거다. 혀와 배꼽에 피어싱해주는 직업, 프로 스케이트보더, 먹방 찍어 돈 버는 유튜버들, 주기적으로 돌고 도는 유행의 패션 산업... 인간이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은 쓸데없는 유희의 축적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내곤 했다. (...) 우리는 쾌락의 카탈로그를 늘리고 늘리며 세계를 풍성하게 만들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상상력도 재미도 없는 성공충들의 권력은 오래가지 않는다. 결국엔 즐기는 자들이 이길 것이다.'  

(위의 책 228쪽)

즐기는 자가 이길 것이다. 명쾌하신 말씀입니다. 독서도 마찬가지에요. 의무감으로 하는 사람보다는, 순수한 쾌락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책을 더 즐길 것이라 믿습니다. 
어려서 일등은 한번도 못해봤지만, 독서만큼은 진짜 열심히 해보고 싶어요. 이건 정말로 재미난 어른의 공부니까요.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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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꿈트리숲 2019.04.22 07: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주의자에게 독서는 찰떡궁합이죠.
    혼자서도 여럿이서도 할 수 있기는 하지만
    혼자할 수 있는 지적 놀이의 최고봉이지 않을까 싶어요.ㅎㅎ

    피디님의 독서일기를 보고서 책 참고를 하다가
    난 언제 저 책들을 다 읽나 현기증이 났던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도 책으로 극복을 했습니다.
    자신만의 스피드와 관심사 찾기가 되더라구요.
    그렇게 가다보니 교집합도 만나고 여집합도 만들게
    되네요.^^

    아이에 대한 욕심은 내려놓지만 쾌락독서에 대한
    욕심은 계속 부리고 싶습니다.~~

  2. 김수정 2019.04.22 07: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독서란 정처 없이 방황하며 스스로 길을 찾는 행위지 누군가에 의해 목적지로 끌려가는 행위가 아니다.'

    아이들에게 스스로 길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는
    학교 권장도서 목록을 강요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나저나 '굿바이 미스터블랙, 아르미안의 네 딸들.'
    이토록 친근한 제목들, 너무 반갑잖아요.^^
    당대 소녀들의 심금을 울렸던 황미나 작가님과
    '늘 푸른 이야기, 인어공주를 위하여'의 이미리 작가님.
    새록새록 너무 그립네요.ㅎㅎ
    중고등학교 시절 밤새도록 펑펑 울면서 읽었던 책들인데
    문유석 판사님 김민식 피디님 덕분에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나서 아침부터 감성 충만해졌습니다^^

    • aqua81 2019.04.22 09:10  댓글주소  수정/삭제

      ‘인어공주를 위하여’를 기억하시는 분이 계시다니 너무 반갑습니다^^

    • 김수정 2019.04.22 09:24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이고 반갑습니다! ^^
      '인어공주를 위하여' 읽으신 분 계실 줄 알았어요ㅎㅎㅎ

    • 은하수 2019.04.22 12: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늘 푸른 이야기, 인어공주를 위하여ㅎㅎ
      저도 아주 푹 빠져 읽었어요ㅋㅋ
      다시 읽어도 그 느낌일까요?

  3. 섭섭이짱 2019.04.22 08: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다독왕 피디님 따라가다 가랑이 수술 여러번 받았네요..
    그래서, 이제는 조심조심 사뿐히 걸으며 지냅니다 ^^

    대신 피디님이 독서일기에서 알게 모르게
    이 책은 꼭 읽어보세요 라고 말하는걸
    캐치하는 능력이 생겨서 그런 책은 꼭 읽어보려해요.

    피디님
    독서 열심히 하는건 좋은데...
    눈 건강도 신경쓰며 하세요... 아프면 앙돼용^^


  4. 아리아리짱 2019.04.22 09: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PD님 아리아리!
    갈수록 독서의 재미가 쫄깃합니다.
    쾌락독서의 묘미를 함께 나눌 수 있어서 <공즐세>학당을 만난것은 행운입니다.
    한 주 감사함으로 충만 되길 바라면서 아자아자!

  5. 오달자 2019.04.22 12: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즐기는 자가 이길 것이다."
    순수한 쾌락으로 접근해 가라는 말씀이 귀에 쏙 들어 옵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를 위해~~
    혼자 놀이를 하려 나가보렵니다~^^

  6. 오케이고고씽 2019.04.22 18: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도 독서를 얼마큼이나 즐기며 살고 있나?
    삶을 즐긴다는 것은 어떤 것 일까?
    즐기지 못 하고 있다면 그 이유와 즐길 수 있는 방법은?
    고민하고 생각 할 수 있어서 즐겁네요^^

  7. 은하수 2019.04.22 2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같은 책을 수십 번 봐도, 만화책을 주구장창 읽어도 독서하는 아이 모습은 예뻐 죽겠습니다.
    독서가 제발 즐거운 것이 되길 바랍니다.
    저도 즐거운 독서에 초첨을 맞춰야겠어요!

  8. 보리랑 2019.04.22 22: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초등때 만화잡지 마르고 닳도록 봤는데, 중1 한달간 밤새워 순정만화 보고는 딱 끊었는데 왜 그랬는지 몰랐어요. 김영하 작가님이 불안한 사람은 '소설'이라는 여행을 떠날 수가 없다네요 ㅠ

    딸들이 수년간 책을 안봤는데 어릴때 많이 읽은 덕인지 지금은 책덕후입니다 ; 저는 지금이 제일 행복합니다.

  9. 최수정 2019.04.23 06: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만에 맘먹고 책을 보려고서 하면 너무나 많은 추천도서들 속에 어떤책을 골라야할지 망설여지는데 이럴때 피디님의 추천도서리뷰가 도움이 많이 되고 있어요. 앞으로도 좋은책 추천 많이 부탁드릴께요.^^

  10. 봄처녀 2019.04.24 17: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서울대 고전 인문고전 100선... 근 10년 된듯한듯 한데 아직도 새책 냄새가 ㅋㅋ 반성하고 갑니다~~ 그리고 급 만화책이 너무 읽고 싶어지네요^^

  11. 샘이깊은물 2019.04.26 1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독서란 정처 없이 방황하며 스스로 길을 찾는 행위지 누군가에 의해 목적지로 끌려가는 행위가 아니다’
    정말요.. 나 아닌 다른 누가 대신해 줄 수 없어요. 나만의 오솔길을 만들어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