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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

화장실에서 만난 어떤 인연

by 김민식pd 2016. 1. 1.

1991년도 대학 3학년 1학기 때 일이다. 학교 화장실에 서서 일을 보다 눈 앞에 붙어있는 '야학 교사 모집' 안내문을 봤다. 오뚜기 일요학교라는 야학이었다. 순간 몸이 부르르 떨리더라. 새로운 인연의 전율? ^^ 밤에 열리는 야학이 아니라 일요일에만 여는 학교였다. 당시 나는 영어 과외로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돈 한푼 안들이고 배운 영어로 많은 돈을 벌었으니,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무료로 영어를 가르치는 일도 보람 있겠다는 생각에 지원했다.

가 보니, 영어교사는 이미 만원이더라. 대학생 봉사자 중에 사범대생들이 많은데 그중 영어 교육학과 학생이 많았던 거다.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한 공돌이 주제에 감히 영어를 가르치겠다고 나서기 민망했다. (그땐 요즘처럼 뻔뻔하지 않았다.^^) 공대생은 드물다고 반기며 과학 수업을 부탁하더라. 그래서 야학에서 생물 교사가 되었다.

학생들은 청계천이나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미싱사나 미싱 보조 (시다라고 불리는)로 일하는 노동자들이었다. 인쇄 공장에서 일하는 남학생도 몇 있었고. 90년대 초반 형편이 어려운 집의 경우, 맏딸은 초등학교만 나온 후 바로 공장에 취업해서 동생들의 공부 뒷바라지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도 꿈은 언젠가 돈을 벌어 대학에 가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하루 공장 쉬는 날, 일요일에 야학에 나와 공부하고 밤에 야근이 끝나면 숙소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당시 야학에서는 생물 교사가 성교육까지 담당했다. 공장에서 일하는 10대 후반의 여학생들에게 건전한 성관계와 피임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쳐야 했는데, 연애 경험도 없는 경상도 촌놈이 성교육을 한다고 성기 그림을 놓고 남녀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자니 어찌나 난감하던지...

야학에서 일하면서 강의의 기술은 늘었다. 난 요즘도 강의 잘 한다는 얘기를 꽤 듣는다. (하도 블로그에서 자랑질만 해대니, 이런 멘트, 새삼스럽지도 않겠지만...^^) 당시 학생들의 노동 여건은 정말 열악했다. 청계천 옷공장의 좁은 다락방에 갇혀 밤새도록 미싱을 타는 어린 친구들. 대학생 자원봉사자 교사 앞에서 조는 것이 미안해서 나름 눈을 부릅뜨고 버텼지만 체력이 달리는 걸 어쩌랴. 졸린 학생을 깨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 웃기는 것이었다. 수업을 하면서 5분에 한번씩은 웃겼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야학을 나온 학생도 몸이 힘들면 중도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에게 공부하는 재미를 주고 싶었다. 아무리 좋은 수업이라도 재미가 없으면 학생들의 호응을 끌어낼 수 없다. 재미가 있어야 의미도 있다. 이때의 깨달음은 나중에 예능 피디로 일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야학 시절을 생각하면, 소로보 빵이 기억난다. 종로서적 옆에 고려당이라는 큰 빵집이 있었는데, 학생들 먹으라고 매주 소보로 빵을 몇 상자씩 주셨다. 일요일 오전에 고려당에 가서 빵 상자를 받아 오는게 신입 남자 교사들의 일이었다. 지금도 가끔 빵집에서 곰보 빵을 보면 그때가 생각난다. '감사합니다, 고려당 사장님!' 

야학은 어디나 장소 구하기 힘들어 고생이다. 오뚜기의 경우, 종로 외국어 학원장님이 배려해주셔서 일요일 하루 학원이 쉬는 날 학원 건물을 야학으로 쓸 수 있었다. 종로 외국어 학원에서는 심지어 고생하는 대학생 교사들에게 학원 수업 할인 혜택까지 주셨다. '감사합니다, 종로외국어학원 원장님!'

3학년 1학기부터 4학년 1학기까지 졸업을 앞두고 1년 넘게 야학 교사로 일했다. 총무라는 직책을 맡기도 했다. 학생들과 MT 가서는 여장하고 노래하고 춤춘 기억도 난다. 당시 교장이었던 백승화 선생님과 둘이서 '시커먼스' 공연도 했는데, 학생들이 자지러지더라. 오뚜기에는 학생으로 시작했다가 교사가 된 사람도 있다. 박상규 선생님의 경우, 집안 형편이 어려워 노동자로 일하며 오뚜기에서 검정고시로 고졸까지 마쳤다. 학력고사를 잘 봐서 대학 입학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때 대학생 교사들이 알바한 돈을 모아 등록금을 내주었다. 학생 출신 교사인 그는 오뚜기의 든든한 버팀목인데, 그가 한양대 학생이었다. 그가 공대 화장실에 붙인 안내문을 보고 내가 오뚜기로 가게 된 것이고. 화장실에서 안내문을 보고 왔다니까 그러더라. "남자들이 서서 일 볼 때, 딱 그 눈높이에 맞춰서 붙였거든. 읽기 쉽게. 잘 했지?" 그 분 덕에 오뚜기를 만나고 대학 시절 즐거운 추억을 얻었다. '감사합니다, 박상규 선생님!'

 

그 시절에 MT를 가면 이렇게 여장하고 기타 치며 노래를 불렀다. ^^

 

일요일에 학원은 쉬었지만, 그 쉬는 날에도 나와서 무료 공개 특강을 하는 억척 학원 강사가 한분 계셨다.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게 너무 재미있다며, 이 재미난 걸 어떻게 쉬냐며 일요일에 나와서 영화나 뉴스 청취를 가르쳤다. 그 분의 인기가 대단하여 아예 학원 맨 윗층 강의실 하나를 그 분 전용 강의실로 만들었다. 나는 일요일에 돈 한 푼 안 받고 특강을 하는 그 분을 보며, '와, 정말 대단한 사람이 다 있구나.'했다. 나중에 자신의 이름으로 학원을 내더라. 그가 바로 이익훈 선생님이다.

대학 졸업하고, 한국 3M이라는 미국계 기업에 취업했다. 영업사원으로 일했는데, 일이 쉽지는 않았다. 치과마다 제품을 들고 다니며 의사들에게 외판을 했다. 치과 영업은 독특하다. 모두가 울상을 지으며 들어가는 곳에 혼자 활짝 웃는 얼굴로 들어간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쓰리엠에서 나왔습니다." 때론 의사분이 고함을 지르며 내쫓기도 한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나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의사들을 상대로 영업을 뛰면, 마음에 상처를 많이 입는다.

상처받은 자존심을 어떻게 치유해야할까? 평소 본인이 가장 잘 하는 것을 하면 된다. 나의 경우에는 영어. ^^ 나는 한번도 다닌 적이 없는 영어 학원을 다니기로 했다. 회화 수업에 들어가 마구 잘난 척 하면서 자신감을 회복하는거야. 마침 회사에서 영어 학원 수강에 대해 교육비 지원도 해주더라. 그때 종로 외국어 학원이 생각났다. 야학 교사 할인 혜택이 있는 종로 외국어 학원! 학원에 가서 커리큘럼을 보며 상담 직원에게 물었다. "영어 수업 중에 가장 고급반이 뭐죠?" "우리 학원에서 영어 고급반은 통역대학원 입시반입니다." 당시 종로 외국어 학원 통역대학원 입시반 선생님이 어제 소개한 내 인생의 스승이신 한민근 선생님이다.

 

어제 한민근 선생님 글을 쓰다 선생님과의 인연이 대학 화장실에서 시작된 걸 깨달았다. 대학 신입생 때, 짝사랑하던 여자애에게 잘 보이려고 영어를 시작했고, 라이벌 덕분에 영어를 잘 하게 되었고, 영어를 남에게 가르쳐주려다 야학을 하게 되었고, 영어 덕에 미국 회사에 취업을 했고, 영어로 자존감을 회복하려고 학원을 다니다 인생의 스승을 만나게 되었다.

 

2016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 무엇이든 열심히 해볼 생각이다. 매일 매일 책을 읽고, 여행을 다니고, 글을 쓰면서 버텨볼 생각이다. 돌이켜보면, 삶에서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다. 하루하루가 다 선물이다.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삶은 연결된다. 소중한 인연으로, 소중한 경험으로.

 

그 순간에는 힘들었던 일도 지나고보니 새롭고 재미난 기회를 여는 계기가 되더라.

 

얼마전 야학 동료 교사에서 전해들은 이야기. 오뚜기 학생 교사 모임이 열렸다. 20년이 지나 그 시절의 학생들을 만나니, 열다섯살 어린 미싱사들이 이젠 아이 엄마가 되어있더란다. 그리고 학생들이 교사들보다 더 잘 살고 있더라고. 여기서 잘 산다는 게 물질적인 부유함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들은 정말로 정신적으로도 훌륭하게 살고 있더란다. 좋은 사람이 되어서. 

1990년대 어려운 시절에, 공장 일을 하며 그 힘든 와중에도 야학에서 공부를 해서 검정고시에 합격한 그들이, 그들을 가르친 대학생 교사보다 수십년이 흐르고 나니 더 현명하고 더 잘 살더라는 얘기. 문득 야학 교사가 되겠다고 찾아간 날, 선배 교사가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여기에 뭔가 가르치러 왔다고 생각하죠? 나중에 느낄 겁니다. 여기 학생분들에게 우리가 배우는 게 더 많다는 걸."

 

올 한 해도,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실천하는 한 해가 되어야겠다.

여러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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