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찰텐에서 엘 칼라파테로 이동하는 버스를 탔는데, 옆에 중국인이 앉았다. 의자 밑으로 물건을 떨어뜨려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고 "뚜이부치." 했더니 중국어를 하냐고 반가워하더라. 기초 회화에서 외운 표현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즐거운 수다로 이어졌다.

그는 대만에서 온 공무원인데 한국 사람이라니까 진심으로 부러워하더라. 한국 공무원들, 특히 외교부 직원들이 정말 성실하다면서. 한국은 세계 각국과 비자 면제 협정을 맺어 대한민국 여권만 있으면 거의 다 갈 수 있다. 비자 면제된 나라 수로는 세계 3위라고 들었다. 동남아에서는 그래서 대한민국 여권이 선망의 대상이자 절도의 타겟이다. ^^ 대만에서 온 그는 아르헨티나 대사관에 가서 비자 인터뷰까지 받았단다. 여행 목적과 여행 일정을 일일이 적어 내고, 여행 경비까지 확인했단다. 비싼 비자 수수료를 내고 관광가서 내 돈을 쓰겠다는데도 이렇게 까다롭다니. 외교력이 약한 나라의 설움이다.

한 달간 아르헨티나 여행 다니고 내린 결론은 여행지로는 비추천이다. 그 대만 공무원도 그러더라. 물가는 너무 비싸고, 영어는 안 통하고, 동양인에 대한 은근한 차별까지 있는 나라. 이 먼 곳까지 왜 왔냐고 물어보더라. '네가 그렇게 부러워하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가장 먼 곳이니까. 낮밤도 반대고, 계절도 반대고. 한국에서 가장 먼 곳을 찾아왔으니까. ^^' 속사정은 이야기하지 않고, 그냥 파타고니아 트레킹 때문에 왔다고 했다. "넌 왜 여기까지 왔니?" 그 친구의 답이 걸작이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남극에 가는 것이 꿈이었단다. 남극은 가고 싶은데 워낙 멀고 시간도 오래 걸려 공무원 신분으로 짬을 내기 힘들었단다. 그러다 올 가을에 결혼을 했다. 결혼 준비하면서 신혼 여행은 남극으로 가자고 신부를 꼬셨단다. 그런데 남극 여행 경비가 너무 비싼거지. 인터넷에서 열심히 검색을 했더니, 아르헨티나 최남단 우슈아이아에서 남극으로 가는 배가 있는데 3인실이 가장 싼 거다. 그래서 아내의 여자 친구까지 합류시켜 여자 둘이랑 셋이서 여행을 떠났다고.

친구들이 다들 미친 신랑이라고 놀린단다. 무슨 신혼여행을 셋이서 가냐고. 그것도 그 추운 남극으로. (참고로 대만은 정말 따뜻한 나라다. 겨울에도 눈이 오지 않는 나라.) 허니문 (밀월여행 Honey Moon) 이 아니라 Bitter Moon, Cold Moon이라고 놀렸단다.

3인실 배를 타고 셋이서 남극으로 신혼여행 가는 미친 신랑이랑, 결혼 15년차에 혼자 한달간 배낭여행 다니는 겁 없는 애 아빠랑, 둘이서 여행 예찬론을 펼쳤다. 여행은 정말 좋지 않냐고. 그 친구가 그러더라. 대만은 작은 섬나라라서, 이렇게 한번 나와보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실감난다고. 나도 그랬다. 한국도 섬나라야. 육로로는 대륙으로 절대 갈 수 없으니까. 둘 다 끝에서 끝까지 버스로 5시간 걸리는 나라에서 살다가, 이렇게 버스 한번 타면 20시간을 달리는 나라에 와보니 세상이 어찌나 넓은지.

그 친구가 한탄을 하더라. "세상은 넓고, 인생은 짧다."
그래서 얘기했다. "그 짧은 인생을 제대로 즐기려면 더더욱 여행을 다녀야지."
"왜?"

"Travel in distance is like travel in time." (중국어는 금방 밑천이 바닥나서 영어로 얘기를 나눴다.^^)

여행을 하는 것은 다른 시간 속으로 가는 일이다. 라오스에 가면 1970년대 한국 시골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프라하에 가면 중세 시대 유럽을 볼 수 있고, 몽골에 가면 1000년전 유목민의 생활을 다시 만날 수 있다. 이처럼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은 낯선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이다. 인생은 짧다. 그 짧은 인생에 더 많은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려면 여행을 떠나야 한다.

나와 다른 것을 만나는 것만큼 나의 경험과 생각을 깊게 해주는 계기가 또 없다. 외국 사람을 만나면 내 나라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더욱 깊어진다. 영어를 공부하는 것은 절대 미국에 대한 선망이나 외국 생활에 대한 기대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에 대해 알아야, 내가 가진 것을 더욱 잘 이해하고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다. 아무런 비교 기준 없이 내가 가진 것이 최고라고 우기는 것은 그냥 국수주의고 우물 안 개구리다.

한번 사는 인생, 더욱 길게, 더욱 깊이있게 즐기려면 여행을 떠나시길.

부에노스 아이레스, 산 텔모 벼룩시장에서~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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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정문 2015.12.08 09: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매달 해외 가시는 어떤 분은 우물안 개구리인지?가서 스탬프 찍는것만 하고 오시나ㅜㅜ?

  2. 2015.12.08 10: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 오늘도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ㅎㅎ 여행은 진짜 좋죠ㅠㅠ

  3. 주인아 2015.12.10 19: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너무 재밌습니다. 네이버 블로그도 있으시면 소통도 더 쉽게 하고 좋을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ㅎㅎ

  4. 2015.12.17 14: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5. 가우디 2017.03.04 1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도 아르헨티나 가고 싶어요. 스페인어는 어느 정도 되지만 그 나라 발음은 알아듣기 힘들고 그 나라 사람들도 자기네 발음 독특한 거 잘 알고 있더라구요. 남미라 물가 싼 줄 알았는데.. 아닌가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