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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영어 스쿨

쪽팔려도 죽지않아

by 김민식pd 2015. 11. 24.
아드레날린 정키로서 나는 스키나 스노우보드, 마운틴 바이크 등 스피드가 나는 것은 다 좋아한다. 몇해전에는 큰 딸 민지에게 스키를 가르쳤다. 나름 '운동퀸'이라는 소리를 듣는 아이라 처음 스키장에 데려간 날도 넘어지지 않고 잘 타더라. 다음날에는 중상급 코스로 따라와 나랑 같이 탔다. 내려가면서 보니 아이가 침착하게 잘 타긴 하는데, 가파른 경사에서는 엉덩이가 뒤로 빠지면서 자세가 엉거주춤하더라. 아마 겁이 나서 그런 모양이다. 다시 초보 코스로 데려갔다. 넘어지는 법을 가르쳐주려고.

"민지야, 스키를 잘 타는 것은 넘어지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야.
오히려 잘 넘어지는 법을 배우는 게 스키야."

스키를 잘 타려면, 턴을 잘 해야 한다. 턴을 하려면, 업다운이 정확해야하는데 이때 업 동작은 일어나며 산 아래로 몸을 던지는 것이다. 상급 코스로 가면 경사가 심해 몸을 아래로 던지기가 무서워 엉거주춤 몸을 사리게 된다. 그러면 스키나 보드 플레이트에 체중이 실리지 않아 엣지가 먹지 않는다. 엉덩이를 뒤로 뺄수록 오히려 더 위험하다. 위험할수록 오히려 몸을 던져야 안전하다.

초보 코스에서 안 넘어지고 A자로 쭉 내려가는 사람이 있다. 턴을 하지 않기에 넘어지지는 않는다. 넘어지지 않으니 잘 탄다고 생각하겠지만, 위험천만한 생각이다. 상급자 코스에 가서도 안 넘어지고 계속 내려가면, 속도를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그러면 큰 사고로 이어진다. 컨트롤이 안 될 때는 바로 넘어져야 안전하다. 그런데 초보 코스에서 넘어지지 않았으니 중급에서도 안 넘어지고 아슬아슬 끝까지 갈 것이라 생각한다. 초보 코스에서 턴을 하며 자꾸 넘어져봐야 한다. 스키 타다 넘어져도 눈이 푹신해서 다치지는 않는다. 그걸 몸에게 알려줘야 한다. '넘어져도 죽지는 않는구나.' 초급 코스에서 넘어지면 쪽팔린다. 다들 '쪽팔려서 죽겠다, 죽겠다.' 하지만, 진짜로 쪽팔려서 죽은 사람은 못 봤다. 넘어지면 어때, 초보 시절엔 누구나 다 그러는데. 쪽팔리기 싫어서 턴 안하고 직진으로 내려가는 건 용감한게 아니라 무모한 거다. 배울 생각도 없고, 잘하고 싶은 욕심도 없는 거다. 쪽팔림을 무릅쓸 줄 아는 것이 진짜 용기다.

넘어져도 괜찮다는 걸 몸에게 가르쳐주면 겁을 덜 먹는다. 자세가 바로 서고, 턴을 할 때도 계곡 쪽으로 몸을 던지기가 쉬워진다. 엣지도 잘 먹고 턴도 잘 된다. 초보 스키어의 경우, 뒤에서 굉음을 내고 내려오는 보더의 소리에도 흠칫 겁을 먹고 갑자기 방향을 꺾다가 넘어지거나 부딪히기도 하는데,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나도 겁을 먹지 말아야한다. 잘 타는 지가 피해가겠지. 초짜인 내가 피하나? 침착하게 자신의 턴을 하면 된다. 상급자의 경우 아래 쪽에 있는 스키어의 턴 궤적을 보고 진로를 예상해서 비켜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겁 먹은 스키어가 방향을 꺾는 바람에 충돌하기도 한다. 뒤에서 고수가 눈보라를 일으키며 미친듯이 달려와도 차분하게 자신만의 턴을 그려야한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네이티브 만나도 기죽지 말고 의연하게 된장 발음 콩글리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영어를 문법부터 배운다. 학교나 학원가서 제일 먼저 보는 것이 영어 시험이다. 시험은 틀린 문장을 골라내는 것이다. 이건 동사연결이 틀렸고, 저건 전치사가 틀렸고, 이건 스펠링이 틀렸고, 저건 발음이 틀렸고. 그렇게 영어를 배운 탓에 말을 하려고 하면 항상 머리 속에서 틀렸어! 틀렸어! 하고 빨간 불이 켜진다. 이렇게 기가 죽어서는 영어가 늘 수가 없다.

아이가 모국어를 배우는 과정을 보면, 언어도 실수를 통해 배운다. 옹알옹알 무슨 뜻인지 모를 말을 저는 열심히 떠들어댄다. 그렇게 두려움이 없어야 말문이 열린다. 서툰 발음에 어색한 단어 몇개로도 말은 통한다. 문법적으로 맞는 문장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뜻을 전하는 일이다. 문장을 완벽하게 알아들을 필요도 없다. 단어 몇개 알아듣고 대충의 뜻만 파악해도 된다.

10년을 스키만 타다, 나이 마흔에 보드를 시작했다. 처음엔 보드 배우기 싫더라. 스키를 타면 최상급에서 쌩쌩 내려오는데 보드를 배우려니 줄도 긴 초급자 코스에서 리프트 기다리는 것도 지겹고, 무엇보다 무릎꿇고 앉아서 비굴한 자세로 배우려니 정말 쪽팔리더라. 그래도 쪽팔림을 무릅쓰고 배웠다. 나이 40이면 아직 한창인데, 남은 40년간 스키만 타고 살려면 얼마나 지겹겠어. 창피한 걸 무릅쓰고 배운 덕에 지금은 스키와 보드를 오가며 재미나게 타고 있다.

수십년간 우리말만 하고 살았다고 영영 외국어 배우기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한국어가 편하다고 평생 여행도 안 다니고 한국에서만 살 것도 아니지 않은가. 어려서 영어를 배울 때 스트레스가 컸던 건 시험 탓이다. 인생 즐기자고 배우는 영어, 틀려도 스트레스 받지말고 일단 한번 들이대보시길.

인생은 넘어지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영어 공부도 마찬가지다. 틀린 문장을 말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틀린 문장으로도 자꾸 들이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쪽팔린다고 죽지는 않는다.
진짜 쪽팔리는 건, 쪽팔릴까봐 시도도 하지 않는 것이다.


비발디파크 시즌권 끊고 미친듯이 보드만 타던 시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비발디 최상급 록 슬로프 정상에서.
저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쫄린다. 그러면 "죽어도 좋아, 씨발!" 하고 몸을 던진다.
그러다 통렬하게 자빠진다. 정상 가는 곤돌라에서 사람들이 다 놀라서 쳐다본다. "아이고, 어떡해!"
아 쪽팔린다. 다시 일어나 아래로 몸을 던진다. "쪽팔려도 죽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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