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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

인생은 20대에 만들어지는구나

by 김민식pd 2015. 8. 26.

드라마 '여왕의 꽃'이 이번 주말 마지막 방송을 끝으로 종영합니다. 드라마가 끝나면 보통 연출들은 몸이 아픕니다. 매일 몸과 마음을 혹사하지만 방송 기간 중에는 아프고 싶어도 아플 수가 없지요. 그래서 드라마가 끝나면 맥이 빠지면서 몸살에 걸리기 일쑤지요. 아니 딱히 아프지 않더라도 한동안 멍한 상태에서 지냅니다. 긴장속에 몇달을 보낸 터라 이제 뭘하지? 하는 막막함이 찾아오는 거지요.

 

드라마 촬영 중 힘들 때마다 내가 하는 것은, 드라마 끝난 후에는 뭘할까? 궁리하는 겁니다. 그래서 읽고 싶은 책을 찾아서 미리 주문해놓고 여행 계획도 짜고 그럽니다. 드라마 끝나고 가장 먼저 할 일은 아마 집구석에 틀어박혀 쌓인 책을 읽는 일일 겁니다. 한동안 사람과의 접촉은 피하고 방에 틀어박혀 지낼 겁니다. 수십명의 배우와 스탭들과 함께 일하고나면, 이제 다른 사람과의 인터랙션도 좀 질립니다. ^^ 나만의 힐링 타임이 필요한거지요. 오로지 나의 욕구에만 집중하고 싶어요.

 

드라마 하는 동안에는 내 뜻대로 되는 게 별로 없어요. 감독은 다 제뜻대로 하고 살 것 같지요? 천만에요. 비가 와도 나가서 일하고, 졸려도 새벽까지 찍어야 하고, 아파도 나가서 일해야 합니다. 방송 시간120분 분량의 드라마, 매주 영화 한 편을 찍는거죠. 그것도 6개월 연속으로... 마감은 매주 꼬박 꼬박 닥쳐오니 하루 하루 긴장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드라마 끝나고 하고 싶은 것!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건 자전거 여행이었어요. 자전거 여행은요, 정말 지 맘대로 하는 거거든요. 비행기 표를 예약하거나 기차 시간에 맞출 필요가 없어요. 그냥 가고 싶을 때 가고, 서고 싶을 때 서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잡니다. 이만한 도락이 또 없어요. 집에서 나가서 양재천을 달리다 한강으로 나가고, 다시 서울을 벗어나 남한강 북한강 자전거길을 달려 춘천까지 가보는 것. 가다가 좋은 경치를 만나면 사진을 찍고, 배가 고프면 맛집을 찾아가고, 다리가 아프면 강가에 앉아서 책을 읽고, 그러다 해가 떨어지면 숙소에 들어가 잠들 때까지 낯선 침대에서 뒹굴거리기. 아, 생각만해도 막 가슴이 터질듯이 설레더군요. ^^

 

자전거 여행, 생각만해도 이렇게 마구 행복해지는 이유가 뭘까? 네, 대학교 1학년 때 자전거 전국일주하던 추억 덕분이지요. 하루 200킬로를 달리고, 한계령을 자전거로 넘던 그 시절이 즐거웠던 겁니다. 나이 50이 다되어서도,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곳은 결국 스무살에 나를 가장 가슴뛰게 했던 일인겁니다.

 

그 순간, 깨달았어요. 아, 내 인생의 방향은 이미 20대에 결정되었구나. 지금 나는 그때 정해진 항로대로 계속 나아가는 것 뿐이구나. 20대에 즐거웠던 일을, 남은 평생 계속 하면서 사는 거구나. 블로그에서 20대들에게 독서, 여행, 연애를 즐기라고 권하는데요. 생각해보니 내 자신이 그랬어요. 20대에는 미친듯이 책을 읽고 여행을 다니고 짝사랑을 했거든요. 일년에 200권씩 책을 읽다가 시립 도서관에서 다독상도 받고,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다 세계를 여행하는 배낭족이 되었고, 연애를 많이 한 덕에 로맨틱 코미디 피디로 먹고 살게 되었으니, 결국 지금의 내 삶은 20대의 김민식에게 빚지고 있는 겁니다.

 

나이 마흔 여덟, 아직도 새로운 재미를 찾아다닙니다. 매일 플룻을 연습하고요, DSLR 촬영을 배우려고 캐논 아카데미에 다니고, 가을 남미 배낭여행을 앞두고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고 믿습니다. 80대 노인이 된 어느날 문득 돌아보고 그럴 테니까요. 아, 지금 내가 즐거운건 50대의 김민식이 즐거웠기 때문이구나, 하고.

 

 

작년 여름, 아이들과 함께 떠난 몽골 여행에서.

낙타를 타고 하는 여행도 좋지만, 그래도 난 자전거 여행이 좋아요.

말 안 통하는 짐승보다는 내 다리가 훨씬 믿음직스럽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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