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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여행예찬/짠돌이 세계여행

추석엔 아버지랑 해외 여행을~

by 김민식pd 2015. 6. 11.

작년 가을의 일이다.

추석을 얼마 앞두고 아버지랑 점심을 먹다 여쭤봤다.

 

"아버지, 올 추석에는 어디 가시고 싶으세요? 아버지가 영동 할아버지 산소를 가자고 하시면 영동으로 모시고, 속초의 고모 산소를 가고 싶다 하시면 속초로 모실게요."

 

아버지의 답.

"난 괌이나 사이판에 가고 싶은데?"

 

그래서 인터파크 투어 홈피에 가서 땡처리 여행상품을 뒤졌다. 싸게 나온 패키지 상품이 있기에 얼른 구매했다. 마님을 모시고 다닐 땐 생각도 못할 일이다. 괜히 싼 패키지 샀다가 현지 가서 숙소가 후지면 여행 기간 내내 욕먹을 각오 해야 한다. 돈 쓰고 욕 먹기 딱 좋다. 그런데 아버지랑 여행을 갈 때는 그런 걱정이 없다. 내 짠돌이 기질이 어디에서 왔겠는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거다. 숙소 타박하실 분이 전혀 아니다. 그렇게 예매를 해서, 작년 추석에는 아버지를 모시고 필리핀 보라카이로 여행을 떠났다. 

 

추석에 아들과 아버지 단 둘이 하는 여행, 무척 만족스러웠다. 사실 이건 모두를 위한 윈윈 상품이다. 추석에 내가 아버지를 모시고 여행을 떠나니 아내가 시댁에 가서 추석 봉사를 할 이유가 없다. 아내는 딸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서 추석 기간 내내 쉬다 올 수 있어 좋다. 내가 따라간다면 내내 언제 집에 갈 거냐고 아내랑 신경전을 펼치겠지만 그런 걱정도 없지 않은가.

 

물론 여행 중에 아버지 때문에 난처한 경우는 있었다. 보라카이는 젊은이들을 위한 휴양지인터라 한국에서 커플끼리 여행 온 이들이 많았는데, 볼 때마다 물어보셨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했수? 아이는 언제 가질 거고?"

 

아버지 손을 잡아 끌고 방으로 왔다.

"아버지, 저 사람들 부부 아니에요. 그냥 연인들인데 자꾸 그런 거 물어보지 마세요."

아버지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신혼 부부들이 아니야?"

혼전 커플도 꽤 있었는데, 아버지 나이의 어른으로서는 이해하시기 힘든 눈치였다. 뭐, 그런 난처한 순간들을 빼고는, 여행은 아주 즐거웠다.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가면 딸들 돌보느라 나이트 라이프를 즐기기 힘든데, 아버지는 초저녁에 잠자리에 드시니, 주무신 걸 확인하고 슬쩍 빠져나와서 놀러 다니기 참 좋았다. 밤에 해변의 카페에서 라이브 연주를 하는 밴드 앞에 서서 춤 추는 게 무척 즐거웠다. ^^

 

 

 

오는 날 여쭤보니 아버지도 여행이 만족스러웠다고 하셨다. 하긴 아들이 옆에 붙어서 통역해드리지, 가이드해드리지, 짐도 들어드리지, 오죽 편하실까. ^^ 같이 온 커플들이 다 신기해하며 보더라. 해외 나와서 모녀가 같이 여행 다니는 건 봤어도 부자가 함께 온 건 처음 본다고.

내 나이 이제 마흔 여덟, 사춘기 시절, 내가 가장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 딱 내 모습이다. 어려서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운 적이 많았는데, 내가 이제 당신 나이가 되고, 중학생 아이를 둔 아버지가 되고 보니,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다.

 

블로그 여행일지에 항상 딸들이랑 여행다니는 글만 올리다 문득 생각해보니, 정작 내게 사랑을 더 많이 준 건 아이들이 아니라 아버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보다 내게 더 많은 걸 주신 분인데, 그런 분을 미워하고 산 세월이 너무 길었다. 그래서 모시고 다니는 거다. 절대 효자 아니다. 그냥 속죄하는 것 뿐이다. 서로에게 아주 즐거운 방식으로~^^

 

얼마전 어버이날 점심을 같이 하면서 아버지께 여쭤봤다.

"아버지, 올 추석에는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난 뉴욕에서 한달만 살아보면 원이 없겠는디?"

 

다음날 바로 뉴욕으로 가는 항공권을 예약했다. 호텔보다는 현지인 가정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말씀에 에어비앤비를 뒤져 장기투숙할 집도 찾았다. 올 추석은 아버지랑 뉴욕을 활보하면서 보낼 것이다.

 

여러분께도 권해드린다. 아버지와 함께 하는 추석맞이 여행, 의외로 즐거울 것이다. ^^

(아, 나중에 장성한 딸들이 꼭 이 글을 봐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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