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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쫓아온 남자

by 김민식pd 2014. 10. 18.

집에서 모시고 사는 마님이 몇 달 전에 겪은 일이다. 아침 출근길에 누군가 뒤에서 자꾸 쫓아오더란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쭈뼛거리며 다가온 남자가 하는 말.

저기요, 느낌이 참 좋아서 저 뒤에서부터 따라왔는데요. 혹시 연락처 좀 얻을 수 있을까요?”

나이 마흔을 넘긴 아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집 큰 애가 지금 중학교 1학년인데요?”

남자는 황망한 표정으로 죄송하다며 사라졌다.

 

나는 그날 저녁 아내의 얘기를 듣고, ‘누군지 몰라도 눈이 삐었나?’ 했다. 하지만, 아마 그 친구는 가면서 누군지 몰라도 복이 터졌군.’ 했을 거다.

 

사람들은 날더러 처복이 있어 좋겠다 하지만, 그건 복이 아니다. 노력의 결과다. 아니 세상의 정의가 구현된 결과일 뿐이다.

 

다섯 살 때 나는 전기도 안 들어오는 시골집에서 살다 호롱불에 넘어져 턱에 큰 화상을 입었다. 어려서 검은 흉터를 가리려고 얼굴을 새까맣게 태운 탓에 얼굴이 까매졌다. 물론 흉터보다 나중엔 까만 외모로 더 놀림 받았지만... ㅠㅠ 사춘기에 외모 콤플렉스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러다 결심했다. ‘못난 외모로 아이들에게 놀림 받은 걸 생각하면, 나는 무조건 예쁜 마누라를 얻어야 돼. 그게 세상의 정의야.’

 

예쁜 여자를 찾아 방송사 PD로 입사했다. 입사 후 아내에게 사귀자고 했더니, 단박에 거절하더라.

제가 왜요?”

예능국 조연출로 일하면서 나 고생 많이 하는 건 알지?”

“?”

밤새워 편집하면서 예쁜 여자들 구경만 실컷 하잖아. 그런데 별로 안 예쁜 마누라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해봐. 집에 갈 마음이 들겠어? 일할 의욕이 생기겠냐고. 예능 PD는 무조건 마누라가 예뻐야 해. 그러니, 방송 문화 창달에 이바지한다는 생각으로 네가 조금만 희생해주면 안 되겠니?”

 

MBC에서 정년퇴직하는 날, 나는 개인적으로 트로피 하나 만들어 아내에게 안길 참이다. ‘방송문화대상, 내조의 여왕 상.’ ㅋㅋㅋㅋㅋ

 

얼마 전, 영화 제보자를 봤다. 같이 보던 어머니가 많이 우시더라.

피디들이 고생이 참 많네. 일하다 구속당할 수도 있고.”

나도 울었다. 영화 속 윤민철 피디는 가엽지 않은데, 현실의 윤민철 피디, 우리 곁의 시사교양 피디들을 생각하니 자꾸 눈물이 났다. 10년 전 일어난 일을 다루는데, SF 영화를 보듯 아득한 먼 미래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우린 어떻게 버텨야 할까?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북 콘서트에서 서경식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질 나쁜 이기주의자들에게 중국의 문호 루쉰이 한 말인데, 조금이라도 그들을 기분 나쁘게 만들어주기 위해 살고 있다고 어느 작품집 후기에 썼다. 몹시 공감한다. 5.18 희생자들이 지금도 시달리고 한편에는 전두환 같은 사람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그것이 정의롭지 않아서 나는 싫다, 나는 그것을 거절한다는 걸 내가 살고 있는 한 얘기를 할 뿐이다. 그것이 희망이 있는지 없는지는 다른 문제다. 희망이 있거나 없거나 자신의 길을 간다는 것이 내게 준 루쉰의 가르침이다. 내가 일본에서 소수자로 살면서,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온 이유가, 미워하는 부정의한 나쁜 놈들에게 조금이라도 기분 나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까? 모르겠다. 희망이 있을지, 없을지. 그럼에도 나는 웃으며 살고 싶다. 환한 표정으로, 즐겁게,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이. 지금 처한 현실이 비참하고 괴로울수록, 더욱 즐겁고 유쾌하고 행복하게 살아야한다. 적어도 내겐, 그것이 세상의 정의다.

 

 (피디 저널 연재 칼럼 '김민식 PD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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