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 Why? 크리에이터의 조건을 써놓고 생각해보니, 요즘 20대의 삶은 참으로 가혹하다. 하고싶은 일은 갈수록 늘어나는데 기회는 갈수록 줄어드니 말이다. 하고 싶은 일과 하고 있는 일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20대들을 보며 미안한 마음 뿐이다. 더 좋은 세상을 나눠주지 못해서.


나의 20대는 어땠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의 20대는 '뒤비쪼기'의 삶. 눈뜨고 꿈꾸는 삶이었다.


뒤비쪼기'? 고교 시절 은어였다. 영어 시간에 몰래 수학 공부하고 수학 시간에 몰래 영어 공부하기. 참으로 비효율적인 삶이다. 내 20대가 그랬다. 난 대학 시절 전공 수업 시간에 맨 뒤에 앉아 몰래 영어 소설책 읽었다. 학점이 2점대라 취업에 애는 먹었지만 다행히 영어 덕에 나중에 미국계 회사에 취업했다. 그렇게 들어간 회사도 다니면서 난 뒤비쪼기를 했다. 낮에는 영업뛰고 밤에는 학원가서 통역대학원 입시반 수업을 들었다. 다들 영업뛰고 나면 스트레스 받아서 밤에는 술만 펐는데, 난 영업이 즐거웠다. 힘든게 없어서 끝나면 술 대신 영어 공부했다. (맞다. 나 좀 재수없다. 그래서 친구도 없었다. 헐...) 그렇게 공부해서 회사 그만두고 외대 통역대학원에 들어갔는데, 거기서도 난 뒤비쪼았다. 4학기때 다들 졸업시험 준비할 때 난 밤에 친구들 몰래 언론사 시험준비했다. 9시까지 통역 스터디하고 집에 간다고 인사하고 나와, 몰래 중앙도서관에 가 12시까지 언론사 기출문제 풀었다. 친구들에게 MBC 공채 준비한다는 얘긴 안했다. 떨어지면 쪽팔리니까. 운좋게 MBC 예능국에 입사하고도 난 뒤비쪼았다. 일밤 연출하고 느낌표 만들고 시트콤 PD를 하면서도 늘 고민했다. 이것 말고 더 재미난 건 없을까? 그러다 사내공모를 통해 드라마국으로 옮기게 된 거다.


 
난 눈뜨고 꿈꾸는 사람이다. 무언가 일을 하면서도 딴 생각을 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싫어서가 아니다. 그냥 이것도 재밌지만 더 재미있는 게 없나? 궁금한거다. 영업을 그만두긴 했지만 세일즈 맨 시절, 다들 날더러 영업이 타고난 체질이라고 했다. 통역사를 그만두긴 했지만 통역대학원에선 나름 장학금도 타봤다. (성적 상위 10%에게만 준다.) 예능국을 떠났지만 시트콤 연출할 땐 정말 즐겁고 열심히 일했다.


 
눈 뜨고 꿈꾸는 사람은 위험하다. 눈 감고 꿈꾸는 사람은 현실은 외면한 채 꿈만 꾼다. 하지만 눈뜨고 꿈꾸는 사람은 멀쩡히 눈 뜨고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가슴 한 구석엔 칼을 갈고 있다. 내가 여기에 만족할쏘냐. 나의 야망은 딱 하나다. 이거 말고 더 재미난 거 뭐 없을까? 


 
'이직의 달인'으로 소문이 나 가끔 찾아오는 후배들이 있다. '이직하려면 어떻게 해야되요?' 그럴때마다 이렇게 답해 준다. '지금 네가 하는 일을 죽도록 열심히 해 본 다음에 이직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건성 건성 하면, 정이 안 들고 그럼 당연히 그만두고 싶어진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이직하면 다음 직장도, 다음 직업도 만족하기 어렵다. 옮기려면 먼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정말 열심히 한 번 해보시라. 그래도 안 맞으면 옮겨도 된다. 하지만 무엇이든 건성 건성 하고 다 해봤다고 말하는 건 곤란하다. 그건 내 인생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내가 어느 정도 그릇인지, 거칠게 다루어 보기 전엔 모를 일 아닌가?


 
난 아직도 눈 뜨고 꿈을 꾼다.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너무 재미있지만, 이보다 더 재미난 무엇은 없을까? 늙어서 죽을 때가 된다면 이런 유언 하나 남기는 게 꿈이다. "재미있게 사는 것도 이젠 질린다. 죽으면 더 재미있을까, 그게 궁금해서 이젠 가볼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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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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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_+ 2011.09.26 0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랄까, 이 글을 읽으면서 저의 방향성을 다시 다잡게 된 것 같아 감사말씀 드립니다.

    이것저것 하고싶은건 많고 이것도 재밌고 저것도 재밌고..

    일단 그중에서도 우선순위를 둬서 한분야를 열심히 깊이 파다가

    내 스스로가 만족하면 또 다른 재밌는 일을 찾아 떠나야겠어요(^^)

    좋은 선례(?)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됩니다..!

  2. 김민식pd 2011.09.26 07: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움이 되었다니, 감사합니다!^^

  3. 하핫 2011.11.14 12: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있습니다!!

  4. mrdragonfly1234 2012.05.31 08: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창작하는것 만큼 보람있는일이 없지요. 창작도 여러가지겠으나, 자기의 창작물이 남에게 인정받고 자신을 먹여살려주는 창작직업이 많지 않아요.. 순수예술계에는...

    창작도 하시고, 또 그런 작품으로 남도 기쁘게 하고, 자신도 즐겁고.... 정말 보기 좋습니다.

    그리고 한가지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이 옮겼을때에도 더 잘할수 있는거 맞습니다. 단, 오르지못할 나무에서 너무 시간을 허비하는것도 좀 우둔한거지요.(저) 저는 너무 우둔하게 한군데에서 허비하는 타입이어서 좀더 다른걸 많이 해볼걸 하는 후회가 좀 있습니다. 결국은 다 거기서 거기겠지만,,, 김피디님은 직업이 자기 적성하고 딱 들어맞고 씨너지 효과까지 나는것 같아서 보기좋습니다.. 너무 심하게 자랑은 하지마시고...너무 부러워요..

  5. mrdragonfly1234 2012.05.31 08: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끔은 제발 이런 생각도 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뒤비쪼기를 못합니다. 또 어떤이들은 뒤비쪼기를 할줄 알지만, 그렇게 해서 인생에 오히려 더 안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김피디님은 뒤비쪼기를 안하셔도, 제가보기에는 성공하셨을 분 처럼 보이는군요. 제발 뒤비쪼기 때문에 잘풀렸다는 뉘앙스의 글로 그렇게 해도 안풀릴만한 사람들에게 일부러 바람잡지 말아주세요. 뒤비쪼기식으로 해서 가뜩이나 한가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결국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봐왔습니다.

    • 김민식pd 2012.06.02 10: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옳으신 말씀입니다. 인생에 대안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경계하자는 뜻으로 쓴 글이랍니다. 한국 사회에서 너무 많은 분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재미도 못느끼면서 그냥 매여사는 것 같아서요.

  6. mrdragonfly1234 2012.06.02 12: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 어린시절을 돌이켜 보면, 한국사회는 너무 정형화된 틀을 강요하는 사회입니다.어느 어느 직종이 뜬다. 그게 많이 버니까 전부 그걸 목표로 공부해라..... 인간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몇가지 답안만을 제시해주면서 이게 정답이다. 이렇게 해버리니까, 거기에 도달하는 몇몇은 기쁘겠지만, 꿈을 못이루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좌절감을 느껴야만 하는 "경쟁사회"입니다. 그 치열한 경쟁사회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자식을 거기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사실이 기쁘지 않겠죠... 경쟁이란게, 다큰 성인한테는 자극이 되니까 도움이 되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자라나는 어린이에게는 (적어도 대다수 어린이들에게) 좌절감만을 일으키는것 같습니다.

  7. lshnsy 2014.01.07 14: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익하게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