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를 즐기다보니 주위에는 좋은 책을 소개해주는 사람이 많아요. 한 친구를 만나 “작년에 읽은 책 중에 뭐가 제일 좋았어?” 하고 물어보니 자신의 전자책 서재를 열어보여주더군요. 그 친구는 2025년 한 해 동안 300권을 읽었는데요. 그 친구가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라는 책을 소개하며 보낸 카톡.
‘형, 방금 완독했는데 이 책 강추. 부의 양극화가 야기하는 사회 통합 해체과정을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책 보니 현재 미국 정치가 왜 그 모양인지 쉽게 이해가 되더라고요. 여행 잘 다녀오시고 시간 날 때 꼭 읽어보세요.’
저는 그 톡을 보고 씨익 웃었어요. 저도 작년에 인상깊게 읽은 책이었거든요. 다만 연말에 건강 관리 책 원고 작업하느라 미처 블로그에 독서 일기로 정리하진 못했는데요. 후배의 톡을 보고 예전에 쓴 메모를 찾아봤어요.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 쓴 글이 있어요.
‘제가 이 책에서 답하고자 하는 핵심 질문은 “왜 국가로 조직된 모든 사회는 결국 ‘종말End Times’, 즉 고조된 사회적 격동과 정치적 폭력 그리고 때로는 붕괴의 시기로 접어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소련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그 국가는 이제 존재하지 않지요. 1977년 우리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왔고, 저는 소련이 붕괴하는 과정을 멀리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제2의 조국인 미국에서도 높은 불안정성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펼쳐지는 정치적 혼란을 이해하는 데 이 책이 어떻게 도움이 될까요? 간략히 설명하자면, 미국의 지배 계급은 크게 두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상위 1%’로 불리는 초고액 자산가들(얼마 전까지 공화당이 대표해온 계층)이며, 다른 하나는 ‘상위 10%’로 구성된 고학력자 및 전문직 종사자들(대체로 민주당이 대표하는 계층)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양대 정당은 급격한 변화를 겪었는데, 특히 공화당이 크게 변모했습니다. 바야흐로 공화당은 극우 포퓰리즘을 신봉하는 진정한 혁명 정당으로 변신하는 중입니다.’
보수당인 공화당이 1% 자산가를 대변한다면, 진보당인 민주당은 10% 상류층을 대변한다는 이 사실. 이것이 미국 노동자 계층이 민주당에 등을 돌리고 트럼프를 지지한 이유입니다. 트럼프는 부유층에게 유리한 세법 개정을 하는 동시에 중산층의 표심을 잡기 위해 반이민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합니다.
2024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캠프를 중심으로 다양한 반反엘리트 연합이 결집했어요. J. D. 밴스 같은 인물들이 공화당 내에서 급속도로 치고 올라가며 부통령이 되었지요. 정치인이 아닌 반엘리트 그룹에는 터커 칼슨 같은 언론인과 일론 머스크를 비롯한 억만장자도 포함됩니다.

저는 예전에 J.D. 밴스가 쓴 <힐빌리의 노래>를 리뷰한 적이 있어요. 저는 그 책이 참 좋았거든요. 가난한 노동자 계층에서 태어난 밴스가 교육을 통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는 모습이 멋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정계에 입문하고 트럼프의 오른팔이 되어 국제 무대에서 유럽의 우방을 조롱하는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았지요. 난 밴스가 미친 줄 알았어요. 책을 보고 깨달았어요. 그는 자신의 출신 계급을 배반한 게 아닙니다. 단지 좌절한 엘리트가 된 것일 뿐.
오늘날 미국의 지배계급은 인류의 역사 내내 수천 번 반복된 곤경에 빠져 있습니다. 많은 평범한 미국인들이 분노에 휩싸여 지배 엘리트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있어요. 엘리트 지위를 추구하다가 좌절한 수많은 학위 소지자들이 반엘리트 정서를 키우는 온상입니다. 기존 체제를 타도하는 꿈을 꾸는 이들이지요. 지배계급이 혁명적 상황에서 빠져나오는 경로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체제의 전복이고요. 다른 하나는 일련의 개혁을 통해 사회 체계의 균형을 바로잡으면서 대중의 궁핍화와 엘리트 과잉생산 추세를 뒤집는 것이지요.
국가는 어떻게 무너질까요? 저자는 엘리트가 되려다 좌절한 이들이 늘어나면 사회 내 불만 세력이 늘어가고 이들이 사회 체제 전복의 에너지를 키운다고 합니다. 그 한 예로 미국의 박사 학위 소지자 통계를 들어요.
1960년에서 1970년 사이에 미국 대학교에서 수여된 박사학위의 수가 세 배 이상 늘었습니다. 1만 개 이하에서 3만 개로 증가한 것이죠. 1960년대와 1970년대,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시기에는 대학들의 박사학위 보유자들에 대한 수요가 무척 많았어요. 베이비붐 세대를 가르쳐야 하니까요. 그때 교수가 된 이들이 아직 정년이 남아있어요. 그런데도 신규 박사 학위 소지자들은 교육 시장에 쏟아져 나옵니다.
그 결과 많은 학자 지망자들은 저임금 비정규 노동의 황량한 생활에 처하게 됩니다. 할리우드 주변에서 웨이터로 시간을 보내며 성공의 기회를 기대하는 배우 지망생들처럼, 많은 이들이 여러 해를 넘겨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면서 의료보험도 없이 허름한 아파트에서 사는 동안, 학계 바깥에서 취직할 수 있는 자격은 점점 줄어들지요. 그렇게 바라는 교수의 삶이 한층 더 멀어져 가는데도 미국은 점점 더 많은 박사학위를 남발하고 있어요.
요즘 인공지능의 활약이 두드러지면서 회계사, 세무사, 변호사 등의 신규 채용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는 뉴스를 봅니다. 다 오랜 시간 자격증을 따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하는 직종인데요. 우리나라의 높은 학구열로 인한 높은 대학 진학율과 AI 등 신기술 발전으로 인해 줄어드는 고소득 직종. 이 두 가지를 연결하면 책에서 경고하는 그 문제, 즉 잉여 엘리트의 대량 생산과 그로 인한 사회 불만 및 불안 누적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세계 불평등 데이터베이스World Inequality Database에 따르면, 한국의 국민소득에서 상위 1%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대 이후 2023년까지 2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동시에, 대학 졸업자의 수가 급증하면서 한국은 전 세계에서 대졸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고급 학위를 가진 젊은 인재들을 소화할 만한 충분한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이 문제는 특히 고학력 청년 남성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치며, 우리의 역사적 분석에 따르면 정치적 안정성의 관점에서 가장 위험한 인구 집단이 바로 이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정의 추동 요인들은 이미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저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자기 나라가 극히 취약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고 저는 20대 한국 남성의 우경화에 대해 다시 고민해봤어요. 세상이 빠르게 발전하는데, 자신들이 약속받은 자리는 사라져가고, 코로나 이후 자산 시장의 급등으로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세대...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는 족쇄 말고 잃을 것이 없다”고 선언했어요. 하지만 마르크스는 틀렸어요. 궁핍해진 프롤레타리아는 성공적 혁명을 작동시키는 주체가 아닙니다. 정말로 위험한 혁명가는 좌절한 엘리트 지망자들로, 그들은 자신이 가진 특권과 교육, 연줄 덕분에 충분히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요. 실제로 대부분의 공산 혁명은 가난한 민중이 주도했다기보다 엘리트 층의 자제들이 이끌었어요. 고학력 프레카리아트로 전락할 운명인 고학력 젊은 층의 점점 많은 이들이야말로 불안정성 말고는 잃을 것이 없는 집단입니다.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부의 재분배 문제, 잉여 엘리트 집단의 문제, 우리 사회가 앞으로 고민해야 할 과제들에 대해 논의해 볼 수 있는 좋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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