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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노동의 배신' 이곳은 가난한 이의 지옥이다.

by 김민식pd 2012. 6. 12.

부끄러운 고백 하나...

 

MBC 파업으로 넉 달 째 월급이 나오지 않으니, 사람이 좀 비굴해졌다.

 

다른 직장을 다니는 후배를 만나면 '형이 요즘 월급이 안 나오잖니. 밥 좀 사주라.'하고 삥을 뜯는다. 심지어 몇 달 째 월급 안나오는 MBC 후배도 내 밥이다. '형이 파업 선동했다고, 또 구속영장이 나왔잖니. 어쩌면 이번 여름은 유치장에서 날 지도 모르는데, 꼭 먹고 싶은 게 있거든?' 일명 구속영장 앵벌이다. 구속영장 핑계대고 밥을 사달라고 하면 다들 지갑을 순순히 연다. 세상, 참 아름답다.

 

책 읽는 걸 참 좋아하는데, 책 사 볼 돈이 없다. 그래서 역시 앵벌이에 나섰다. 새 책이 나올 때 서평단 이벤트에 응모해서 당첨되면 책을 공짜로 볼 수 있다. 앗싸! 솔직히 예전에는 이런 책 증정 이벤트에 응모하지 않았다. 가능하면 학생들에게 기회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데 몇달째 월급을 못받으니 사람이 비굴해지더라.

 

부키 출판사에서 새 책 '노동의 배신' 블로거 서평단 모집을 했다. 이 책은 자존심을 팔아서라도 꼭 읽고 싶었다. 그래서 달려갔다. '일일 최대 방문자수 1만명을 넘긴 파워블로거, 어쩌구 저쩌구...' 구차한 글을 올렸는데 운좋게 사다리타기에서 당첨되었다. 앗싸!!! 역시, 세상 참 아름답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에 끌리는 이유? 작년에 같은 저자의 '긍정의 배신'을 누가 내게 권했다. 나같은 '긍정의 화신'이 꼭 읽어야할 책이란다. 실제로 나는 온갖 자기계발서를 닥치는 대로 읽으며 끝없는 긍정의 정신으로 나를 무장하고 산다. 그런 내게 '긍정의 배신'은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미국 출판계에 만연하는 긍정주의 철학은 독자들에게 그릇된 현실 인식을 심어준단다. '당신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당신의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자세 때문이야.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당신은 성공할 수 있어.' 바바라 에런라이크는 그런 긍정주의에 일침을 가한다. 시스템이 공정하지 못한데 개인의 긍정적인 자세 따위가 무슨 소용이야. 긍정주의는 경제적 불평등과 빈곤을 가리는 도구일 뿐이다. 2008년의 미국발 금융위기도 긍정의 마약에 취한 바람에 위기의 신호를 감지하지 못한 탓이다. 

 

'긍정의 배신'이 좋았던 이유? 심각한 문제를 경쾌한 문체로 푼다. '노동의 배신'도 마찬가지다. 커지는 빈부격차의 원인을 어려운 경제 용어와 통계로 늘어놓았다면 읽기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자는 저임금 노동을 몸소 체험하고 자신의 경험담을 책으로 썼다. 힘든 일상에서도 위트를 잃지 않는 자세, 묘하게 매력있다, 이 작가!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검소하게 살아도 최저 임금으로는 치솟는 물가와 집세를 따라 갈 수 없다. 가난한 이들이 점점 더 가난해지는 건 나태하고 사치한 탓이 아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가난은 노력 부족이 아니라 시스템 탓이다.

 

가난하니까 보증금이나 전세로 집을 구할 수 없어 결국 일주일 단위로 방을 빌리면서 비싼 세를 문다. 매주 여관비로 돈이 나가니까 목돈을 마련할 여지가 없다. 하루종일 격한 육체노동에 시달리고 주말에도 투잡을 뛴다. 결국 지친 육체를 달래기 위해 술에 의지한다. 건강은 날로 악화되는데 미국에서는 의료보험비를 낼 엄두가 안난다. 약값도 너무 비싸고, 제때 건강 검진도 못 받는다. 결국 작은 병을 키워 큰 병 만들고, 약값으로 때울 것을 수술비로 막으니, 미국은 가난한 이의 지옥이다. 

 

요즘 우리나라도 원룸이 전세 대신 월세가 대세다. 전세는 세입자의 자산이지만, 월세는 꼬박꼬박 집주인만 배불려주는 돈이다. 전세 대신 월세만 있다면, 젊은 세대는 영영 집 살 돈을 모을 수 없다. 이건 세대간 착취다. 심지어 아이들 무상급식까지 금지해야 한다는 어른도 있고, 세금으로 반값 등록금 깎아주는 것은 절대 안된다는 어른도 있으니, 한국은 마음이 가난한 어른들의 지옥이 아닌가.

 

부자가 자발적으로 가난한 이를 배려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가 내재한 모순으로 빈부격차는 날로 커지는데, 그걸 막아야 하는 이가 바로 정치인이고 부자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사회에서, 심지어 가난을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고, 자신이 누리는 부를 오로지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고 착각한다면, 그곳이야말로 지옥이다.

 

'노동의 배신' 가난을 자발적으로 체험하고, 저임금 노동을 몸으로 견뎌내며 쓴 책이라 어찌보며 읽기 참 힘든 책이다. 그러나 작가는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특유의 위트를 잃지 않는다. 재미나게 책을 쓴 덕분에 미국에서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많은 사람들의 각성을 불러와 결국 최저임금 인상이라는 기적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한 사람의 작가가 지옥을 경험하고, 그 지옥을 생생하고 재미나게 묘사한 덕에, 세상은 바뀔 수 있었다. 결국 지옥에서도 웃음의 여유는 필요하다.

 

웃을 수 있다면 그 곳은 더이상 지옥이 아니다. '긍정의 배신'을 읽고도 '긍정의 화신'으로 사는 이유? 공포에 질리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공포 영화를 보라. 살인마 앞에서 희생자들은 비명만 지르다 꼼짝못하고 죽는다. 달아날 생각을 못하는 이유는 공포에 얼어붙기 때문이다. 세상이 지옥이라도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우리는 공포를 잊을 수 있고, 지옥을 빠져나갈 힘도 얻을 수 있다.

 

기자를 꿈꾸는 예비 언론인에게 일독을 권한다. 바바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

세상을 바꾸는 글쓰기란 무엇인가? 그 답을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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