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고백 하나...

 

MBC 파업으로 넉 달 째 월급이 나오지 않으니, 사람이 좀 비굴해졌다.

 

다른 직장을 다니는 후배를 만나면 '형이 요즘 월급이 안 나오잖니. 밥 좀 사주라.'하고 삥을 뜯는다. 심지어 몇 달 째 월급 안나오는 MBC 후배도 내 밥이다. '형이 파업 선동했다고, 또 구속영장이 나왔잖니. 어쩌면 이번 여름은 유치장에서 날 지도 모르는데, 꼭 먹고 싶은 게 있거든?' 일명 구속영장 앵벌이다. 구속영장 핑계대고 밥을 사달라고 하면 다들 지갑을 순순히 연다. 세상, 참 아름답다.

 

책 읽는 걸 참 좋아하는데, 책 사 볼 돈이 없다. 그래서 역시 앵벌이에 나섰다. 새 책이 나올 때 서평단 이벤트에 응모해서 당첨되면 책을 공짜로 볼 수 있다. 앗싸! 솔직히 예전에는 이런 책 증정 이벤트에 응모하지 않았다. 가능하면 학생들에게 기회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데 몇달째 월급을 못받으니 사람이 비굴해지더라.

 

부키 출판사에서 새 책 '노동의 배신' 블로거 서평단 모집을 했다. 이 책은 자존심을 팔아서라도 꼭 읽고 싶었다. 그래서 달려갔다. '일일 최대 방문자수 1만명을 넘긴 파워블로거, 어쩌구 저쩌구...' 구차한 글을 올렸는데 운좋게 사다리타기에서 당첨되었다. 앗싸!!! 역시, 세상 참 아름답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에 끌리는 이유? 작년에 같은 저자의 '긍정의 배신'을 누가 내게 권했다. 나같은 '긍정의 화신'이 꼭 읽어야할 책이란다. 실제로 나는 온갖 자기계발서를 닥치는 대로 읽으며 끝없는 긍정의 정신으로 나를 무장하고 산다. 그런 내게 '긍정의 배신'은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미국 출판계에 만연하는 긍정주의 철학은 독자들에게 그릇된 현실 인식을 심어준단다. '당신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당신의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자세 때문이야.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당신은 성공할 수 있어.' 바바라 에런라이크는 그런 긍정주의에 일침을 가한다. 시스템이 공정하지 못한데 개인의 긍정적인 자세 따위가 무슨 소용이야. 긍정주의는 경제적 불평등과 빈곤을 가리는 도구일 뿐이다. 2008년의 미국발 금융위기도 긍정의 마약에 취한 바람에 위기의 신호를 감지하지 못한 탓이다. 

 

'긍정의 배신'이 좋았던 이유? 심각한 문제를 경쾌한 문체로 푼다. '노동의 배신'도 마찬가지다. 커지는 빈부격차의 원인을 어려운 경제 용어와 통계로 늘어놓았다면 읽기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자는 저임금 노동을 몸소 체험하고 자신의 경험담을 책으로 썼다. 힘든 일상에서도 위트를 잃지 않는 자세, 묘하게 매력있다, 이 작가!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검소하게 살아도 최저 임금으로는 치솟는 물가와 집세를 따라 갈 수 없다. 가난한 이들이 점점 더 가난해지는 건 나태하고 사치한 탓이 아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가난은 노력 부족이 아니라 시스템 탓이다.

 

가난하니까 보증금이나 전세로 집을 구할 수 없어 결국 일주일 단위로 방을 빌리면서 비싼 세를 문다. 매주 여관비로 돈이 나가니까 목돈을 마련할 여지가 없다. 하루종일 격한 육체노동에 시달리고 주말에도 투잡을 뛴다. 결국 지친 육체를 달래기 위해 술에 의지한다. 건강은 날로 악화되는데 미국에서는 의료보험비를 낼 엄두가 안난다. 약값도 너무 비싸고, 제때 건강 검진도 못 받는다. 결국 작은 병을 키워 큰 병 만들고, 약값으로 때울 것을 수술비로 막으니, 미국은 가난한 이의 지옥이다. 

 

요즘 우리나라도 원룸이 전세 대신 월세가 대세다. 전세는 세입자의 자산이지만, 월세는 꼬박꼬박 집주인만 배불려주는 돈이다. 전세 대신 월세만 있다면, 젊은 세대는 영영 집 살 돈을 모을 수 없다. 이건 세대간 착취다. 심지어 아이들 무상급식까지 금지해야 한다는 어른도 있고, 세금으로 반값 등록금 깎아주는 것은 절대 안된다는 어른도 있으니, 한국은 마음이 가난한 어른들의 지옥이 아닌가.

 

부자가 자발적으로 가난한 이를 배려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가 내재한 모순으로 빈부격차는 날로 커지는데, 그걸 막아야 하는 이가 바로 정치인이고 부자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사회에서, 심지어 가난을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고, 자신이 누리는 부를 오로지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고 착각한다면, 그곳이야말로 지옥이다.

 

'노동의 배신' 가난을 자발적으로 체험하고, 저임금 노동을 몸으로 견뎌내며 쓴 책이라 어찌보며 읽기 참 힘든 책이다. 그러나 작가는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특유의 위트를 잃지 않는다. 재미나게 책을 쓴 덕분에 미국에서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많은 사람들의 각성을 불러와 결국 최저임금 인상이라는 기적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한 사람의 작가가 지옥을 경험하고, 그 지옥을 생생하고 재미나게 묘사한 덕에, 세상은 바뀔 수 있었다. 결국 지옥에서도 웃음의 여유는 필요하다.

 

웃을 수 있다면 그 곳은 더이상 지옥이 아니다. '긍정의 배신'을 읽고도 '긍정의 화신'으로 사는 이유? 공포에 질리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공포 영화를 보라. 살인마 앞에서 희생자들은 비명만 지르다 꼼짝못하고 죽는다. 달아날 생각을 못하는 이유는 공포에 얼어붙기 때문이다. 세상이 지옥이라도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우리는 공포를 잊을 수 있고, 지옥을 빠져나갈 힘도 얻을 수 있다.

 

기자를 꿈꾸는 예비 언론인에게 일독을 권한다. 바바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

세상을 바꾸는 글쓰기란 무엇인가? 그 답을 보여줄 것이다.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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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6.12 07: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mrdragonfly1234 2012.06.12 09: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습니다! 긍정의 화신이라... 그 말씀을 들으니 저역시 기분이 짠~ 합니다. 저는 긍정의 배신이라는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긍정의 힘" 어쩌구 하는 말에 그다지 동요되거나 흥분되거나 하지않게 된지 오래되었습니다. 저는 김피디님의 블로그를 제일 앞쪽에서 읽었기 때문에 김피디님이 긍정의 화신이라는 걸 이미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김피디님도 긍정의 배신이라는 책에서 뭔가 낌새를 채신것 같아 기쁘군요... 저역시 젊은시절부터 자기개발서적을 꾸준히 읽고 자신감, 긍정적인 사고가 주는 힘 어쩌구 하는 강연이다, 책이다 꽤나 찾아 보았었습니다.. 물론 많이 얻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이라는게 결국 그걸로 되는게 아니라는걸 깨달았습니다. 긍정의힘 좋습니다.. 없는거 보다 좋지요. 자기암시 입니다. 저도 그런 자기 암시의 힘으로 어려운일을 부딪힐때마다 희망을 잃지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게 그림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강한 자기암시를 걸어 싫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일을 하다보면, 어느정도 까지는 꽤 밀어붙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회의가 오더군요. 나중에 결국 제가 깨달은게 뭔지 아십니까? 바로 "운칠기삼" 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사람은 드뭅니다. 노력하지 않는사람은 절대 성공못하도록 되어있고, 또 그런식으로 세상을 만드는게 옳은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뭐 게으른 사람까지 성공하게 만들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노력하는 사람들 중에서만 따져본다면, 성공이 노력에 비례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오히려 그다지 관계가 없는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가장 중요한게 운이 따라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걸 얼마나 빨리 아느냐 모르느냐가 바로 진짜 성공하는사람과 쬐금성공하는 사람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크게 성공한 사람들이 다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그사람은 극도의 이기주의자 일 확률이 큽니다. 운이 좋았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사람은 겸손하기도 하겠지만, 사실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운" (또는 배경/집안 이라는 단어도 괜챦겠죠, 한국에서는 ) 이라는 요소를 배제한채 무조건 즐겁게, 긍정적으로, 열심히 살면 다 성공한다, 하고 떠들어대는 분들은 뭔가 그렇게 떠들어대야 자기책이 팔리든, 유명해든지 하는 속셈이 있기때문에 그렇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거, 왜, 언젠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설문조사한 것 기억 나시지요? 대학 졸업한지 10-15 년 만에 조사를 하면, 대학때(젊을때) 놀지않고 열심히 공부/일한 사람들 은 본인들이 잘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들은 후회한다는 설문조사 결과요..... 그런데 30 년뒤에 조사를 해보면 결과가 반대로 나온다는 사실....

    열심히 긍정적으로 희망을 가지고 사는게 단기적 미래에는 도움이 되지만, 길게 인생을 바라 보았을때에는 크게 도움이 안 된다고도 볼수있지요.

    큰 회사에서 그런것 안 갈쳐줍니다. 무조건 긍정적으로 바쁘게 살라고 갈쳐줍니다.. 그리고 나중에 뭔가 이상하다고 느낄때 쯤이면, 버려 버리고 젊은분들 세뇌시켜 버립니다... 이 세상에 무조건 한방향으로 질주해서 좋은 건 없다는 거겠지요...

    그리고, 자꾸 외국 얘기를 드려서 죄송한데, 영국 사람중에 David Icke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사람은 젊은 시절 BBC 방송국에서 잘 나가던 스포츠중계 앵커였는데, 어는날 갑자기 (1992 년도) 이세상은 reptilian 들에 의해 지배받는 세상이다 라고 카메라 앞에서 말하면서 방송국에서 짤리고 제2의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사람의 forum site를 보면, 지금 김피디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이 아주 많이 모여있습니다.

  3. 2012.06.12 18: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4. 하늬바람 2012.06.21 05: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 저를 기억하실런지... 예전 피디님이 만드신 시트콤사랑 회원이었는데... 피디님 직접 보러 정모까지 갔었던... 뉴논스톱 열혈팬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피디님 팬이었던거 같네요. 피디님 덕분에 뉴논을 더 좋아하게 되었고 박경림, 조인성의 팬이되었으니... 세월이 흘러 흘러 오늘 뉴스에서 피디님 징계 소식 보고 시트콤 사랑에 들어갔다가 요샌 거기 잘 안들어가시는 것 같아서 여기다 응원 남기러 와서 파업관련 글들을 다 읽어 보고 새벽을 밝히고 있네요. 피디님 글 중에 최악과 최고를 생각하라는 말씀 깊이 새기고 갑니다. 피디님은 스스로를 날라리라고 하시지만 제가 보기엔 정말 천진 난만 그 자체예요. 광주 항쟁 당시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있는 어린 아이의 유명한 사진... 피디님이 노조 부위원장이고 징계를 받았다니 저는 딱 그 사진이 떠오릅니다. 야만의 시대, 잘 견뎌 봐요. 웃으면서, 끝까지!! 피디님 화이팅!!

    • 김민식pd 2012.06.21 05: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와우, 시트콤 사랑, 반갑군요! 10년 되었죠? 파업 지지 시민 촛불에서 시트콤 사랑 회원분들 자주 뵙니다. 잊지 않고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종종 놀러오세요. 그런데 그 시절 아이디도 하늬바람이었나요?

  5. 마음전문가 2012.07.04 08: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책을 검색하다 들렀는데 좋은 글 잘 읽고갑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파업 지지합니다, 힘내세요.

  6. 2012.08.15 2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