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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2017 MBC 파업일지

이 팔뚝질을 멈출 수 없습니다!

by 김민식pd 2012. 5. 9.

(오늘은 한 MBC 후배가 쓴 100일 결의문을 올립니다.) 

 

몰랐습니다.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은. 싸워야 할 때 싸우는 게 상식을 가진 자의 책무라고 생각했을 뿐, 상식을 지켜내는 일이 이렇게 지난한 싸움이 될지, 솔직히 미처 가늠하지 못했습니다.

 

100일 전입니다. 민주의 터에 감돌던 늦겨울 차가운 공기를 서로의 온기로 데워야했던 그 날. 그 뒤로 석 달하고도 열흘이 지났습니다. 불같이 타오르는 연인들마저 서로의 사랑이 굳건함을 확인하고 축하받는 기간, 결코 짧지 않은 그 기간을 수백 명이 한 방향을 바라보며 그렇게 달려왔습니다.

 

왜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언론인이기 이전에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서 먹고 사는문제를 어찌 부차적인 일로 치부할 수 있었겠습니까. 왜 조바심이 안 났겠습니까. 사랑하는 내 일터, 내 자식과도 같은 프로그램이 처참히 망가지는 모습을 목도하며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한때 선배라고 부르던 자들이 후배의 등에 칼을 꽂고, 때론 침묵으로 동조할 때 어떻게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버틸 수 있었습니다. 바로 당신 때문입니다. 당신의 뒷모습 때문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지쳐갈 때마다 문득 고개를 들면 당신은 말없이 등을 보이고 서 있었습니다. 두려움 없이 솟구치는 당신의 팔뚝질을 볼 때, 어느새 내 주먹에도 불끈 힘이 들어가곤 했습니다. 입은 보이지 않아도 당신이 외치는 구호가 들려올 때, 어느새 나도 목소리를 높여 당신께 화답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때론 당신의 넓은 등에 기대 위안을 얻었고, 때론 들썩거리는 당신의 등을 보며 힘을 얻었습니다.

 

수많은 당신을 보았습니다. 방문진을 걸어 나오는 뻔뻔한 얼굴을 향해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는 당신의 순수한 분노를 보았습니다. 길가는 시민들을 부여잡고 전단지를 내미는 수줍은 손에서, 당신의 절실함을 보았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는 여의도 공원에서 흠뻑 젖은 당신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멋지고 아름다웠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알지 못해도, 당신은 곧 나였습니다. 당신이 나와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는 그 순간순간이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의 증거였습니다.

 

어느새 민주의 터에도 따스한 봄 햇살이 가득합니다. 어쩌면 지금껏 걸어왔던 길보다 앞으로 더 멀고 험난한 길을 가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두렵습니다. 겁이 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왜 당신과 함께 일터를 떠나왔는지 다시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복잡한 정치 공학도, 외부 세력에 기댄 정세 판단도 아니었습니다. ‘MBC를 국민의 품으로 돌려놓겠다는 구호를 민주의 터에 내 건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말로만 떠들던 공영 방송을 제대로 지켜내는 일이 얼마나 큰 노력과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 당신과 나는 싸우면서 배워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확신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당신과 함께 이 전인미답의 길에서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이미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함께 분노하고, 울부짖고, 박수치는 매 순간이, 나중에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승리의 무용담을 들려줄 때 상기할 진정한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비열한 징계와 협박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 그 순간부터 당신과 나는 이미 승리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듭니다. 아무 말도 들려주지 않지만,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 당신의 등을 마주합니다. 지금 이 순간, 문득 깨닫습니다. 내 뒤에 있는 또 다른 당신이 나의 등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머리 위로 내지르는 주먹에 나도 모르게 불끈힘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나는 이 팔뚝질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영상은 어제 '파업 100 문화제-끄떡없어 마봉춘', 노래패 공연중 한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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