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트위터로 한 고등학생이 질문을 했다. 내가 연출한 'MBC 프리덤'같은 립덥 영상을 찍고 싶어서 학교에서 출연자 모집 공고를 냈는데, 출연하겠다는 친구들이 없어 고민이라고...

 

내가 늘 하는 말이 있다. 세상 모든 일이 다 내 뜻대로 되면 그게 사람이냐, 신이지. 

 

연출은 착각쟁이다. 자신의 말 한마디로 모든 게 다 될 거라고 생각한다. 절대 그렇지 않다. 특히나 취미삼아 영상을 만들거나 학교에서 영상 제작 동아리로 일할 경우, 더더욱 그렇지 않다. '네가 뭔데?' 이런 얘기 듣기 딱 좋다. 내 머리 속에 아무리 죽이는 그림이 있어도, 주위 사람들을 움직일 수 없다면 연출을 할 수 없다. 

 

연출의 기본은 설득이다. 내 머리 속에 있는 이야기를 글로 옮겨줄 작가를 설득하고, 내 머리 속에 있는 그림을 촬영해 줄 카메라 감독을 설득하고, 내 머리 속에 있는 이미지를 표정으로 옮겨줄 배우를 설득한다. 

 

정말 피곤한 일이다. 네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을 다 일일이 설득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렇게 하나 하나 내 방식대로 고집해서 만들어가는 건 작가주의 연출이다. 한 컷 촬영을 위해 잭 니콜슨에게 수십번의 엔지를 냈다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전형적인 작가주의, 완벽주의 감독이다. 하지만 초보 감독이나 아마추어 연출자가 이렇게 일하면 팀 워크 깨진다. '네가 뭔데?' 이런 소리 듣기 딱 좋다.

 

초보 연출은 작가형 감독보다는 공동창작자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뮤비 출연자를 모집했는데, 반응이 썰렁하면? 접근 방식을 바꿔서 다시 모집한다. 왜 모이지 않을까?를 고민한 후,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한다. 사람들을 설득할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한다. 내가 제일 즐겨 쓰는 설득의 방법은? 비는 거다. 한번만 해달라고 사정 사정 빈다.

 

감독이 폼나는 직업이라고? 아니, 감독은 내가 찍고 싶은 그림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빌어야 한다면 빈다. 빌었는데도 모이지 않으면? 그러면 모인 사람만 가지고 찍으면 된다. 한 명이든 두 명이든. 그래서 나를 지지해준 고마운 사람들에게는 최고로 멋진 영상을 선물하고, 나를 버린 이들은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들면 된다. ^^ 

 

입사하고 '인기가요 베스트 50'이라는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처음 일했다. 매주 30초짜리 예고를 하나씩 만드는게 내 첫 임무였다. 가요 프로 예고는 항상 가수들의 출연 장면을 편집해서 만든다. 나는 늘 똑같은 예고만 만드는 게 싫어, 직접 촬영을 시도했다. 문제는 캐스팅이 힘들다는 거. 이름 없는 신입사원이 30초 짜리 예고 찍는데, 누가 오겠나. 촬영 스탭이나 장비를 구할 예산도 없고. 그래서 집에 있는 목각 관절 인형으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가정용 비디오 카메라로 3시간 동안 프레임 촬영하면서 인형의 손발을 조금씩 구부려가며 움직임을 만들었다.

 

 

나의 첫번째 주인공이다. 생각해보면 참 말 잘 듣는 고마운 연기자였다. 동작이 굼떠서 촬영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흠이지. 아, 생각해보니 표정 연기가 없는 아이였구나. ^^

 

연출은 끊임없이 차선과 타협하는 사람이다. 내 머리 속에 있는 그림에 집착하기보다 현실에서 가능한 것들을 모아 어떻게 새로운 무언가를 만드느냐가 연출의 관건이다. 나 혼자 만든다기보다 공동창작이라 생각하고 협동의 과정을 즐기시라. 내 뜻대로 안된다고 짜증내는 순간, 연출은 하수가 된다.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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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v그거v아니 2012.05.04 08: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독님.와우!
    감독님께 질문을 드렸던 그학생이 고마워 지는 순간이네요.어제 민주노총 이근재 실장님으로부터 캠코더를 전달 받았습니다.
    골든브릿지 파업영상을 저 보고 찍어보라고...
    카메라를 만져본건 초등학교,중학교때 방송반 이후라서 후덜덜 떨렸으나 오늘 감독님의 글을 읽고나니 자신감이 조금은 상향된것 같아요.
    쌩초보이지만 진심을 담은 영상 많이 찍어서 좋은영상으로 함만들어 볼께요^^

    • 김민식pd 2012.05.07 07: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방송반을 하셨으면 경력직이신걸요? 해야할 일이라면 즐겁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 영상 제작, 파업 현장에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 노동자 뉴스 제작단 같은 곳에도 지원 부탁할 수 있지 않을까요?

  2. 김성은 2012.05.04 0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맞는말인거 같습니다ㅠㅠ고집부리다가 포기해버리는 저도 반성하구요ㅎㅎ그나저나 관절인형 예고편 보고싶은데요?ㅋㅋ

    • 김민식pd 2012.05.07 07: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 보이기는 민망한 작품이에요. 어렸을때는 제가 만든 예고편을 따로 모아두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양이 너무 많아지니까 포기하게 되더라구요. 항상 예전에 만든 작품보다 미래에 만들 작품이 더 중요하다는 자세로 삽니다. ^^

  3. 말 잘 듣는 아이 2012.05.04 1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섭외의 신이시군요. 첫섭외부터 근사했네요. ㅎㅎ 저도 요즘 차선을 선택해야 하는 건 아닐까 갈등하고 있답니다. 제가 가장 하고 싶은 궁극의 일이 무언가를 놓고 보면 역시 답은 또 제자리지만 그곳으로 가기 위해 길이 없다면 비슷한 길은 어떨까 하구요. 조금 달라도 끝은 많이 다를까봐 겁이 나서 피했던 길. 하지만 결국 저만 꿈 꾸기를 포기치 않는다면 언젠가 그 길의 끝도 그곳으로 가지 않을까요? 답은 제 안에 있으니까 이 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로 고민 고민 하고 있답니다. 대부분 현명한 결정 하라고 할테지만 피디님이라면 현명한 결정으로 만들라 하실 것 같네요. ^^ 좋은 주말 되세요.

  4. 코난TV [인터넷방송] 2012.05.05 01: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독님 덕분에 그리고 방송사에서 근무하는 방송인들 덕분에...
    저도 콘텐츠 , 연출 등등 다변화 해보려고 노력중이예요...
    항상 많은 부분을 가르쳐주시는..^^
    코난의 은인이십니다^^

  5. 방원경 2012.05.05 14: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고등학생이 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요즘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였는데 !! 심지어 상황까지 똑같아요ㅋㅋ 저도 그 립덥뮤비 찍을라고 하고있거든요ㅎㅎ 정말 최고의 해답, 가장 멋진 해답입니다. 목각인형을 섭외하다니 피디님 대박!

    • 김민식pd 2012.05.07 07: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인생이 뭐 다 그렇죠, 뜻대로 되는 건 없지만, 그런대로 살다보면 또 살아지는 게 인생이거든요. 참 어린 나이에 많은 경험을 하는 원경님, 참 기대되는 청춘입니다! ^^

  6. 2012.05.06 17: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김민식pd 2012.05.07 07: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비오님 글을 보면 야합하시는 분은 아닌걸요? ^^ 자신의 글을 세상에 내어놓는 사람은 '난 이렇게 살 거야! 난 이렇게 생각한다!' 라고 자신을 내놓고 주장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글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하니 야합은 힘들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