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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죽음이 삶에게 가르쳐준 것들

by 김민식pd 2022. 5. 6.

(꼬꼬독 원고를 공유합니다.)


제 여성 지인 한 분이 앉아서 오래 일하다 어깨 통증이 심해 마사지를 받으러 갔는데요. 어깨 근육을 풀려면 뭉친 가슴 근육도 풀어야 한다며 가슴을 구석구석 마사지해주시던 분이 그럽니다. “왼쪽 가슴에 혹이 만져져요. 병원 한번 가보세요.” 40대의 나이에 병원에서 유방암 진단을 받고 많이 놀랍니다. 2017년 기준, 기대수명(83세)까지 살 경우 우리나라 국민이 암에 걸릴 확률은 35.5%이랍니다. 생각보다 높네요.
암 판정을 받은 그분은 가장 먼저 서점으로 달려갔어요. 어떤 경험을 할 때마다 그와 관련된 책들을 구매해 관련 정보를 먼저 섭렵하는 습관이 있다고요. 저 역시 살다가 괴로움을 겪으면 책을 찾습니다. ‘나보다 먼저 이 시련을 겪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가 고난의 해법을 찾았다면 그는 책에 글로써 자신이 찾은 답을 남겼을 것이다.’ 
광화문의 한 대형서점에서 ‘유방암’을 검색어로 넣어 책을 찾고 암 관련 코너도 한참 둘러봤대요. 서울아산병원 유방암센터에서 펴낸 <유방암 환자를 위한 치료 안내서> 등 유방암 관련 책 4권을 사고요. 생존율 5%라는 말기 간암 진단을 받고도 기적적으로 암을 이겨낸 전 서울대병원장 한만청 박사가 쓴 <암과 싸우지 말고 친구가 돼라>도 샀어요. 그렇게 책을 읽고 자신의 암투병기를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분, 양선아 기자님이 제게 추천해준 책이 있어요.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 생의 남은 시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김범석 / 흐름출판>

저자 김범석 선생님은 종양내과 의사이십니다. 만나는 환자들은 대부분 4기 암 환자로 완치 목적이 아니라 생명 연장 목적의 항암치료를 받는 분들입니다. 종양내과 의사로 일하며 많은 환자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봤어요. 그들의 삶을 통해 지금의 우리를 돌아봅니다. 누군가의 삶과 죽음에 대한 기억이 다른 이의 삶에 작은 변화를 불러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김범석 선생님은 책을 쓰셨어요.

일흔 살의 노인 암 환자가 의사에게 묻습니다.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요?’ 6개월 이상 장기 생존은 어렵다고 솔직히 답해주셨답니다. 그 말을 담담히 들은 환자는 그냥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해요. 얼마나 가능할지 모르지만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고 떠나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후로 그는 정말 매주 하나씩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기 시작했다. 들어보면 거창한 일들은 아니었다. 아내와 바닷가로 여행 가서 해산물 요리 먹기, 종일 바다 보기, 좋아하는 노래를 모아 자식들에게 선물하기, 손주들에게 편지 쓰기, 고향 친구들에게 밥 사 주기, 예전에 싸웠던 친구에게 연락하기 같은 일상적이면서도 소소한 일들이었다. 그는 매주 병원에 올 때마다 지난주에 자신이 했던 일을 소상히 늘어놓으며 즐거워했다. 진작에 이렇게 살았어야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고 사는 게 즐거워졌는데 얼마 남지 않아서 몹시 아쉽다는 이야기도 했다. 나는 그가 들려주는 별것 아니지만 특별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

그와 비슷한 연배의 또 다른 노인 환자가 있는데요. 그분은 자신의 기대여명을 듣고 10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의사로서 판단하기에 환자의 상태로는 그해 추석도 넘기기 힘들 것 같아요. 그런데 환자는 자꾸만 ‘10년 만 더’를 말합니다. 그래서 물어봅니다.

‘“10년 더 사시면 뭘 하고 싶으세요?”
“….”
침묵이 흘렀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더 살게 된다면 해보고 싶은 일 없나요?”
“….”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가고 싶다거나… 손주가 중학교 들어갈 때 교복 한 벌 해주고 싶다거나 아니면 고향에 한 번 다녀와야겠다… 뭐 그런 거요.”
“….”
여러 번의 질문에도 끝내 그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는 막연히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있었을 뿐 구체적인 계획이나 소망 같은 게 없는 것 같았다.’

의사로서 환자의 여명을 더 늘려줄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저자는 환자에게 남은 시간을 알려드리고, 그 시간을 잘 채워가길 소망합니다. 대단한 것이 아니라도 일상에서 사소한 기쁨을 찾으며 그 시간을 보내셨으면 한다고요. 환자들에게 하고 싶은 일 열 가지만 생각해오라고 숙제를 내주신답니다. 하루에 한 번 웃을 일 만들기, 핸드폰 사진 매일 찍기, 일주일에 세 번 산책하기, 자식들에게 하루에 한 통 문자 메시지 보내기, 아내에게 매일 고맙다고 말하기, 이런 소소한 것이면 충분하다고요. 그 환자분은 다음 외래에도 빈손으로 왔고요. 끝내 마지막에 주어진 질문에 대한 답은 빈칸으로 남겨둔 채 추석을 넘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고요.

“자, 당신의 남은 날은 ○○(땡땡)일입니다. 이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시겠습니까?”
오늘이 만약 내 삶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종양내과 전문의인 저자는 환자의 고통과 환자 가족의 어려움을 헤아리며 진료를 하고 상담을 하십니다. 그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는데요. 아픈 사람을 매일 만나는 사람이 타인의 아픔에 계속 공감하며 산다는 게 쉽지는 않거든요. 저자에게는 특별한 사연이 있어요. 저자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셨어요. 

26년 전 아버지는 지천명, 즉 쉰 살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셨어요. 입원, 치료, 수술, 요양, 재입원을 반복하시며 고통으로 얼룩진 생을 마치셨다고요. 지금은 폐암이라고 해도 항암치료 방법이 다양하지만 그때만 해도 약도 별로 없고 이렇다 할 치료법도 없었습니다. 결국 수술 받으신 지 2년 만에 암이 재발해 변변한 치료도 못 받으신 채 허무하게 떠나셨는데요. 그 시절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의 환자들을 보면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저자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담당 의사가 아버지에게 병원에서는 더 해 줄 것이 없으니 집에 가서 맛있는 것이나 먹고 요양이나 잘하라고 했어요. 그즈음 어머니가 집으로 웬 이상한 아주머니를 불러들여요. 색동 한복 차림에 진한 눈썹 문신을 하고 있었는데요. 무속인인 그분이 누워 계신 아버지를 진맥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그래요. “폐에 암도 없는데 멀쩡한 폐를 괜히 떼어냈네!” 그 자리에 없는 의사들에게 욕을 퍼부어요. 간과 콩팥이 더 문제라 간을 보호하는 뜸을 놓아야 한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아버지는 말없이 당신의 몸을 그 아주머니에게 내맡기셨고요. 아주머니는 곧 아버지 배 위에 뜸 봉을 올려놓고 불을 피웁니다. 집 안에는 쑥 냄새가 진동하지요.

‘그때였다. 안방 문을 빼꼼히 열고 구경하던 나와 아버지의 눈이 마주쳤다. 아버지는 배를 드러내고 누운 채 나를 향해 씽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승리의 V자를 만들어 보이셨다.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상한 차림의 아주머니와 희게 드러난 아버지의 배, 그 위에서 소리 없이 타 들어가는 뜸과 진동하는 쑥 냄새…. 그 광경은 몹시도 낯설고 기묘한 것이었는데 아버지의 미소와 승리의 V가 나를 번쩍 정신 차리게 했다. 그 순간의 웃음은 일종의 안도감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 시기에 저자의 아버지는 몹시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셨어요. 자식들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이기 싫다며 폐암이라는 병명조차 숨겼던 분이 마지막 순간에는 고등학생 아들 앞에서 너무 아파 힘들어 무너지는 모습도 보이셨어요. 그러나 지금에 와 저자가 아버지를 기억에 떠올리면 암으로 고통스러워하시던 모습보다 그날 배 위에 뜸 봉을 올려둔 채 웃으시며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드시던 모습이 더 생생하게 떠오른다고요.

‘아버지는 알고 계셨을까? 그 순간의 그 미소가, 그 손짓이 아들이 살아가는 내내 힘이 되어주리라는 것을. 그날의 아버지가 떠오를 때면 문득 내 목숨은 내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암과 맞서 싸우는 오늘의 내 모습이 내일의 가족들에게는 살아가는 힘이 될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은 이해할 수 없어도 언젠가는 오늘의 나를 가족들이 이해해줄 날이 반드시 온다. 내가 이만큼의 시간이 흘러서야 그때의 아버지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듯이.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구나 싶다. 비록 인간의 생이란 유한하기에 언젠가는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지만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주어진 남은 날들을 조금 다르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종종 이 질문이 암이라는 병이 우리에게 주는 숙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종양내과 의사로서 저자가 목격한 삶의 마지막 모습은 때로는 정리되지 않은 돈이나 사람인데요. 고인이 정리하지 못한 관계들이 남아 있는 이들을 괴롭히는 경우도 많다고요. 그래서 저자의 습관 중 하나는 평소에 정리를 잘 하는 것이랍니다. 나의 흔적들을, 나의 관계들을, 나의 많은 것들을 오늘 집을 나서면 다시는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살핀다고요.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여기고 지금의 내 흔적이 내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덜 어지르게 되고, 더 치우게 된다고 합니다.

죽음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고민이 계속 이어집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언젠가 나도 다다를 그 곳. 어떤 모습으로 나는 죽음을 맞이해야 할까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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