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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이불킥할 때, 권장도서

by 김민식pd 2021. 12. 1.

지난 1년 동안, 저의 독서 친구는 중학교 2학년인 둘째 딸 민서였어요. 아이의 책 읽는 습관을 기르기 위해 제가 하는 일. 제가 읽은 책을 아이에게 권해주는 대신, 아이가 읽은 책을 제가 따라 읽습니다. 독서의 즐거움을 아이와 함께 나누는 좋은 방법이지요. 민서가 먼저 읽고 재밌다고 제게 권해준 책이 있어요.

<인간의 흑역사> (톰 필립스 지음 / 홍한결 옮김 / 윌북)

'난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바보인줄 알았거든? 그런데 더 한 바보들도 많더라고.' 책을 보니 인간의 바보짓 플레이가 릴레이처럼 나옵니다. 그 첫번째 사례. 

'9세기 북유럽의 장수였던 '천하장사 시구르드'는 적장 '뻐드렁니 마엘 브릭테'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고 의기양양하게 귀환했다. 

그러나 마엘 브릭테의 뻐드렁니가 말 타고 달리던 시구르드의 다리를 계속 긁었고, 그 상처의 감염으로 시구르드는 며칠 만에 죽고 만다.

천하장사 시구르드는 자기가 이미 죽인 적에 의해 죽임을 당한 불명예스런 주인공으로 전쟁사에 길이 남았다.'

(12쪽)  

인간은 멍청한 짓을 반복합니다. 애초에 진화라는 과정이 영리함과는 거리가 멀어요. 먹을 것과 짝짓기에 굶주린 개체들을 인정사정없는 세상에 무진장 많이 풀어놓고 누가 제일 덜 망하나 보는 것이 진화랍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우리 뇌는 자기 오류를 깨닫는 것을 아주 싫어한답니다. '확증 편향'으로 자기 믿음에 부합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취하고 다른 정보는 외면하니 그럴 수 밖에 없다고요.

대항해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릴 무렵, 유럽과 아시아간의 해상 교역로를 찾기 위해 배를 타고 떠난 콜럼버스는 인도를 간다는 게, 실수로 카리브 제도에 도착하게 됩니다. 배를 띄울 때, 콜럼버스는 2개의 계산을 하는데요. 하나가 지구의 크기요, 또 하나가 아시아의 크기입니다. 일단 그는 아시아가 실제보다 훨씬 길다고 계산했고요. 그래서 미대륙이 아시아의 일부인 줄... 지구 둘레의 계산에 9세기 페르시아 천문학자 알파르가니의 연구를 참고했는데요.

'콜럼버스의 가장 큰 실수는 알파르가니가 언급한 '마일'이 당연히 로마 마일 (약 1,500미터)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알파르가니가 언급한 거리들은 아랍 마일 (약2,000~2,100미터)이었다. 즉, 알파르가니가 언급한 거리들은 콜럼버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길었다.'

(157쪽)

유럽 중심적인 사고에 젖어 세상의 크기를 실제의 4분의 3으로 착각한 콜럼버스. 항해 일정을 실제 필요한 일정보다 훨씬 짧게 잡고 그에 맞추어 식량과 물자를 준비했어요. 주위에서 하나같이 '자네, 세상 크기를 잘못 안 것 같은데'하며 의문을 표했지만 콜럼버스는 자기 계산을 꿋꿋이 믿었다고요. 바다를 건너가는 도중에 신대륙을 만나지 못했다면 망망대해에서 굶어죽을 뻔 한 거죠. 콜럼버스의 실수로 유럽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요. 그렇게 시작된 식민제국주의 역시 인간의 흑역사 중 하나입니다. 아메리카가 식민화된 후 약 100년간, 인구의 90퍼센트가 질병, 폭력, 강제 노동으로 죽었다고 하니까요. 그런 악행을 저지르면서 어떻게 유럽 제국은 뻔뻔하게 돈을 벌 수 있었을까요?

   
'우리 인간은 그럴듯한 스토리와 망상을 동원하여, 자신이 실제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자신을 속이는 지집요한 본능이 있다. 제국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 현재를 신화화하고 그 과거를 윤색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을 들여야 하는 작업이다.'

(164쪽)

역사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에 개그 퍼레이드가 이어지는 독특한 책인데요. 시니컬한 저자의 글맛을 살린 번역이 참 좋았어요. 번역자 홍한결이라는 이름을 기억해두려고요.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나와 외대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하신 분. 쉽게 읽히고 오래 두고 보고 싶은 책을 만드는 게 번역가로서 소망인데요. <인간의 흑역사>가 딱 그래요.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지요. 잠자리에 누웠다가 낮에 한 실수가 떠올라 이불을 걷어차며 '내가 미쳤지. 왜 그랬을까?' 할 때가요. 그럴 땐 <인간의 흑역사>를 읽어보세요. '난 왜 이렇게 멍청할까?' 자학하고 싶을 때, 위로가 되는 책이어요. 역사 속 위인들도 알고보니 실수투성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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