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챠의 브런치에 기고한 글입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노력 중독자다. 어쩌면 자기착취에 길들여진 사람인지도 모른다. 20대에 공대를 나와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던 나는 퇴근하면 외국어학원에서 영어공부를 했다. 7시에 시작한 학원 수업이 9시에 끝나면 집 앞 도서관에 가서 12시까지 그날의 공부를 되새겼다. 아침 6시에 일어나면 회사 옆 수영장으로 가서 7시부터 운동을 하고 8시 반에 출근했다. 매일 양복차림에 넥타이를 매고 나타나는 내게 어느 날 학원 선생님이 물으셨다. “김민식 씨, 혹시 통역대학원 입학시험 볼 생각은 없어요?” 마침 직장 내 괴롭힘으로 퇴사를 고민하던 시절이라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6개월 동안 하루 15시간씩 영어를 공부해서 그해 외대 통역대학원 입시에 합격했다.


하루 24시간을 알차게 활용하는 게 오랜 습관이다. 아침 5시에 일어나 글을 쓰고, 출근길 전철에서는 책을 읽고, 저녁에는 주3회 탁구 레슨을 받고 주말에는 도서관 저자 강연을 찾아 다닌다. 드라마 피디, 자기계발서 저자, 유튜버, 블로거, 강연자 등 다양한 직함을 가지고 끊임없이 나 자신을 몰아붙이며 산다.

그러다 올해 초, 코로나가 터졌다. 탁구 교실을 운영하던 구립문화센터가 무기한 휴관에 들어갔고, 책 원고 작업을 하던 동네 도서관 열람실이 문을 닫았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고, 강의를 듣거나 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바쁘게 반복하던 일상이 멈춰서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 찾아왔다. 

예전에도 그런 날들이 있었다. 회사에서 유배지 발령을 받아 할 일이 없을 때, 나는 훌쩍 여행을 떠났다. 내 비록 노력중독자지만, 그나마 소진되지 않고 지금까지 버틴 건 여행 덕분이다. 나는 자신을 소진하는 대신, 매년 연차를 소진한다. 해마다 한 달씩 휴가를 내어 남미 배낭여행, 네팔 트레킹 등을 다닌다. 1992년 대학 4학년 여름 방학 때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 지금까지 28년 동안 한 해도 빼놓지 않고 매년 해외여행을 다녔다. 그런데, 그 기록이 올해 깨지게 생겼다. 코로나 탓이다. 열심히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휴식을 찾아 훌쩍 떠날 수도 없는 이상한 시대가 와버렸다.

문제가 생길 때, 나는 책을 찾는다. 예전에 누군가 이런 문제를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이 찾은 답을 책에 남겼을 것이다. 그렇게 찾아 읽은 책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권리> (정희재 / 갤리온)다. 책의 첫머리에서 일본 영화 <안경> 이야기가 나온다. 예전에 본 영화지만, 기억에 남은 건 별로 없다. 한 중년 여성이 휴대전화도 잘 터지지 않는 외딴 섬을 찾아간다. 손바닥만 한 간판을 달고 영업하는 민박집 주인은 이렇게 말한다. “큰 간판을 내걸면 손님이 잔뜩 올 테니 이 정도가 딱 좋다”고. 관광을 하고 싶으니 섬에서 구경할 만한 곳을 소개해달라고 하자 주인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관광이요? 여기 관광할 만한 곳은 없는데요.”

“그럼 여기 놀러 오는 사람들은 도대체 뭘 하나요?”

주인이 고심 끝에 대답한다.

“음....... 사색?”

영화 <안경>을 보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아, 매순간 무언가를 해야 하는 건 아니구나. 게다가 휴식을 위해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 것도 아니구나.’ 일본 가고시마의 요론 섬까지 날아갈 것도 없다. 그냥 노트북을 열면, 화면 가득 남국의 풍광이 펼쳐진다.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따라가느라 긴장할 필요도 없다. 영화 내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살다보면 이런 날도 온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날. 그런 날이면 <안경>을 본다.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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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리랑 2020.09.15 06: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쩌면 안경도 필요없는 휴식...
    매년 한달씩 쉼표, 정말 잘 사셨네요~♡
    왜 노력중독자 되셨을까요? 답은 책에 있겠죠ㅎㅎ

  2. 최수정 2020.09.15 08: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이영화 인상깊게 봤었거든요. 요즘 같은 시대에 딱 맞는 영화 같아요. 그래도 전 피디님의 그런 열정적인 모습이 참 존경스럽고 저도 하루하루 시간을 알차게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3. 오달자 2020.09.15 08: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것도하지않을권리>

    지금까지 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생각하기에. .,
    '뭐야~~아무 생각 없이 사는 거 아냐?'
    '삶을 저렇게 허비해도 되는 거야?'
    라는 질책을 받을까봐 뭐라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가지는 분위기에 살고 있었던거 같아요.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는 있을텐데 말이죠~
    지금 이 순간 책 제목이 딱 와닿습니다.

  4. 바람향기 2020.09.15 09: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것도 안할 권리...
    저는 주말에 이 권리를 자주 이용합니다~~그래서 가족들 각자가 요리를 해 주곤 합니다.
    오늘은 날씨 탓하며 직장으로 가지 않고 가을스런 날씨를 그저 즐기고 싶더군요.
    그럼에도 주말 찬스를 이용하려고 꾹 참고 달려왔습니다.
    앞으로 날씨의 유혹에 자주 시달리겠지만 피디님은 저의 정신적 에너지원이라 든든합니다.
    너무나 열심히 살아온 님들이라 지금은 아무것도 안할 권리를 누릴 자격이 충분합니다.
    오늘도 감사하는 하루 보냅니다^^

  5. 꿈트리숲 2020.09.15 09: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력중독자, 저를 두고 하는 말씀 같아서
    뜨끔했습니다. 이거저것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하자니 바쁘게 살아야만 가능하더라구요.
    그러다 번아웃 되면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보내고요. 그 시간이 좀 되면 다시 저를
    몰아붙입니다.

    아무것도 안 할 권리는 해야만 하는 일,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하는 일에 써야할 권리인 거겠죠?
    정말 아무것도 안 한다고 하면 병원에 누워있는
    상상이 됩니다(저의 경험) ㅎㅎ

    등 떠밀린 쉼이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들로 채운
    자유시간을 누리고 싶습니다.^^

  6. GOODPOST 2020.09.15 09: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pd님은 노력 중독자 맞습니다. 인정합니다.
    그런분을 매일 블러그에서 만나기에 우리는 행운아입니다.

    아무 것도 할수 없을때 pd님이 소개해준 책을 봅니다.
    전자책은 눈이 아플꺼라는 선입견에 안보았는데
    소개해준 책(폐후의 귀환)을 읽고 있는데 너무 재미있어 요즘은 너무 바쁩니다.
    새로운 문명을 발견한 느낌이랄까요?
    모두 pd님의 덕분입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7. 아리아리짱 2020.09.15 10: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 피디님 아리아리!

    아무것도 안 할 권리!

    저도 은근 슬쩍 노력 중독자인데
    그러다 몸살기를 느낄 때면
    모든것 정지 시키고 잠수타듯 휴식을 취합니다.

    이런 브레이크 장치가 없었으면
    아마 지금쯤 날개를 달고 날라다녔을 듯요!

    약한 체력이 원망스러웠는데 이제는 이것도 안고 함께 갑니다.
    약한 체력덕에 발을 땅에 딛고 살아가니까요. ㅋㅋ

    가끔은 진공상태로 쉬는 것에도 더이상 죄책감 느끼지 않는 답니다.

  8. 파푸리카(papu) 2020.09.15 12: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개월동안 15시간씩 영어공부.....
    지금 인강으로 토익공부를 하고있는데요
    집에서 하니 한시간도 앉아있기 힘들더라구요
    냉장고를 열고 누워있고싶고 ... 방해거리가 많아서요
    피디님의 글을 보고 다시 자극받았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감사합니다

  9. 새벽부터 횡설수설 2020.09.15 12: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께서 그렇게 자기 자신을 몰아부치지 않고 살아왔으면 <안경>이란 영화를 보며 여유란 걸 느꼈을까생각해요.. 더 나은 존엄한 삶을 위하여 저도 저 자신을 더욱 발전시킬 것입니다.^^

  10. 달빛마리 2020.09.15 15: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에게 딱 필요한 영화같아요. ‘노력 중독자’란 단어가 왜 이렇게 와 닿을까요? 일 중독, 공부 중독, 운동 중독 이런것들은 어쩌면 열등감에서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성취감과 열등감은 어쩜 동일선상에 존재하는 개념이 아닐까 싶고요.

    바삐 가다가 가만히 서서 도대체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이유를 생각해 보고 영혼을 가다듬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특히나 요즘 그래요.

    • sara_yun 2020.09.21 10: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열등감 이라는 단어에 동의해요 달빛마리님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기분인 것 같아요 더군다나 내가 쉬거나 놀때 내 주변인들이 열심히하면 마음이 불안해서 더 공부하는 것 같아요

      저도 계속 비교하는 제가 싫은데 털어내 버리는 게 마음대로 안되더라구요

  11. 섭섭이짱 2020.09.16 09: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안경 제목이 어떤걸 의미하는지 궁금한데요
    인생에 쉼은 필요한거 같아요.
    지금은 반강제이지만서도요.

    추천 영화 찾아볼께요~~~
    감사합니다

  12. 봄처녀 2020.09.17 09: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로나로 이상한? 시간은 많아졌는데 말씀대로 쉬는것도 아니고 일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라도 편히 쉬고 싶습니다~~^^

  13. 슬아맘 2020.09.25 19: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용히 안경을 봐야겠네요.
    아무것도 안할 권리를 제 자신에게 선물하면서
    마음을 다스려 보아야 겠습니다.
    항상 불안 초초했는데 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