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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날라리 영화 감상문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by 김민식pd 2020. 9. 15.

(왓챠의 브런치에 기고한 글입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노력 중독자다. 어쩌면 자기착취에 길들여진 사람인지도 모른다. 20대에 공대를 나와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던 나는 퇴근하면 외국어학원에서 영어공부를 했다. 7시에 시작한 학원 수업이 9시에 끝나면 집 앞 도서관에 가서 12시까지 그날의 공부를 되새겼다. 아침 6시에 일어나면 회사 옆 수영장으로 가서 7시부터 운동을 하고 8시 반에 출근했다. 매일 양복차림에 넥타이를 매고 나타나는 내게 어느 날 학원 선생님이 물으셨다. “김민식 씨, 혹시 통역대학원 입학시험 볼 생각은 없어요?” 마침 직장 내 괴롭힘으로 퇴사를 고민하던 시절이라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6개월 동안 하루 15시간씩 영어를 공부해서 그해 외대 통역대학원 입시에 합격했다.


하루 24시간을 알차게 활용하는 게 오랜 습관이다. 아침 5시에 일어나 글을 쓰고, 출근길 전철에서는 책을 읽고, 저녁에는 주3회 탁구 레슨을 받고 주말에는 도서관 저자 강연을 찾아 다닌다. 드라마 피디, 자기계발서 저자, 유튜버, 블로거, 강연자 등 다양한 직함을 가지고 끊임없이 나 자신을 몰아붙이며 산다.

그러다 올해 초, 코로나가 터졌다. 탁구 교실을 운영하던 구립문화센터가 무기한 휴관에 들어갔고, 책 원고 작업을 하던 동네 도서관 열람실이 문을 닫았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고, 강의를 듣거나 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바쁘게 반복하던 일상이 멈춰서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 찾아왔다. 

예전에도 그런 날들이 있었다. 회사에서 유배지 발령을 받아 할 일이 없을 때, 나는 훌쩍 여행을 떠났다. 내 비록 노력중독자지만, 그나마 소진되지 않고 지금까지 버틴 건 여행 덕분이다. 나는 자신을 소진하는 대신, 매년 연차를 소진한다. 해마다 한 달씩 휴가를 내어 남미 배낭여행, 네팔 트레킹 등을 다닌다. 1992년 대학 4학년 여름 방학 때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 지금까지 28년 동안 한 해도 빼놓지 않고 매년 해외여행을 다녔다. 그런데, 그 기록이 올해 깨지게 생겼다. 코로나 탓이다. 열심히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휴식을 찾아 훌쩍 떠날 수도 없는 이상한 시대가 와버렸다.

문제가 생길 때, 나는 책을 찾는다. 예전에 누군가 이런 문제를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이 찾은 답을 책에 남겼을 것이다. 그렇게 찾아 읽은 책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권리> (정희재 / 갤리온)다. 책의 첫머리에서 일본 영화 <안경> 이야기가 나온다. 예전에 본 영화지만, 기억에 남은 건 별로 없다. 한 중년 여성이 휴대전화도 잘 터지지 않는 외딴 섬을 찾아간다. 손바닥만 한 간판을 달고 영업하는 민박집 주인은 이렇게 말한다. “큰 간판을 내걸면 손님이 잔뜩 올 테니 이 정도가 딱 좋다”고. 관광을 하고 싶으니 섬에서 구경할 만한 곳을 소개해달라고 하자 주인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관광이요? 여기 관광할 만한 곳은 없는데요.”

“그럼 여기 놀러 오는 사람들은 도대체 뭘 하나요?”

주인이 고심 끝에 대답한다.

“음....... 사색?”

영화 <안경>을 보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아, 매순간 무언가를 해야 하는 건 아니구나. 게다가 휴식을 위해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 것도 아니구나.’ 일본 가고시마의 요론 섬까지 날아갈 것도 없다. 그냥 노트북을 열면, 화면 가득 남국의 풍광이 펼쳐진다.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따라가느라 긴장할 필요도 없다. 영화 내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살다보면 이런 날도 온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날. 그런 날이면 <안경>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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