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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2017 MBC 파업일지

꿈은 이루어진다

by 김민식pd 2020. 5. 12.

(오늘자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나는 여행광이다. 대학 졸업반이던 1992년에 처음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 30년 가까이 매년 해외여행을 다녔다. 인도 네팔 배낭여행, 탄자니아 세렝게티 사파리, 남미 파타고니아 트레킹까지, 해마다 연차를 소진하며 여행을 다니는 게 삶의 낙이다. 여권을 갱신하러 구청에 갔더니 접수처 직원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신원조회에서 걸리는데요?” 영문을 몰라 경찰서에 문의해보니, 대법원 재판에 계류된 상태라 여권 발급이 불가하다고 했다.

2012년 문화방송 파업 때, 노조부위원장으로 일하던 나를 검찰은 업무방해죄로 기소했다. 재판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검사님은 제가 불법 폭력 파업을 선동하는 종북좌파라고 주장하지만, 저는 자유민주주의자입니다. 언론사 직원인 내게 가장 소중한 자유는 언론의 자유고, 공영방송사의 주인은 국민이라고 믿습니다.” 시청자들의 알 권리를 침해한 낙하산 사장에게 항의했다는 이유로 검찰은 내게 징역 2년형을 구형했다.

2014년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은 무죄를 판결했다. 문화방송 파업은 언론의 자율성을 지키고 방송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는 언론사 구성원들의 기본적인 책무와 관련이 깊고, 그 의무를 지키기 위한 파업은 업무방해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될 경우 방송 독립을 지키는 노력에 있어 새로운 판례가 확립될 것이다.

이제 나는 여권이 없어 출국도 못한다. 사회적 관계망에 올라오는 해외여행 사진을 볼 때마다 배가 아팠다. ‘제발 내 눈에 여행 사진 좀 안 보였으면 소원이 없겠네!’했더니 갑자기 코로나가 터졌다. 이제 누구도 당분간 해외여행을 다니기 힘들게 되었다. 꿈은 이루어진다. 이상한 방식으로.

드라마 피디로 일할 때는 새벽 3시에 촬영을 마치고 집에 왔다가 아침 6시에 일어나 다시 나가는 통에 아이들과 놀 수가 없었다. 드라마를 마치면 휴가가 나오는데 그때는 아이들이 너무 바빠 시간이 없었다. 밤 10시가 넘도록 학원 앞에서 기다렸다가 파김치가 된 아이를 데려올 때 이런 생각을 했다. ‘애들과 하루 종일 집에서 붙어 지내면 원이 없겠네!’ 이제 코로나 때문에 재택근무에 온라인 수업에, 온 식구가 집안에 갇혀 지낸다. 꿈은 이루어진다. 이상한 방식으로. 

매년 여행을 다니던 시절에는 그게 행복인줄 몰랐다. 살아보니 좋은 시절은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요즘은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이렇게 마음을 고쳐먹는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먼 훗날에는 그리워질지 몰라. 기왕에 아이들과 함께 지낸다면 순간순간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겨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코로나19의 종식이 더 빠를까, 2012년 검찰이 시작한 소송의 마무리가 더 빠를까? 대법원 판사들이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건 잘 알고 있다. 업무의 효율을 높이는 방법 한 가지를 알려드릴까 한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믿고 맡기는 것이다. 국민배심원단, 1심 법관, 그리고 고등법원 판사들까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이들이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 문화방송의 2012년 파업은 무죄라는 것이다. 그 판단을 믿고 존중하면 된다.

이명박 정부 시절, 숱한 해고자가 나오고 백여 명이 징계를 받으면서도 문화방송 노조원들은 170일 동안 싸웠다. 언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에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모두가 권력의 눈치를 살피던 그 엄혹한 시절에 법관들이 언론노조 조합원들의 손을 들어주는 용기 있는 판결을 내렸다. 많은 이들이 고난의 시간을 보내며 귀한 승리를 일구어냈다.

나와 함께 노동조합 집행부로 일했던 이용마 기자는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다 끝내 피고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용마의 꿈은 언론의 공정성을 지키는 노동조합의 의무를 인정받는 것이었다. 언젠가 좋은 소식이 들려오면 그의 영전에 찾아가 꽃 한 송이 바치고 싶다. 이용마의 꿈은 이루어진다. 온당한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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