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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날라리 영화 감상문

바이러스로부터 나를 지키고 싶을 때

by 김민식pd 2020. 4. 8.

(왓챠의 브런치에 기고한 글입니다.)

영국은 자존심이 강한 나라다. 미국이 잘나봤자 영국의 식민지였다. 독일과 프랑스를 히틀러로부터 구한 게 영국이다. 셰익스피어와 비틀즈, 그리고 해리 포터를 만든 나라다. 2016년, 콧대 높은 영국의 자존심이 무너졌다. 그해 6월, 브렉시트 국민 투표로 영국은 유럽 연합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했다. 금융 산업의 허브, 관광산업의 중심지, 세계적 문화 강국인 영국이 그냥 섬나라가 되겠다고? 그들의 자살골에 모두가 경악했을 때 영국을 구원한 건 미국이었다. 2016년 11월,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미국은 이제 멕시코와 미국 사이에 장벽을 쌓아야 할 참이다. 세상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자존심이 상했을 때, 영국인들은 블랙코미디를 만든다. 자학 개그가 곧 웃음의 원천이다. 우리만 그런 거 아니거든? 미국은 트럼프를 뽑았거든? 그리스도 곧 할 거거든? 유럽은 이민자 문제로 골치를 썩을 거거든? <블랙 미러>에서 본 건 SF였지? 우리는 다가올 미래를 다큐로 보여줄게. 그렇게 탄생한 드라마가 <이어즈 앤 이어즈>다.

2019년 영국, 한 가족이 둘러앉아 TV를 본다. 기업가 비비언 룩 (엠마 톰슨 분)이 시사 토크쇼에 나와 어그로를 끄는데, 가족들의 반응이 제각각이다. 셀레스트와 두 딸을 낳고 키우는 스티븐이 맏이다. 다니엘은 동성혼을 준비하고 있고, 인권활동가인 이디스는 해외에 나가 있다. 막내 로지는 임신 중인데, 아기가 태어나자 조카를 안고 다니엘이 하는 말.

“이젠 정부도 못 믿겠고, 은행도 못 믿겠다. 대기업은 우리를 알고리듬 취급하는데, 기후 변화와 대기 오염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어. 가짜 뉴스에 가짜 팩트, 뭐가 진짜인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이렇게 안 좋은데, 네가 살아갈 세상은 어떨까? 5년 후, 10년 후는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

다니엘의 독백에 대답하듯 시간이 흐른다. 새해를 맞이하는 불꽃놀이 위로 한 해 한 해 숫자가 넘어간다. 2021, 2022, 2023. 아기는 쑥쑥 자라고, 할머니의 생신을 기념하기 위해 온 가족이 모인다. 중국 근처 어딘가에 있다는 이디스와 화상 통화를 하는데, 갑자기 사이렌이 울린다. 세계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사이렌. 생일 폭죽을 터뜨리려는 찰나, 더 큰 게 터진다. 격변하는 세상이 라이온스 가족의 삶 역시 뒤흔든다.

제 4화를 보면, 네 명의 형제가 모여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몇 년 전, 나는 뉴스가 지루하다고 여겼어.”
“아, 좋은 시절이었지. 뉴스를 보면 하품이 나오던 시절.”
“이젠 뉴스로부터 숨어야 해. 눈을 가려야 한다고!”
“역사책에서 본 것 같아. 전염병이며, 돼지를 왕으로 뽑은 사람들. 모든 일들이 다시 일어나고 있어.”

드라마를 보면서 소름이 돋았다. 이건 현재인가, 미래인가? 저건 가상인가, 현실인가? 여기는 영국인가, 한국인가? 코로나의 시대, 국경 봉쇄를 주장하는 이도 있고, 자가 격리에서 답을 찾는 이도 있다. 바이러스와 싸울 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사회적 거리두기다. 영드 <이어즈 앤 이어즈> 시청을 통해 방역 전선에 참전해도 좋겠다. 집에 틀어박혀 홀로 덕질 하는 사람이 바이러스로부터 우리 사회를 지킬 것이다. 힘들 때일수록 즐거움의 힘으로 버텨야한다.

브렉시트로 영국의 자존심은 구겼지만, <이어즈 앤 이어즈>로 영국 드라마의 자존심은 지킨다. 닥터 후의 각본가가 BBC와 손잡고 만들었다. <셜록>에 열광하고 <블랙 미러>에 빠졌던 분이라면, 영드의 매력에 다시 한 번 빠져보시길. 영국 드라마가 처음이라면, 이곳이 영드의 최전선이다. 여기서부터 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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