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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세상이 알아주는 순간

by 김민식pd 2020. 1. 20.

드라마 피디로 일하며 많은 배우들과 작가를 만납니다. 세상에 알려진 이들보다,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이들이 더 많습니다. 세상이 알아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세상은 언제 사람을 알아볼까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노력과 운입니다.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걸 행운으로 만들어내는 이들은 평소 노력을 통해 재능을 만든 이들이거든요. 재능이 있다고 반드시 세상이 알아주는 건 아니지만, 준비가 되지 않은 이에게 기회가 오지는 않더라고요. 이른 나이에 만난 너무 좋은 기회는 때로 독이 되기도 합니다. 

'거장들에게도 '초짜 시절'이 있었을까. 화려한 액자에 감싸인 채, 불가사의한 아우라를 내뿜는 명화들을 보고 있자면 그리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왠지 그들은 날 때부터 천재여서, 크게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세상이 먼저 발견해 줬을 것만 같다.

하지만 거장들에게도 '첫걸음마' 하던 시절이 있었다. 의욕은 많은데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고, 이 길을 괜히 온 것 같아 무작정 도망가고 싶은, 그런 신인 시절이 있었다. 가능성만 가득 찬 떡잎이었던 시기, 그들은 긴 터널을 지나는 듯한 암담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발버둥쳤을까.' 

<화가의 출세작> (이유리 / 서해문집)

<화가의 마지막 그림>을 쓴 이유리 작가의 3년만의 신작입니다. 오랜 세월 기다려왔어요. 지난 책을 정말 좋아했거든요. 달리, 고흐, 밀레, 로댕, 백남준 등 익숙한 이름의 대가들이 출세작을 만들게 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목차를 보고 자신이 좋아하는 아티스트부터 찾아읽어도 좋아요. (저는 순서대로 읽었어요. 어차피 이유리 작가님 글은 하나도 버릴 게 없으니까요. ^^) 알폰스 무하라는 이름의 생소한 화가가 책의 첫 꼭지를 차지한 걸 보고 의아했어요. 좀더 대중적인 작가의 이야기로 시작하시지 않고? 책을 읽고 깨달았어요. 탁월한 선택이구나!  

1894년 파리의 크리스마스, 모두가 가족들과 연휴를 보내는데, 외롭게 혼자 연말을 보내는 이가 있어요. 체코에서 온 유학생 알폰스 무하. 순수회화를 배우려고 프랑스까지 유학을 왔는데, 공부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이름도 알리지 못하고, 근근이 버티고 있어요. 그때 친구가 부탁을 해요. 교정쇄를 보러 인쇄소에 가야 하는데, 크리스마스 연휴라 갈 수가 없으니 대신 가서 봐달라고. 그렇게 알폰스 무하는 성탄절을 인쇄소에서 친구의 일을 대신하며 보냅니다. 

그때 인쇄소 매니저인 브루노프가 다급하게 들어와요. 하필 성탄전야에 중요한 고객 (당대 최고의 배우, 사라 베르나르)에게 퇴짜를 맞은 겁니다. 인쇄소에서 만든 새 연극 포스터가 마음에 안 든다고요. 당시 인쇄소는 디자인 사무소의 역할도 같이 했는데요. 인쇄소 소속 아티스트들이 다 크리스마스 휴가로 자리를 비웠어요. 본인도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들과 당장 휴가를 떠나야하는데, 어떻게 하나, 발을 동동거리던 브루노프의 눈에 무하의 모습이 들어오지요. 다짜고짜 가서 물어봅니다. "혹시 석판화 작업을 해본 적이 있나?" 

무하는 망설이지 않아요. '해 본 적은 없지만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지요. 브루노프는 바로 <지스몬다> 포스터 작업을 무하에게 맡기고 휴가를 떠납니다. 신출내기인 무하를 신뢰했다기 보다,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겠죠. 무하는 리허설을 하고 있는 극장에 달려갑니다. 정장 한 벌도 없었기에, 급하게 연미복을 빌려 작업복 바지 위에 대충 걸치고요. 공연 리허설을 보며 열심히 작업을 합니다.

'마침내 12월 30일, 휴가에서 돌아온 브루노프는 무하가 완성한 포스터를 볼 수 있었다. 그의 손엔 세로가 어마어마하게 긴 포스터가 쥐어져 있었다. 무하는 무려 '실물 크기'로 포스터를 제작했던 것이다. 브루노프는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는 걸 느꼈다. 평소에 제작하던 포스터와 비교해 규격과 그림 스타일이 완전히 딴판인 희한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시 제작할 수도 없었다. 차마 빈손으로 베르나르(당대 최고의 배우이자, 인쇄소의 중요 고객)를 만날 용기가 없었던 브루노프는 울며 겨자 먹기로 무하의 포스터를 들고 베르나르를 찾아갔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베르나르는 당장 그와 계약을 맺고 다른 작품도 맡기고 싶어 할 정도로, 무하가 그린 포스터를 마음에 들어 했다.'

(16쪽)

 

왼쪽이 <지스몬다>인데요. 책에서 이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이게 화가가 생전 처음 그린 석판화라고? 당시 베르나르는 세계적 연극 배우였고요. 월드 스타의 눈을 사로잡은 알폰스 무하는 이제 세계적 아티스트가 됩니다. 무하의 출세작에는 몇가지 운이 작용했어요.

1. 성탄절 연휴에 친구 대신 인쇄소에 간 거죠. 무하의 친절한 마음이 첫번째.

2. 사람이 없어 급한 매니저의 부탁에 해보겠다고 한 거죠. 무하의 용기가 두번째.

3. 판화작업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지만, 자신만의 방식대로 시도한 거죠. 무하의 도전 정신이 세번째.    

4. 당혹스런 결과물이지만, 고객과의 약속을 펑크낼 순 없어 그냥 들고간 거죠. 브루노프의 서비스 마인드가 네번째.

5. 낯선 형식이지만, 나같은 월드 스타의 신작 포스터라면 대중들도 좋아할 거야. 배우의 자신감이 다섯번째.

여러 요소가 겹쳐 신인이 탄생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건, 무하의 용기와 도전정신입니다. 용기는 어디서 나오느냐, 자신감에서 나와요. '나는 그동안 숱한 그림을 그려 왔어. 비록 아직까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지는 못했지만, 나는 준비된 화가야.' 자신의 연습량이 용기를 줬을 것이고요. '어차피 저 사람도 급하게 부탁한 것이니, 마음껏 한번 해보자.'라고 도전한 마음이 도움이 되었죠. 

무하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어요.

'포스터는 더 많은 대중을 계몽하기에 좋은 수단이다. 일하러 가는 그들은 멈춰 서서 포스터를 보게 될 것이고, 정신적인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거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전시장이 될 것이다. 나는 예술을 위한 예술보다는 사람들을 위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기를 바란다.'

(22쪽)

자신의 작업에 의미를 부여하는 예술가, 그런 사람이 지치지 않고 창작열을 불태울 수 있습니다.

책에는 다양한 화가의 출세작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도 있어요. 헨리 다거 이야기, 무슨 '서프라이즈'의 주인공같아요. 평생 병원 잡역부로 살아왔는데, 죽고 나서 보니 수천 쪽의 원고와 수백 점의 그림을 남긴 예술가에요. 무조건 달리 보이기를 바랬던 살바도르 달리, 끝없이 점을 찍어 빛을 표현하려 했던 점묘법의 쇠라, '동양에서 온 도련님의 반자본주의 퍼포먼스' 백남준까지, 여러 예술가의 생애와 작품이 소개됩니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세기의 명작을 만든 대가들도 출세작을 내기 전에는 우리처럼 살았다고. 그들 역시 적당히 좌절도 해 가며, 불확실한 삶의 바다에 한 조각 돛단배를 띄우는 심정으로 작품을 내놓았다고 말이다.'

(6쪽)

제가 아는 대부분의 작가나 배우들도 그래요. 신인 시절도 힘들고, 이름을 얻은 후에도 불안은 계속됩니다. 그럼에도 우린 삶으로써 자신의 재능을 증명해야 해요. 궁극의 재능은 꾸준함이라고 생각해요. 놀라운 출세작을 낸 화가들은 이후에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합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거든요.

오늘도 꿈꾸는 모든 사람에게, 행운과 꾸준함이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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