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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여행예찬

여행광이 된 독서광

by 김민식pd 2019. 9. 30.

(<출판문화> 2019년 9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나는 심한 활자 중독이다. 술, 담배, 커피, 골프, 도박은 하지 않는다. 사는 재미를 어디서 찾느냐고 물어보면, 책만 읽어도 이렇게 즐거운데 다른 재미가 왜 필요하냐고 묻는다. 억지로 술을 권하는 사람을 만나면,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다고 말한다. 술 때문에 건강을 해쳐 책을 못 다 읽고 떠나면 한이 될 것 같다고. 그럼 술 먹는데 분위기 깬다고 다음부터는 부르지 않는다. 그렇게 책 읽을 시간을 또 확보한다.


어려서 사는 게 힘들었는데 마침 새로 생긴 동네 도서관에 개가식 열람실이 생겼다. 그 전에는 열람카드를 뒤져 책을 찾았는데, 개가식 열람실은 책벌레의 천국이었다. 책들이 빼곡하게 꽂힌 서가 사이를 걸어 다니며, 그 많은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했다. 

고등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던 내가 빠져든 책은 미국판 무협지 <디스트로이어>시리즈였다. 한국인 사부에게 무술을 배운 레모가 초인에 가까운 전투력을 갖게 되어 세계를 돌아다니며 미녀를 구하고 악당을 물리쳤다. 프레드릭 포사이드의 <자칼의 날>을 읽고 프로페셔널 킬러의 삶에 매료되기도 했고, 이언 플레밍의 007 시리즈를 탐독하기도 했다.

경상도 시골 소년인 내게, 책의 무대가 되는 유럽과 미국은 너무도 먼 나라였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고, 1992년 대학 졸업을 앞둔 마지막 여름방학에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소설의 무대가 된 풍경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될 줄 몰랐다. 런던에서는 테임즈 강변 옆에 있는 영국 정보부 건물을 찾아갔고, 베이커가 221 B 번지를 찾아 헤맸다. 파리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걸을 때는 눈앞에서 오스칼과 앙투아네트가 나오는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한 장면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활자 중독자는 여행 중독자가 되었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며 존 크라카우어의 <희박한 공기 속으로>를 읽고, 피렌체 두오모 성당 돌계단에 앉아 댄 브라운의 <인페르노>를 읽었다. 밤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안나푸르나 롯지에서는 전자책 뷰어를 읽고, 파타고니아 트레킹을 할 때는 오디오북을 듣고, 유럽 기차 여행을 할 때는 런던의 헌책방에서 산 페이퍼백을 읽었다. 책을 읽으면 가고 싶은 곳이 늘어났고, 여행을 간 적이 있는 도시가 책에 나올 때는 머릿속에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독서와 여행은 선순환 관계이고, 독서광과 여행광은 행복한 공생관계다. 

나는 스무 살에 집을 나와 살만해졌고, 스물일곱 살에 첫 직장을 그만두면서 행복해졌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내게 육체적 폭력을 가하며 “내 집에서 먹고 사는 놈이 내 말을 안 들어?”했고, 상사는 내게 정신적 폭력을 행사하면서 “남의 돈 벌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았냐?”고 했다. 20대에 나는 돈을 쓰지 않는 삶을 선택했다. 돈을 쓰지 않으면 돈 때문에 아버지 눈치를 볼 일도 없고, 돈을 벌기 위해 상사의 갑질을 견딜 이유가 없다. 술 담배 커피 당구 등 돈 들어가는 취미는 일절 멀리했다. 대신 도서관과 사랑에 빠졌다. 나만의 공간을 독점할 수 있는 좌석 점유권과 콘텐츠의 무제한 이용을 제공하면서 돈 한 푼 안 받는 곳은 오직 도서관 밖에 없다.

독서는 돈이 안 드는데, 여행은 돈이 든다. 돈 안 들이고 여행을 즐기는 방법은 없을까? 걸으면 된다. 어느 도시에 가든 나는 아침에 숙소를 나와 3시간을 걷는다. 시장에서 싼 현지 음식을 사 숙소에 가서 먹고 배부르면 낮잠을 잔다. 휴가 중 누리는 최고의 사치다. 오후 2시에 나와 다시 3시간을 걷는다. 역시 길거리 음식을 사 숙소에서 먹고 저녁에는 책을 읽다 잠이 든다. 여행지에서 오로지 걷기만 한다. 교통비가 안 들고, 유흥비도 안 들고, 가이드가 필요 없다. 도시에 대해 궁금한 건, 책으로 공부한다.

회사 생활을 하다 괴로운 시절이 있었다. 아내에게 말했다. “나도 코엘료처럼 산티아고에서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고 싶다. 사표내고 산티아고 다녀올게.” 아내가 조용히 한마디 했다. “죽을래?” <노후파산>이라는 책을 보니, 행복한 노후를 위해서는 가정의 평화가 중요하더라. 노후에 도서관에서 오래도록 독서를 즐기기 위해서는 집에서 쫓겨나면 안 된다. 마님의 노여움을 사지 않고, 걷기 여행을 즐길 방법은 없을까? 서울 둘레길을 발견했다. 북한산, 아차산, 관악산 등 서울 외곽의 산줄기를 타는 걷기 코스다. 

산티아고를 가려면, 사표를 쓰거나 휴가를 내야 한다. 서울 둘레길은 그냥 주말 반나절 걸으면 된다. 산티아고를 가려면 비행기 표를 사야 하는데, 서울 둘레길은 전철타고 간다. 산티아고는 숙소에서 묵지만, 둘레길은 집에서 잔다. 산티아고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지만, 둘레길은 맨몸으로 걷는다. 이 좋은 길을 두고 굳이 산티아고까지 갈 필요가 있나?

여행이 너무 좋아, 사람들에게 여행의 즐거움을 권하는 책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여행에 대한 책은 너무 많더라. 노후에 가장 즐거운 활동이 독서라 생각하기에 책읽기를 권하는 책을 쓰고 싶었다. 그 분야에도 고수가 너무 많더라. 책읽기나 여행의 즐거움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즐거움에 대해 쓰기로 했다. 영어 회화 공부의 즐거움에 대해 글을 썼다. 혼자 한 달씩 미국 자유여행을 다니는 나를 보고 50대 또래 친구들이 영어를 잘 하는 비결을 묻더라. 그 답으로 쓴 책이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퇴직 후 여행 작가가 되는 게 꿈이라고 하더라. 내게 책을 출판하는 방법에 대해 묻기에 또 책으로 답을 했다. <매일 아침 써봤니?> 7년간 매일 아침 블로그에 글을 올렸더니 어느 날 작가가 되어 있더라. 매일 영어 문장을 외우는 것도, 블로그에 글 한 편씩 쓰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다. 너무 힘든 것만 권하는 게 미안해서 가장 쉽고 재미난 여행을 권하기로 했다. 여행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쓴 책이 <내 모든 습관은 여행에서 만들어졌다>이다.

가고 싶은 곳이 아직도 너무 많고, 읽고 싶은 책이 아직도 많다. 힘든 시절, 책에서 만난 라틴어 글귀로 버텼다. ‘Dum spiro, spero.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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