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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멱살을 잡고 패대기칠 때

by 김민식pd 2019. 7. 19.
2014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땅콩회항 사건 이후, 삶이 바뀐 사람이 있어요. 박창진 사무장. '나쁜 짓 하지 않고 회사 일만 열심히 하면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깨져버린' 사람. 그가 쓴 책이 있어요.
 
<플라이 백> (박창진 / 메디치)  

대한항공 회장 일가의 갑질 경영이 연일 보도되던 시절, 저는 궁금했어요. 저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동안, 주위에 말리는 사람은 왜 없었을까? 2001년 대한항공에는 노조 설립 추진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노조를 만들려는 이들에게 투서가 날아들고, 회사는 이들을 배임과 횡령 혐의로 고발합니다. 2년이 지나지 않아 일곱 명의 동료가 해고되고, 어떤 이는 15층 건물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세상을 떠납니다. 이걸 본 직원들은 공포를 느끼고 입을 다물게 됩니다. 그 모든 일들은 노조 파괴 전문 회사 출신이 회사 노무부 간부로 활동하며 벌어진 일입니다.
 
그 노조 파괴 전문가가 바로 대한항공을 망친 주범입니다. 노조는 경영진과 함께 협업을 하는 파트너입니다. 이를 제거 대상으로 삼는다면 사내 조직 문화는 경직되고, 오너 가문에 대한 견제와 감시 기능은 사라집니다. 그곳에서 갑질 경영의 독초가 자라지요. 박창진 사무장은 책에서 당나라 학자인 위징의 이야기를 합니다. 황제 태종에게 서슴없이 직언을 하고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신하였대요. 

'위징의 직언을 늘 마음에 새기며 자신의 통치가 그릇된 길로 가지 않는지 늘 경계했던 태종은 위징이 죽자 크게 상심했다. "위징이 죽었으니 짐은 거울을 잃었다"고 통곡할 정도였다. 태종이 중국의 역대 황제들 가운데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게 된 데에는 분명 이런 열린 자세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처럼 나라의 지도자나 한 단체의 리더가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 잡아줄 수 있는 참모가 옆에 있어야 한다. 당장은 심기가 불편할지 몰라도 그들의 고언이 결과적으로 리더를 옳은 길로 이끌기 때문이다.'

(위의 책 51쪽)

감히 이 책을 경영자들의 필독서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처음 땅콩 회항이라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박창진 사무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살펴보았다면 이후의 참사는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전에 노조를 압살한 바 있는 경영진은 이번 일 또한 힘으로 해결하려 들지요. 그 결과 올바른 목소리를 내고도 박창진 사무장은 회사에서 고초를 겪게 됩니다.

사람들은 가끔 제게 묻습니다. '피디님은 힘든 시절을 어떻게 버티셨어요?' MBC는 공영방송이니까요. 개인의 사유재산이 아니라 공공재니까요. 제게는 언론노조 MBC지부라는 조직이 있고, 사랑하는 조합원들이 있으니까요. 우리는 2012년 170일 동안 파업을 하며 함께 싸운 동지니까요. 동지를 버리고 나갈 수는 없잖아요. 
대한항공처럼 사주가 있고, 제대로 된 노조가 없는 조직에서는 버티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박창진 사무장의 이야기가 참 놀랍습니다. 박창진 사무장이 퇴사를 고민할 때 주위 사람들이 말립니다. 박사무장의 형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인생을 살아보니 타의에 의해 일을 관두게 되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 마련이더라."
담당의도 회사를 관두는 걸 반대합니다.
"창진 씨, 피해자가 범죄 현장을 무작정 떠난다고 해서 그게 잊히는 게 아닙니다. (...) 지금 그렇게 도망가버리면 나중에 후유증을 안고 살아갈 가능성이 큽니다."
회사로 돌아가면 죽을 것만 같은데, 사람들은 복귀하라고 조언합니다. 신부님이 이런 말씀도 합니다.

"사무장님이 여기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다면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줄 수 있어요. 피해 당사자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라는 인식이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 적어도 사무장님만이라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선례가 되었으면 합니다. 고통스러우시겠지만 그것이 하느님이 사무장님에게 주신 소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건 분명 대중에게도 큰 울림을 줄 거라고 생각해요."

(위의 책 138쪽)

개인의 삶이 힘들 땐, 믿어야합니다. '이러한 고통이 내게 주어진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고통을 극복한다면,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다.' 좋은 사람 주변에는 좋은 충고를 해주는 좋은 이웃이 있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을 못 만난다면? 책에서 조언을 구해도 좋아요. 저는 힘든 시절에 책을 읽으며, 스승님들에게 답을 구했습니다. 책에서 해준 충고도 비슷했어요. '불의를 피해 달아난다면, 훗날 스스로를 마주할 수 없을 것이다.' 

운명이 멱살을 잡고 패대기칠 때 어떻게 할까요? 책을 읽으며, 혹은 글을 쓰며 답을 찾습니다. 궁형을 받은 후 칩거하며 <사기>를 쓴 사마천, 감옥에 갇혀서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 유배중 수많은 저작을 남긴 정약용, 책의 세계에는 불운이 느닺없이 나타나 패대기칠 때, 달아나지 않고 맞짱뜨며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는 사람도 많아요.
박창진 사무장은 버팁니다. 스트레스로 목에 종양이 생기고, 수술도 받고 하면서도 끝끝내 버팁니다. 조현민 전무의 물컵 갑질이 화제가 되고, 이명희 씨의 욕설 파일이 공개됩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박창진 사무장이 땅콩회항을 회상하면서 "조현아 씨가 야수가 부르짖듯 소리쳤다"고 한 말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되지요. 파문이 번지면서 대한항공 직원들이 일어납니다. 무능한 경영진의 일괄 사퇴 및 갑질 근절을 외치면서요. 혼자 외롭게 싸우던 박창진 사무장 곁에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수천 명이 채팅방에서 목소리를 내고 그 일부인 수백 명이 용기를 내 광장으로 나오자 세상의 반응이 바뀌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뭉쳐 있으니 회사가 행동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머리로 상상만 하던 일이 현실이 되면서 그제야 비로소 함께하는 동료들의 존재를 느끼게 되었다.' 

(204쪽) 

이제 변화를 외치며 나선 동료들을 위해 박창진 사무장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회사와 싸우면서 본인이 체득한 것을 나눠야겠다고 결심합니다. 대한항공 직원연대라는 노조가 출범할 때 지부장 후보로 나섭니다. 싸울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조직이고요. 노동자의 편에서 가장 든든한 조직은 바로 노조입니다. 

'혹자는 내게 약자를 위한 보호막조차 없는 사회에서 왜 굳이 이 처절하고, 외롭고, 질 게 뻔한 싸움에 나섰냐고 묻는다. 내가 아무리 투사가 되어 사회를 변혁하자고 외친들 무엇이 바뀌고,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그들에게 말한다. "적어도 나라는 한 사람은 바뀌었다"고. 또 다른 사람들은 다시 그날 그 순간 뉴욕공항의 비행기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냐고 묻는다. 나는 또 그럴 것이라 답한다. 한 인간이 힘의 우위를 내세워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거나 강탈해선 안 된다는 신념이 생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내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이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244쪽)

책을 읽으며 전율을 느꼈어요. 다른 사람의 글에서 나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제게 드라마 피디라는 업을 빼앗고, 유배지로 나를 쫓아낸 사람이 MBC 사장이 되었을 때, 느꼈어요. 운명이 내 멱살을 흔들고 패대기쳤다고요. "이제 어떡할 거야? 도망 갈 거야?" 가만히 생각해봤어요. 그 순간 달아난다면,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부끄러운 마음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을 것 같았어요. 아마 그 좋아하는 독서도 즐기지 못하겠지요. 책을 백날 읽으면 뭐하나요, 막상 삶에서 실천은 안 하는데...

<플라이 백>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 <The Greatest Love of All>의 가사가 나옵니다. 이 노래를 자주 들었지만, 여기서 말하는 '가장 위대한 사랑'이 나 자신이라는 건 몰랐어요. 책을 읽고 결심한 작은 실천. 앞으로 살다가 힘든 일이 있으면 이 노래를 들으며 가사를 음미하려고 합니다.

'나는 가장 위대한 사랑을 나 자신 안에서 발견했어요.

가장 위대한 사랑을 얻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가장 위대한 사랑이니까요.'


책의 3줄 요약,

운명이 멱살을 잡고 패대기칠 때, 달아나지 말아야 한다.

나를 위해, 세상을 위해 싸우는 것이 가장 위대한 사랑이다.

플라이 백, 갑질의 시대, 나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을의 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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