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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

왕따의 소심한 복수

by 김민식pd 2011. 11. 10.

고등학교 시절, 나를 왕따로 만드는데 앞장 선 두 녀석이 있다. 그들은 내 외모를 가지고 기억하기도 싫은 별명을 만들고, 그 별명을 널리 보급한 아이들이다. 지금도 동창회에 가면 아이들은 내 이름을 기억 못한다. 별명으로만 불렸으니까. 그 둘은 반에서 2~3등을 다툴 정도로 성적도 좋았고, 집도 부자였는데 왜 그렇게 나를 놀려댔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 둘은 성격이 별나게 잔인한 면이 있었다 쳐도, 왜 나머지 반 아이들은 모두 동조했을까?   

어슐라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라는 소설이 있다. 그 소설을 읽고 어렴풋이 짐작해 볼 뿐이다. 입시지옥이라는 기형적인 교육 환경에서, 아이들은 따돌림으로 자신들의 스트레스를 푸는게  아닐까. "야, 재미로 그러는데 왜 그렇게 화를 내냐? 쪼잔하게?" 나는 죽도록 괴로운데, 아이들에게는 그냥 사소한 놀이였던 것이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때의 교실은 정글이었다. 늑대가 몇 마리 있고, 나머지는 다 양들인데, 희생양 하나만 늑대에게 헌납하면, 나머지 양들에겐 안전이 보장되는 삶. 늑대가 그 양을 잡아 먹는 동안, 남은 양들은 평화롭게 풀을 뜯는 세상...

 


(어슐라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의 간단한 줄거리가 궁금하다면, 아래 기사를 보시길...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107/h2011073120301724370.htm)

예능국 PD로 10년을 일하다, 나이 40에 문득 드라마를 만들어보고 싶어 드라마국 사내 공모에 지원했다. 그때 주위 예능국 선배들은 다 나를 말렸다. "드라마국 피디들은 텃세가 심한데, 거기 가서 왕따 되면 어쩌려구 그래?" 그 순간, 고교 시절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씨익 웃었다. "형, 저는 왕따되는거 별로 겁 안나요."  

난 이제 왕따는 두렵지 않다. 내가 두려운 건 딱 하나다. 남들 시선을 의식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것... 

따돌림을 통해 내가 배운건 하나다. 내 인생의 주체는 나다.
나는 더이상 남들의 시선, 비아냥 이런거 신경쓰지 않는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산다. 

인생이란 참 재미있다. 아무리 죽을만치 괴로운 일이라도, 지나고나면 다 농담의 주제가 되고, 자기소개서의 소재가 된다.

난 이제 더이상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나를 괴롭힌 두 놈 덕에 난 더 행복해졌으니까. 참 고마운 녀석들이다. 

나는 그 고마운 두 친구를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 언젠가 내가 전국민의 사랑을 받는 드라마를 연출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 극중인물에게 친구의 이름을 붙여줄 것이다. 조강지처 버리고 바람 피우는 남편, 수사물에 나오는 연쇄살인마...  그런 배역에다 친구들의 이름을 붙여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을 온국민의 유행어로 만들어 줄 것이다.

"에라이, 준철이 같은 놈아!" "이 천하에 재국이 보다 나쁜 놈!" 



이것은 내게 아름다운 사춘기를 선물해 준 두 친구를 위한, 나의 작은 성의다. 



(음하하하하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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