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 PD 스쿨, 질의 응답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쏘옹지이님이 올려주신 질문에 대한 답을 들려드리겠다. 

질문: 연출가가 작가에게 먼저 아이디어와 소재, 혹은 이야깃거리를 제안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작가가 대본을 쓰기 시작하는 경우도 있습니까? 

답변: 참 좋은 질문이다. 드라마 연출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꼭 고민해봐야 할 대목이다.
 
한국 드라마 시장에서 기획은 주로 작가들의 몫이다. 이유는? 대본의 완성도를 책임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방송이 시작되면, 연출은 한 회 한 회 찍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초반 4부까지는 작가와 회의도 하고, 대본 수정도 하지만, 후반에 가서 쪽대본이 나오기 시작하면, 완성도는 오롯이 작가 혼자의 몫이다.

한국 방송 드라마의 8~90%는 작가가 직접 기획을 한다. 외주 제작사와 집필 계약을 맺고 대본과 기획안을 만들면, 이를 각 방송사에서 편성 심사를 한다. 통과되면 연출과 매치업이 이루어진다. 물론 연출자가 작가에게 기획안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기존에 성과가 좋은 연출자라면 가능하다. 자신만의 개성이 강한 연출이라면, 직접 찾은 기획안이나 원작을 갖고, 맞는 작가를 찾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제작 방식은 위험 부담이 크다. 흔히 만화 원작이나 인터넷 소설 원작이라면 드라마화가 쉬울 것이라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연출자의 경력도 화려하고, 만화 원작의 인기도 좋았으나, 정작 드라마 대본의 약점으로 실패한 드라마가 꽤 많다. 드라마의 성공에서 작가의 기여도가 60%, 배우의 기여도가 30%, 연출의 기여도는 10%라고 생각한다. 연출로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사실이다. 드라마 PD가 좋은 대본을 망칠 수는 있어도, 나쁜 대본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드라마가 성공하는건 작가가 좋은 대본을 썼기 때문이다. 미드를 살펴봐도, 성공한 기획자들은 다 작가 출신이다.

연출이 기획을 하면, 망한다... 사실, 이것은 나의 뼈저린 경험담이다. 나는 SF 매니아다. 20대 때에는 천리안 SF 동호회에 국내 소개 안된 SF 소설을 직접 번역해서 올리고, 그걸로 책도 낸 적이 있다. 요즘도 시간이 나면, 취미 삼아 SF 번역을 한다. '아니, 드라마 PD가 SF 번역도 해요?' 라고 물으면, 'SF 매니아가 드라마 연출을 하는 건데요?'라고 답한다. 

나는 시간 여행을 다룬 SF 소설을 좋아한다. 그래서 예전 '뉴논스톱'의 성공으로 자신만만하던 시절, 직접 시간 여행 SF를 기획한 적이 있다. 제목은, '조선에서 왔소이다' 조선 시대 양반과 몸종이 현대로 와서, 신분이 역전되는 이야기였다. 결과는? 조기종영이었다. 시청률 저조, 제작비 초과, 광고 판매 부진... 트리플 크라운을 기록했다. (생각하니 또 설움이 북받힌다... 시대를 앞서간 걸작이었는데...  ^^) 

                                                 (조선에서 왔소이다)

실패한 이유는 하나다. 좋은 대본을 만드는데 실패했다. 내가 보기에는 참 재미난 기획안이었는데, 막상 이것을 대본으로 만들어준 작가를 구하지 못했다. 만나는 작가마다, '우리 나라 시청자들에게 시간 여행은 너무 어렵지 않아요? 아직은 이르지 않나요?'라는 얘기를 들었다. 아무리 연출이 꽂힌 기획안이라도, 써줄 작가가 없다면 꽝이다.

성과가 좋은 작가들은, 가능하면 자신의 기획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한다. 그래야 머리속에서 주인공들도 살아나고 대본에 대한 애정도 생기는 것이다. 창작이란 누가 시켜서 하는게 아니다. 스스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하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왜 PD 공채를 보는데, 연출 지망생더러 드라마 기획안을 직접 작성하라고 시키는가? 간단하다. 기획안을 잘 쓰는 사람이, 좋은 기획안을 알아보는 안목도 있을테니까. 책을 많이 읽으라고 주문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연출은 좋은 글을 보는 눈썰미를 키워야한다. 

드라마 PD의 역할은, 좋은 기획안을 만드는 것보다, 좋은 기획안을 찾아내는 것이다.
가능성 있는 기획안을 찾아내고, 작가와 협의를 통해, 그 기획안이 좋은 대본으로 만들어질 수 있도록 작가를 돕는 것이 연출의 역할이다.
 
자, 이정도면 답변이 되었는지?

여러분도 댓글이나 방명록을 통해 질문을 올려주시면, 최대한 성심껏 답변해드리도록 하겠다.
종종 내게 개인 메일을 물어보며, 개인적으로 답변을 해 줄 수 없느냐는 분이 있는데, 그건 좀 곤란하다. 가능하면, 공개 질문을 받고, 공개 답변을 드리고 싶다.

현역 연출가로서, 시간을 내어 하는 블로그인데, 조금이라도 더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고 싶다. 이 점,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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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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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쏘옹지이! 2011.10.30 2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께서 또 한 번 제게 감동을 주시는군요ㅠ 이렇게 한페이지씩이나 할애를 해 주시다니 너무 감사합니다ㅠ 좋은 글을 잡아내는 안목기르기에 더 더 더! 힘써야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드라마의 장르에 대한 편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시청자의 탓인지 제작자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드라마는 맨날 똑같고 뻔한 이야기만 해서 영화가 좋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영화와 드라마의 차이는 무엇일까로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단막극을 보고 그 경계가 모호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MBC의 단막극 부활을 응원합니다!!! 심야병원 화이팅!ㅋ). 일본에선 인기 드라마가 영화화 되는 경우도 있고, 미드를 보면 SF드라마도 많은데 말이에요!! 앞으로 우리나라도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가 나오고 그것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날이 오겠죠^^? 전 피디님의 새 SF드라마를 볼 수 있는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겠습니다:)

  2. 김효진 2011.10.31 15: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공개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극본공모 당선자가 PD가 된 사례나 그 반대의 사례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드라마PD가 되기위해 극본공모에 도전하고 있는데요. 도전하면서 한편으로는 '저 사실 PD지망입니다.'라고 하면서 연출이 아닌 다른 길로 샌 것이 아니냐는 인상을 줄까봐 공채면접에서도 자신있게 이야기하지 못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극본공모 당선이 PD공채에서 스펙으로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ㅠㅗㅜ

    • 김민식pd 2011.11.01 22: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극본 공모 당선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요. 그 어려운 성취를 이루었다면 당연히 도움이 되겠지요. 히어로의 김경희 피디나 커피프린스 이윤정 감독은 다 본인의 단막극 대본을 직접 집필한걸로 유명해요. 좋은 감독은 좋은 작가의 자질도 갖추어야지요. 다만 흔한 케이스는 아니란걸 말씀드리고 싶네요. 두가지가 워낙 다른 길이라. 정확히 본인이 원하는게 무엇인지는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와 달리 방송사는 대본과 연출의 영역이 확실히 나뉘어지니까요.

  3. 유명종 2012.05.09 13: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시절 PD님이 타임슬립을 선도했는데 타이밍도 관건 이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4. 2016.10.03 0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