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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더듬는 고교생의 고민

by 김민식pd 2017. 12. 26.

어느 고등학생이 블로그에 남긴 사연입니다. 


Q: 

제가 내성적인 성격이라 학교에서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말을 더듬어서 친구들한테 말을 하면 말더듬이라는 것이 탄로날까 그랬습니다.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고 모범적이고 매우 내성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집에 와서는 팝송을 신나게 부르고 매우 활발한 사람이라 도대체 어느 면이 진짜 나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말을 안하다보니 학교폭력도 당하고 그랬습니다. 그때의 트라우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담임 선생님은 학교에서 말을 한마디라도 하라며, 지금 말을 안하면 대학이나 직장에서도 외롭게 살거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말을 하자니 말더듬이인 것이 들킬까봐 두렵고, 말을 안하자니 이대로 가면 평생 친구 한명도 없이 외롭게 살 것 같습니다. 

저는 정치인이 되어 세상을 바꾸고 싶은데, 제 성격이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다 보니 적성에 맞는가하고 고민입니다. 부모님은 의대를 권하시지만, 의대를 가기에는 성적이 못미치고, 그렇다고 계속 이과에 있자니 가기 싫은 공대에 가야하니 고민이 됩니다. 관심있는 정치, 사회 분야보다 자신이 잘하는 분야를 골라야 하나 고민이 됩니다.

(글쓴이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글을 각색했습니다.)


A:

요즘 라디오 고민 상담 프로에서 게스트로 출연하면서 느낀 점이 있어요. '세상에는 세상 사람 수 만큼이나 많은 고민이 있구나.' 오늘 고교생이 올린 사연을 보니, 어린 시절 저의 고민과 똑같네요. 저도 따돌림을 당하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트라우마가 있어요. 나이 50이 된 지금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휴일 일과는 아침에 일어나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고 글을 쓰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책을 읽는 게 훨씬 더 마음 편해요.

물론 그렇다고 제가 내성적인 사람인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요. 때로는 혼자 있는 게 편하고, 때로는 함께 있는 게 편해요. 고교생 시절, 내성적이라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 시절에는 내가 속한 집단과 내가 원하는 집단의 불일치가 있어요. 학교나 교실 배정에서 나의 의사가 반영되지는 안잖아요? 선생님도, 친구도, 다 우연히 한 곳에 모인 사람들인거죠. 

이런 성격이 바뀌는 건 대학 입학 후부터입니다. 그때부터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갈 수 있는 모임이 많아져요. 동아리가 그렇고, 학과도 어쩌면 선택에 따라 모인 공간이지요. 저의 경우, 개인주의적 성격이 강한데, 대학 동아리 활동과 야학 교사 활동을 통해 사회성이 많이 발달했어요. 동아리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여럿이 같이 하면 더 즐겁다는 걸 배웠고요. 야학 활동을 통해, 내가 가진 게 부족하지만, 그래도 그 부족한 것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배웠어요. 

MBC 입사하고 예능 피디로 살면서, 저의 오랜 약점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코미디 피디들은 남을 웃기는 걸 좋아하는데요. 풍자를 자칫 잘못하면 타인에게 의도치 않은 상처를 줄 수 있거든요. 외모 비하나 정치 풍자가 그래서 어려워요. 제게는 필살기가 있었어요. 타고난 저의 외모는 자학 개그를 할 때, 최고의 소재였지요. 어려서는 못생긴 외모로 아이들에게 놀림도 당하고, 연애할 때 상처도 많이 받았는데요. 어른이 되고 보니, 오히려 그걸 내가 갖고 놀 수 있게 되더라고요. 

피디들 중에 말 더듬는 사람도 많아요. 작가 중에 악필이 많다고들 하지요? 말을 더듬거나 필체가 나쁜 건 머리가 그만큼 빨리 돌아가기 때문이에요. 혀나 손의 움직임이 두뇌회전을 못 따라가는 탓이지요. 괜찮아요. 어린 시절엔 사소한 일에 신경이 쓰이는데요, 어른이 되고 나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그것도 나의 개성이 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평론가 분이 있는데, 그분도 약간 말을 더듬거든요. 그분이 팟캐스트 출연을 하면, 더 열심히 듣게 되어요. 그 분의 말에 묘한 힘이 있어요. 리듬도 엇박이라 듣는 이가 더 집중하게 되지요. 이제는 그분이 말을 더듬는다는 느낌보다, 호소력이 강한 말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머리는 좋은데 영어가 유독 안 느는 사람이 있어요. 왜 그럴까요? 자부심이 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외국인을 만나면 뭐라도 영어를 해야 하는데, 어설픈 기초회화만 하는 자신이 싫은 거에요. 더듬거리며 말하는 게 싫어 그냥 입을 꾹 다뭅니다. 우리말로하면 유창한데, 괜히 영어를 해서 남 앞에서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게 싫은 거예요. 

자, 이럴 땐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영영 영어를 안 하고 말 것인가, 부족해도 일단 시도해 볼 것인가. 서툰 영어로라도 자꾸 말을 해야 늡니다. 입 꾹 다물고 있는데 절로 머릿속에서 영어가 완성되지는 않아요. 언어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합니다. 혀와 성대와 입술을 무의식적으로 놀려 소리를 내어요. 반복 훈련을 통해 익숙해집니다. 말이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몸의 근육을 이용해서 하기 때문에 자꾸 해야 늡니다.


'고슴도치의 딜레마'입니다. 그냥 몸을 웅크리고 있으면 상처받을 일은 없어요. 다만 그러고 있으면 어디로도 갈 수가 없고 그 자리에만 있게 되지요. 성장한다는 것은 결국 상처를 무릅쓰고 어디론가 가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첫째, 고교생 시절은 아직 선택권이 없어 가고 싶은 곳이 없어 그럴 수도 있어요. 그걸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자연스레 가고 싶은 곳,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생길 거예요. 

둘째, 말을 더듬는 게 나의 특성 중 하나라면, 그것 역시 나의 모습이라 생각하고 안아줘야 해요. 자존심보다 중요한 건 자존감입니다. 어떻게 하면 자존심을 상하지 않을까 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자존감을 키울까 고민해봐요.

셋째,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그걸 찾는 건 평생가는 숙제입니다. 저는 아직도 나이 50에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책을 읽고 여행을 다니면서 자아를 찾고 있어요. 아직 모른다고 좌절하지 말아요. 그걸 계속 찾는 게 인생을 사는 과정이에요.


학생의 신분을 숨기려고 글을 줄였는데요. 원문을 보니, 공부도 잘 하고, 책도 많이 읽고,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멋있는 친구라는 느낌이 팍팍 왔어요. 잘 살고 있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킹스 스피치'라는 영화가 생각났어요.

언젠가 세계를 구하고 싶어지는 순간, 님은 멋진 정치가가 될 거예요. 그날을 기다려봅니다.  


        

 http://www.imbc.com/broad/radio/fm/sleeplessnight/life/index.html


'잠 못 드는 이유' 코너에 사연을 올려주시면, 강다솜 디제이와 함께 고민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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