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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짠돌이 육아 일기

인공지능 시대의 교육

by 김민식pd 2016. 11. 9.

오늘은 아주대 감동근 교수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함께 읽고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인공지능 시대의 교육]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가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 직후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인공지능이 인류의 미래에 끼칠 영향에 대해 극단적으로 암울한 전망을 한 바 있다. 과거에 대한 그의 통찰력에 비해 미래에 대한 그의 견해에는 허술한 면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한 얘기 중 적극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현재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의 80~90%는 이 아이들이 40대가 됐을 때 전혀 쓸모없을 확률이 크다. 어쩌면 지금 아이들은 선생님이나 연장자에게 배운 교육 내용으로 여생을 준비하는 게 불가능한 역사상 첫 세대가 될지 모른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줄 가장 중요한 기술은 ‘어떻게 해야 늘 변화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해야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직면하며 살 수 있을 것인가’일 것이다.”

  내가 종사하는 전자공학 분야는 알파고 사건 이전부터 이미 2년 뒤를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기술이 급변하고 있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기술은 학생이 졸업해서 사회로 나가는 시점에는 이미 구닥다리가 된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가르치는 내용 자체보다는 공부하는 방법을 깨우치는 것이다.

  내가 근무하는 아주대학교는 각 신문사 평가에서 15위 정도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고, 그 중 전자공학과는 10위권 정도로 여겨진다. 그런데 아주대학교 전자공학과의 평균적인 학생들은 혼자서 교과서를 읽지 못한다. 영어로 쓰여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한글로 쓰인 교과서도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천재가 아닌 다음에야 전공서적을 처음 읽으면 그 내용의 3분의 1 정도나 이해가 될까 말까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렇지만 두 번째 읽을 때는 절반쯤 이해되고, 네댓 번 읽으면 비로소 대부분의 내용이 이해되는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처음 읽을 때 이해가 안 되면 그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왜냐면 그동안 학원과 인터넷 강의에서 이해가 될 때까지 떠먹여주던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원래 수능의 지문들은 플라톤의 <국가>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같이 여느 고등학생이 절대 읽어보지 않았을 곳에서 가져온다. 낯선 텍스트를 접할 때 짧은 시간 내에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이 있는 지를 평가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수능을 대비하는 정공법이지만, 우리의 놀라운 사교육 시스템은 다른 방법들을 찾아냈다.

  객관식 보기 중에서 정답을 골라내는 일에서는 사람이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다. 이미 18세기에 볼테르는 “어떤 답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질문을 하느냐로 사람을 판단하라”고 했다. 결국 위대한 질문들이 세상을 바꿔왔다. 자꾸 질문을 하도록 격려해줘도 모자랄 판에, 우리는 질문하는 아이들에게 진도 나가는데 방해가 된다고 눈치를 준다. 인간이 인공지능보다 뛰어난 점은 바로 상상력이다. 알파고의 인공신경망은 십만 개 안쪽의 뉴런을 흉내 냈지만, 인간은 대뇌피질에만 약 천억 개의 뉴런을 갖고 있어서 훨씬 큰 틀에서의 학습이 가능하다. 온갖 신기한 인공지능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좋은 인공지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인공지능은 아직 없다.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나 개념을 생각해내는 능력에서는 인간이 여전히 인공지능을 압도한다.

  상상력(想像力)을 직역하면 어떤 모양을 떠올리는 능력이다. 상상력을 키우는 데는 독서가 최고다. 영화 <마션>은 2015년에 개봉됐지만 원작 소설은 2014년에 출판됐다. 영화로 보는 것보다 책을 읽는 것이 열 배는 힘들다. 묘사된 문장으로부터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끊임없이 떠올려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상상력을 기르는 훈련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공부하느라 너무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다. 인공지능과 경쟁하며 살아가야 할 우리 아이들에게, 여전히 문제지 열심히 풀게 해서 소위 명문 대학 들여보내는 것이 그들을 진정 위하는 길일까?

  우리가 알고 있던 성공의 법칙은, 중/고등학교 때 죽어라 공부해서 명문 대학에 들어가면 좋은 직장(대기업 정규직)에 취업할 수 있고 그러면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윤택한 생활이 보장된다는 것이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아주대학교 전자공학과 학부 졸업생들의 과반수가 대기업에 취업했다. 그 때는 학생들에게 “너희들이 중/고등학교 때 대입 준비하느라 진을 다 빼서 또 공부하기가 힘들겠지만, 그래도 옆에 있는 친구들만큼만 해라”고 얘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나마 취업이 잘 되는 전자공학과 졸업생의 4분의 1 정도만 대기업에 취업할 수 있고, 학교 전체로 보면 대기업 취업 비율이 10% 남짓에 불과하다. 이는 내가 근무하는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3-5개 대학을 제외하면 모든 명문 대학에서 공통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어느 집단에서나 10%는커녕 4분의 1 안에 드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기 때문에 이제 학생들한테 할 말이 없어졌다. 취업이 안 되는 것이 나의 ‘노오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학생들도 알아채기 시작했다.

  더 암울한 것은 이런 추세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별반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문제의 근원이 주기적인 경기의 사이클 때문이 아니고 산업의 패러다임 자체가 달라진 탓이기 때문이다. 대기업 정규직은 앞으로 점점 사라지고 프리랜서가 대세가 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어떻게 사회가 필요로 하는 가치(서비스나 상품)를 만들어낼지 빨리 찾아낼 수 있느냐가 성공의 관건인 시대가 오고 있다.

  알파고의 성취가 시사하는 바는, 바둑과 같이 모든 정보가 공개되고 목표와 규칙이 명확하게 정의된 문제라면 어떤 문제든지 풀어낼 가능성이 높은 인공지능이 탄생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인간 수준의 직관과 통찰을 갖게 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과도하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문제들은 목표와 규칙이 명확히 정의되어 있지도 않고, 문제를 풀기 위해 필요한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특히, 로봇 공학자 한스 모라벡은 “체스 인공지능을 만들기는 상대적으로 쉬운 반면, 지각이나 운동 능력 면에서 한 살짜리 아기만한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을 만드는 일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바둑의 역사는 2,500년을 넘지 않아서 알파고가 단기간에 인간을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인간이 2족(직립) 보행하기까지는 수백만 년의 학습(진화)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2족 보행 로봇 개발에도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현존 최고의 2족 보행 로봇인 보스턴 다이나믹스의 ‘아틀라스’는 2000년에 발표됐던 혼다의 ‘아시모’에 비해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아직 인간에 비할 바는 아니다. 올해 초 아틀라스가 눈 덮인 비탈길을 그런대로 잘 (술이 제법 취한 성인 수준으로) 걸어 내려오는 영상이 공개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지만, 로봇이 모터를 자율적으로 제어한 것이 아니라 현장에 있던 엔지니어들이 주요 변수들을 사전에 면밀하게 설정해준 덕분이었다.

  결국 가상공간에서 주로 숫자로 된 정보를 처리하는 일은 인공지능이 대체하더라도, 물질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하고 감정을 이해하며 상호작용을 하는 일은 여전히 인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인공지능(로봇)이 쉽게 흉내 내기 어려운 인간의 능력은 곧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이 갖춰야할 경쟁력이다. 대화와 타협의 기술, 남을 배려하는 마음, 협업하는 능력 등은 예전부터 ‘인성 교육’의 측면에서 다뤄져왔지만, 이제는 우리 교육이 최우선으로 추구해야만 하는 목표가 된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우리 학생들은 스마트폰 문자 메시지와 ‘카톡’의 단문에 익숙해진 나머지, 긴 글을 쓰거나 얼굴 맞대고 대화하는 것을 지나치게 어려워하지 않던가? 무엇보다, 상대평가 시스템으로 극단적인 경쟁에 내몰면서 학생들에게 남을 배려하고 갈등을 조정해가면서 협업하는 능력을 기대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나는 조만간 만 5세가 되는 아이가 있다. 내가 인공지능 전문가 내지는 인공지능 시대의 교육 전문가랍시고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실은 내 아이도 어떻게 교육할지 몰라서 늘 고민하고 있다. 이 아이가 갖게 될 직업은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는 직업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저런 교육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것이 최선이라는 확신은 없다. 내가 알고 있던 성공 법칙은 이미 깨졌다. ‘내가 해봤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은 틀릴 가능성이 높다. 내 아이를, 내 제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한 최선의 방법을 권해보지만, 늘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이 방법이 제일 좋을 것 같아서 권유하지만 솔직히 확신은 없어. 네 생각은 어떠니? 우리 함께 고민해보자.” 이런 식의 접근이 훨씬 성공할 확률이 높을뿐더러, ‘꼰대’ 소리 듣는 것과 같은 부작용도 줄일 수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소리만 지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간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있으면 조금 겸손해질 텐데. 바둑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이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알파고와 판후위의 기보를 보고나서 ‘인공지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아직은 인간 최고수를 이길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바둑에 대한 지식이 딥러닝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오히려 방해한 것이다. 지식과 기술이 급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려면 더 많은 융통성과 적응력이 필요하고, 그것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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