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미생으로 배우는 드라마 연출론 제2강~

 

드라마 피디는 아티스트인가, 스토리텔러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후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앵글을 공부하기 보다 이야기를 공부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예쁜 화면과 좋은 구도는 이야기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어야지, 화면이 이야기를 압도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점에 있어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드라마 피디도 있을 수 있다.)

 

좋은 만화가 역시 아티스트이기보다 스토리텔러로서 자신을 갈고 닦는 사람이다. 윤태호 만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화백이란 호칭보다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라는 칭호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다. 윤작가는 그림을 위해, 혹은 컷 연출을 위해 이야기를 희생하지 않는다. 그에게 콘티란 이야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일 뿐이다.  

 

드라마란 무엇인가? 인생의 하이라이트 편집이다. 돌 하나와 부모님의 표정만으로 7년이란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는 착수 0은, 하이라이트 편집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제껏 쌓아온 인생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빼앗겨버린 주인공에게 작가는 이런 독백을 준다.

'나는 변한 게 없다.

없어야 한다.

너희들만 변한 것이다.

열심히 안한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안해서인걸로 생각하겠다.'

 

평소 만화를 그릴 때, 백지에다 대사를 직접 적어본다고 하는 윤태호 작가의 글솜씨는 정말 일품이다. 만화가이지만 그는 그림보다 글에 더 집착하는 사람이다. 그는 평소 만화학과 제자들과 함께 소설을 필사한다. 좋은 글이 있으면 직접 적어내려가며 그 글의 장점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려고 한단다.

 

드라마 피디로서 나 역시 화면이나 앵글보다는 이야기에 집착하는 편이다. 드라마는 별로 보지 않지만, 매년 100권의 책을 읽는 건, 그만큼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장그래는 기원 연구생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졌지만, 그가 겪는 좌절은 우리 모두에게 친숙한 것이다. 고전이나 걸작이 주는 감동이 그러하다. 특수한 상황에 처한 인물을 다루지만 그 인물의 정서는 보편적이어서 누구나 쉽게 감정이입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허구의 주인공은 환타지를 체화하는 캐릭터이지만, 리얼리티를 가진 보편적 인물이어야 한다. 그래야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가 주인공을 응원할 수 있고, 시청에 몰입할 수 있다. 공감을 주지 못하는 캐릭터는 이야기의 낭비다. 

 

드라마 초반에 모든 주인공은 시련을 겪는다. 바람 피운 남편에게 버림받던가, 시한부 인생임이 밝혀지던가, 빚쟁이에 쫓겨 자살 시도를 하던가, 주인공에게 닥치는 가혹한 시련을 보여준 후, 작가는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과연 우리의 주인공은 이 시련을 어떻게 이겨낼까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저글링과 같다. 

너무 쉬우면 보는 이가 흥미를 잃고, 너무 어려워 공을 놓치면 시청의 흥이 깨진다. 재주있는 이야기꾼은 처음에는 단순한 전개로 독자의 시선을 붙잡고 그런 다음, 새로운 공이나 접시를 하나 둘 보태어 간다. 착수 0에서는 주인공을 소개하고, 착수 1에서는 만화의 기획 의도가 드러난다. 

"저 불빛들 중 하나를 책임지게." 

이 한마디의 대사로 미생이란 작품은 '도시의 밤을 밝히는 샐러리맨들에게 바치는 헌사'임을 알린다. 바둑의 고수에게 버리는 돌이 없듯이, 이 작가에게도 버리는 컷, 버리는 회가 없다. 너무 쉽게 곤경을 이겨내지도 않는다. 바둑의 달인이 취업에 도전하는 이야기라 하니, 바둑을 특기로 삼아 성공하는 스토리인가? 싶지만 착수 2에서 작가는 장그래의 첫 사회 진출을 간단히 좌절시켜버린다. 역시 너무 쉬우면 재미가 없는 법! 단 3회 연재만으로 이야기는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선다. 

 

착수2의 엔딩은 전형적인 드라마 1화의 엔딩이다. '과연 우리의 주인공은 무사히 직장이라는 사각의 바둑판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주인공의 운명에 집착하도록 만들고, 작가가 하려는 이야기에 공감하도록 만들고, 그 길이 결코 쉽지 않음을 보여준 후 이제 작가는 네번째 돌을 준비한다. 과연?

 

웹툰 미생으로 배우는 드라마 연출론,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만화의 인기에 묻어가려는 이 얄팍한 시도! ㅋㅋㅋ)

 

미생 착수 0 보기

 http://cartoon.media.daum.net/webtoon/viewer/15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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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공짜로 즐기는 세상'이란 제목으로 책을 낸다고 했더니, 아내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글을 올렸다.

 

'남편이 평소 자신의 짠돌이 철학을 담은 책을 낸답니다. 많이들 사 주세요.'

 

나름 '매스미디어 피디가 말하는 소셜미디어로 노는 법'이라고 말해줘도 마님에겐 별로 안 먹힌다. 마님에게 나는 돈 한 푼 쓰지 않고 인생을 거저 먹으려는 짠돌이로 각인되어 있으니까.

 

드라마 피디로 먹고 살지만, 드라마 연출에 대해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그저 공짜로 배웠을 뿐이다. 특히 드라마 촬영 콘티에 대해서는 만화를 통해 배웠다. 컷 연출에 있어 최고의 교본은 슬램덩크다.

 

 

 

 

오른쪽 페이지

(우측 컷 : 윤대협의 원 풀샷, 서태웅 오버쇼울더) 엉...? 윤대협, 걸어오다 서태웅을 본다.

(좌상단: 윤대협 바스트) 여어...

(좌하단: 서태웅 바스트) 어이... 승부하자 

왼쪽 페이지

(우상단 세로 1: 하늘) 응? (여기서 하늘은 시간 경과, 장소 이동을 보여주는 인서트 컷이다.)

(우상단 세로 2: 길 가에 모여있는 아이들)

(좌상단 가로 1: 아이들 그룹샷) 뭐야, 우리 연습장에서... 우리도 농구하러 왔는데. 근데...

(좌상단 가로 2: 아이들 오버샷으로 시점) 저 사람들 프로 선수인가봐. 바보, 우리 나라에 프로가 어디있냐? 저 두 사람 누가 이길까?

(하단: 서태웅 웨스트샷) 공을 던지는 서태웅 모습

(하단 박스: 골대 타이트샷) 공이 들어가는 모습 인서트

 

잘 찍은 드라마를 보면, 버리는 컷이 없는데, 잘 그린 만화 역시 한 컷 한 컷, 그냥 넘어가는 컷이 없다. 만화에도 영상 문법이 있다는 걸 난 슬램덩크를 보고 배웠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날 때는 풀샷 오버쇼울더로 둘의 위치를 보여주고, 대사와 리액션은 바스트 샷으로 처리한다. 빈 하늘 인서트로 장소 이동을 보여준 후, 길 가에 서 있는 아이들, 아이들의 표정, 아이들의 시점으로 두 사람 모습, 서태웅의 플레이, 골대에 들어가는 공, 이렇게 하나하나 수렴해들어가 작가의 의도대로 독자의 시선을 이끄는 것, 이게 드라마 촬영 공식의 기본이다. 이 한 장만 봐도 드라마 촬영 콘티가 다 들어있다.

 

갑자기 웬 철지난 슬램덩크 얘기냐고? 요즘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을 즐겨듣는데, 미생의 윤태호 작가와 조명가게의 강풀 작가가 출연했기에 환호를 질렀다. '와우, 이런 대박 게스트 캐스팅이 다 있나!' 두 만화가가 역대 최고의 만화로 꼽은 것이 슬램덩크다. 역시!

 

요즘 만화계 최고의 화제작이 웹툰 '미생'인데, 나는 요즘 창작자의 자세에 대해 '미생'에서 배운다. '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라는 뜻의 이 만화는 사실 자칫 '살아날 수 없었던' 아이디어였다. '이끼'의 성공 이후, 윤태호 작가가 바둑을 소재로 한 차기작을 준비중이라고 했을때 다들 말렸단다. 심지어 절친인 강풀 작가도 "형, 바둑 만화는 절대로 안돼. 하지마"라고 극구 반대했다. ''이끼'로 미스터리 스릴러물의 한 획을 그은 작가가 왜 생뚱맞게 바둑 만화를 하겠다는 거지?' 

 

자, 여기서 창작자로서 윤태호 작가의 자세가 돋보인다. 다들 안된다고 하니까 기가 죽는게 아니라 오히려 '곤조' 즉 근성이 살아나더란 것이다. 그래서 혼자 밀고 나가서 선보인게 지금의 미생이다. 역시 창작자는 근성이 살아있어야해!

 

드라마 피디의 기본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해야한다. 그래야 첫째, 작업이 즐겁고, 둘째, 그 결과에 온전히 책임질 수 있다. 물론 그런 점에서 나는 만화가가 부럽다. 이야기를 만들고 그림으로 구현하는 것을 모두 혼자 할 수 있으니까. (화실 식구의 도움을 받긴 하지만.) 드라마 피디는 작가, 배우, 스탭, 방송사, 등 책임져야할 식구가 너무 많다. 그냥 '나 좋은 것만 할래.' 라고 이야기하면 웬지 무책임한 분위기? 그래서 나는 만화가 가진 소재의 다양성과 모험적인 시도를 부러워하고 좋아한다. 질투와 애정이 한데 섞인 시선?

 

 

 

올해 초, '미생'의 첫 화를 보고, 윤태호 작가에게 문자를 날렸다. '이 작품은 이끼에 이어 또 하나의 걸작이 될 조짐이 보입니다.'

 

착수 0을 보자. 동네에서 바둑 신동 소리를 듣던 아이가 11살에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가 7년의 세월을 보낸다. 그 7년의 세월을 작가는 바둑 알 하나, 그리고 부모님의 바스트 컷 2장으로 표현해낸다.

 

'7년이 지났다.

입단에 실패했다.

그때야 비로소 주름진 아버지가 보였고,

총기잃은 눈빛의 어머니가 보였다.'

 

첫 화에서 바로 알 수 있다. 바둑이 아니라, 인생을 이야기하는 만화로구나! 작가가 소재에 경도되면 안된다. '이렇게 멋진 바둑의 세계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겠어.'가 목표가 아니다. '바둑을 통해 그 속에도 인생이 있다는 걸 보여주겠어.'가 제대로 된 기획이다.

 

바둑 하나로 살아온 주인공이 모든 걸 빼앗기고 세상에 나간다. 정규 교육도,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살아온 그가 과연 세상에서 버텨낼 수 있을까?

 

'인생도처 유청산'이라는데 '인생도처 유상수'다. 세상 어디에나 고수가 있어 언제나 연출을 배울 수 있는데, '미생'을 보면 연출론과 더불어 인생도 배울 수 있다. 심지어 공짜로! 

 

앞으로 웹툰으로 배우는 드라마 연출론을 연재할 예정이다. 만화로 배우는 드라마 연출론, 캬아! 좋지 아니한가! 다음 시간에 앞서 피디스쿨 학생 여러분께 숙제를 내드린다.

웹툰 '미생'을 보고 오실 것~ ^^ (이런 숙제 내주는 학교 있으면 나오라 그래. ㅋㅋ)

 

'미생' 착수 0 보기...    

http://cartoon.media.daum.net/webtoon/viewer/15097

 

    

위의 슬램덩크 만화는 평소 협업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 꼭 보여주는 장면이다. 못보신 분들은 아래의 포스트를 참고하실 것.

 

2012/11/15 - [공짜 PD 스쿨] - 협업은 생존을 위한 진화의 마지막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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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다들 기를 쓰고, 공중파에 입사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MBC에 입사하고 가장 좋았던 점은, 내가 만들고 싶은 건 마음껏 만들 수 있다는 점이었다. '1주일에 2~3억원을 줄테니, 그 예산의 범위 안에서 광고 팔릴만 한거 찍어와.'

 

미니 시리즈 드라마 한편 찍는데 제작비는 회당 1억 5천만원을 훌쩍 넘긴다. 자, 문제는 이렇게 제작비가 커지면 신인들에게 기회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위험부담 역시 커지니까. 나 역시 마음의 부담이 커진다. 망하면 회사에 미치는 손해가 막대하니까. 부담이 커지면, 일하는 재미는 준다.

 

매스미디어 콘텐츠는 제작비가 많이 든다. 한국 상업 영화의 제작비가 높아지면서,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 흥행 공식에 맞는 영화들만 나온다. 그러다보니 요즘 한국 영화는 다양성이 떨어진다. 아예 블록버스터로 최대 다수의 취향을 공략하거나 로맨틱 코미디로 안전한 흥행 공식을 따르거나.

 

나는 문화 시장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다양성이라고 생각한다. 로맨틱 코미디가 잘 팔린다고, 모든 사람이 로맨틱 코미디만 찍는 건, 로맨틱 코미디를 죽이는 길이다.

 

미국 블록버스터를 제작하는 감독의 면면을 살펴보면, 각자 개성이 선명한 사람들이다. ‘스파이더맨을 연출한 샘 레이미 감독은 이블 데드라는 B급 공포 영화로 데뷔했다. ‘반지의 제왕피터 잭슨은 고무 인간의 최후라는 엽기적인 영화로 자신의 재기발랄함을 증명했고, ‘터미네이터’ ‘타이타닉’ ‘아바타의 흥행으로 최고의 감독이 된 제임스 카메론도 시작은 피라냐2라는 저예산 B급 영화였다.

 

저예산 B급 영화로 자신의 개성을 발휘한 사람들이 헐리웃의 새로운 피가 되어 블록버스터 시대를 열었다. B급 영화 시장이 죽고, 새로운 감독 등용문이 된 것은? 바로 유튜브다. 유튜브에서 이름을 날린 단편 영화 감독들이 본격 상업영화 감독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보여주는 것도 이미 자신의 취향을 유튜브를 통해 갈고 닦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미디어 시장은 갈수록 세분화될 것이다. 그리고 그 최전선에는 유튜브가 있다. 유튜브는 공짜 미디어다. 제작비가 적게 든다. 진입장벽도 없다. 충무로 연출 보조가 아니라도, 외국 영화학교 유학이 아니라도,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영화를 만든다.

 

개성이 묻어나는 다양한 콘텐츠, 유튜브가 갈 길이고, 크리에이터가 살 길이다.

 

 

 

(유튜브 세대의 '아키라' - 크로니클)

 

(유튜브로 노는 세대, 대중 문화에 입성하다 - 크로니클)

 

 

(크로니클의 감독 '조쉬 트랭크'(방년 27세!)가 예전에 유튜브에 올려 화제가 된 단편 영상)

(1분 반짜리 영상 하나로 그는 헐리웃 장편 영화 연출의 기회를 얻었다.)

 

 

유튜브 영화 제작에 관련한 PD스쿨 이전 포스팅

 

2011/08/12 - [공짜 PD 스쿨] - 저예산 독립 SF 영화 제작기

 

2011/02/07 - [공짜 PD 스쿨] - 공짜로 영화감독이 되는 법

 

2012/01/21 - [공짜 PD 스쿨] - 동영상 기획에서 촬영까지

 

2012/01/23 - [공짜 PD 스쿨] - 동영상 편집에서 배급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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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프레시안 북스에 기고한 서평입니다.)

PD로서 내가 들은 가장 신랄한 혹평은 예전에 청춘 시트콤 <뉴 논스톱>을 연출할 때, 누군가 시청자 게시판에 올린 글이다.

"김민식 PD는 자칭 시트콤 마니아며, 미국 시트콤 <프렌즈>의 열렬한 팬이라고 하면서 왜 정작 자신이 만드는 시트콤은 <프렌즈>보다 훨씬 떨어지는 저질 시트콤인거죠?"


'시청자와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친절한 연출'이라고 자부하는 나는 바로 댓글을 달았다.

"미국의 <프렌즈>는 1년에 24편 만듭니다. <논스톱>은 일일 시트콤이라 1년에 200편 넘게 만들고요. <프렌즈> 편당 제작비는 수십억이고요, 저희는 편당 1500만 원입니다. <프렌즈> PD보고 이 돈 갖고 1년에 200개 만들어보라고 하세요. 쉽지 않을 걸요?"


이런 후안무치한 소리를 변명이라고 했다니, 이제와 생각해보면 정말 부끄럽다. 하지만 그 시절엔 그게 나의 생각이었다. 당시에 BBC에서 온 프로듀서랑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다.


"너는 무슨 일을 하니?" "I am a daily sitcom director." "일일 시트콤이라고? 그런 포맷도 가능해?" (외국의 시트콤은 다 주1회 방송한다.) "응, 한국에서는 가능해." "넌 정말 빨리 찍는가 보구나. 비결이 뭐니?" "난 포기가 빨라."


가슴 아픈 얘기지만 일일 시트콤을 연출하려면 포기가 빨라야 한다. 장소가 마음에 안 들어서, 대본이 마음에 안 들어서, 연기가 마음에 안 들어서, 날씨가 마음에 안 들어서… 촬영을 접어야 하는 이유는 수만 가지지만, 그래도 오늘 중으로 촬영을 끝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다. 안 그러면 내일 방송 펑크다.


쪽 대본, 초치기, 불륜, 막장… 연출도 이런 수식어가 드라마 앞에 붙는 게 싫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려면 어쩔 수 없다. 일주일에 5개를 만들어야 그만큼 광고 시간이 확보가 되고, 광고를 팔아야 제작비가 나올 것 아닌가. 내가 진정한 예술가라면 타협하지 않고, 완벽한 작품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지만, 매일 방송 시간이라는 마감은 어김없이 닥쳐온다. 대본 아이디어가 안 나온다고, 촬영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어느 순간 절필 선언을 하고 산으로 도망갈 수도 없지 않은가? 드라마 연출, 생각하면 참 뻔뻔하지 않고는 버티기 힘든 직업이다.


비슷한 이유로, 이번에 나온 책, 김환표의 <드라마, 한국을 말하다>(인물과사상사 펴냄)를 읽는 것이 처음에는 망설여졌다. 신문 한 구석의 TV 비평으로 읽기도 불편한 한국 드라마에 대한 질타를 두꺼운 한 권의 책으로 읽어내는 것, 이거 드라마 PD의 자학 아닌가? 나는 뒤가 많이 구린 용의자의 심정으로 책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정말 방대한 증언과 자료를 내 코앞에
들이댄다. 이름난 선배의 숨겨진 일화를 만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나, 때로는 부역의 증거 같아 가슴 아프기도 하고, 막장 연속극을 향한 비난을 열거할 때는 피해 진술서를 읽는 듯이 쿡 쿡 찔렸다. 책을 읽으며 나는 저자의 집요함에 혀를 내둘렀다. 한국 드라마, 이렇게 용의주도하고 집요한 검사를 만났으니, 잘못 걸렸구나!


사실 드라마를 비평하기란 쉽다. 기본적으로 한국 국민은 '투잡'을 뛴다. 하나는 본인 직업, 하나는 드라마 비평가. 술자리에서 가장 씹기 좋고 안전한 안주가 드라마다. 정치나 종교 문제를 토론하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다. 좌중에 연기력이 부족한 미남 배우의 열혈 팬만 없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전문가의 역할은 더 빛이 나는 법이다. 지은이 김환표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자신만의 논리를 전개한다. 역시 전문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많은 사람이 한국 드라마의 문제로 지적하는 것은 쪽 대본, 초치기, 막장, 불륜, 열악한 제작 환경 등 다양할 것이다. 용의자의 입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변명은 하나다. 다 한국 방송 시장이 작은 탓이다. 우리도 미드(미국 드라마)나 일드(일본 드라마)처럼 일주일에 방송 한 편 만들면, 명품 만들 수 있다. 영어권 드라마처럼 해외 판권 시장만 크다면 다양한 소재에 도전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어 시장은 1억 명도 안 되는데 그나마 반으로 쪼개져있어 북한에는 판매도 안 된다. 결국 한정된 제작비로 광고 판매를 극대화하자니, 1주일에 두 편 아니면 다섯 편씩 만들어내야 한다. 빨리 찍자니, 통제와 카메라 세 대 동시 촬영이 가능한 스튜디오에서 녹화할 수밖에 없다. 세트에서는 그림에 힘을 줄 수 없으니, 독한 대사와 설정으로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에는 유독 일일 연속극이 많고 연속극은 막장으로 가기 쉽다.


재주 많은 드라마 작가는 누구나 처음에는 주인공에게 시련을 안겨주고 나중에는 주인공이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도록 이야기를 전개한다. 김환표가 그리는 한국 드라마가 걸어온 길도 비슷하다. '저속 퇴폐' '충성 경쟁' '자기 검열'라는 역경을 딛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국민의 사랑을 바탕으로 조금씩 성장해 간 결과, 한국 드라마는 '한류 열풍'이라는 세계적 성공 스토리를 일구어낸다. 한국 드라마가 걸어온 길은 어찌 보면 시청자가 그토록 드라마에서 원하는 신데렐라 성공 스토리다.


책을 읽으며 나는 작가의 시선에서 한국 드라마를 사랑하는 따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냉혹한 검사인 줄 알았더니, 누구보다 나의 입장을 잘 알고 대변해주는 친절한 변호사였구나! 즐거운 독서를 마치면서 허락된다면 피의자 최후 진술을 하고 싶다.

"한국 드라마, 이제까지 잘못한 점도 많지만, 애정을 가지고 지켜봐주시면 앞으로 더욱 잘 하겠습니다."

멘트는 식상하지만, 진심이다. 이렇게 열심히 드라마 문화사를 기록하는 학자가 있으니, 연출들도 앞으로 더욱 긴장해서 열심히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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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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