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돌이 독서 일기

좋은 어른의 삶은 무엇일까?

김민식pd 2024. 2. 23. 04:54

백 세 시대, 기나긴 노후를 어떻게 보내야 할까?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외롭게 혼자 지내는 것보다는 여럿이 어울려 지내는 게 좋습니다. 사회적 고립에 빠지는 대신 소통의 즐거움을 누리는 거죠. 다만 소통이 어렵습니다. 말하기는 쉬운데요, 내 말만 계속 하면 외로워집니다. 말 많은 노인을 상대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거든요. 늘 이랬던 건 아니에요.

수 천년 동안 우리는 농사를 짓고 살았어요. 농사, 특히 벼농사는 날씨의 변화에 따라 수확량이 달라집니다. 풍년이 들면 다 같이 잘 살지만 흉년이 들면 굶어죽는 사람도 나와요. 모내기철에 젊은 사람들이 열심히 모종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지나가던 노인이 그럽니다. "내가 오늘 허리가 쑤시는 걸 보니 며칠 새 큰 비가 오려나 보다. 괜히 귀한 모종 비에 다 떠내려갈 지 모르니 모내기는 비 그치고 나서 해." 

예전에는 동네에서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노인이었어요. 글을 읽거나 쓰는 사람이 드문 시대에는 지배 계급이 문자와 정보를 독점합니다. 중세 유럽에서 죽은 언어인 라틴어를 공부한 사제들이 종교의 권위를 독점한 것처럼요. 그나마 글을 모르는 사람 중에 정보가 많은 게 노인이었어요. 기나긴 세월을 통해 몸으로 체득한 경험이 있고요, 평생 들어온 말이 있으니까요. 

정말 노인의 말 대로 다음날부터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요. 이웃 마을에는 모가 비에 다 떠내려가는 바람에 낭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요. 한 해 농사를 망쳐 겨울에 굶는 이가 많다는 이야기에 동네 사람들은 노인을 더욱 대접합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여요. 유교에서 노인을 공경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 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가진 지혜를 존중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제는 정보화 시대입니다. 농촌에서 젊은이들이 모내기를 준비하는 걸 보고 지나가던 노인이 그럽니다. "내가 오늘 허리가 쑤시는 걸 보니 며칠 새 큰 비가 오려나 보다. 모내기는 나중에 비 그치고 나서 해." "에이, 할아버지 날씨 앱 검색해보니까 앞으로 일주일 내내 햇볕이 쨍쨍하대요. 지금 안 하면 나중에 모종이 말라 죽어요." "아니 내가 지금 허리가 쑤시는 게...." "아니, 그러니까 허리가 아프면 병원에 가보시라니까요." 하고는 나지막히 옆사람에게 투덜거립니다. "노인이 말은 죽어라 안 들어." "너무 그러지 마. 요즘 치매기가 있어서 그러신 것 같으니까." 노인이 괜히 젊은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가 환자 취급 받기 딱 좋습니다.

이제 지식과 정보는 스마트폰에 검색하면 다 나와요. 심지어 육아 정보도 시어머니에게 물어보지 않아요. 유튜브에 올라온 육아 전문가 선생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되거든요. 시어머니가 귀여운 손주를 보러 왔어요. 기저귀를 갈 때, 베이비 파우더를 열심히 뿌리죠. 며느리가 본 유튜브에서 어느 의사가 그랬어요. 베이비 파우더를 너무 많이 쓰면 탤크 진폐증의 위험이 있다고. 젊은 며느리가 기겁합니다. “어머니 파우더 너무 많이 쓰지 마세요.” “무슨 소리야, 그래야 피부가 안 짓무르지.” 누워서 잘 자는 손주를 보고 할머니는 기겁을 합니다. “에구, 에미야, 이러면 뒷통수가 납작해져서 보기 싫어.” 아기를 엎어서 자게 합니다. 그걸 본 며느리는 또 질겁하지요. 신생아를 엎드려 재우면 호흡곤란으로 돌연사의 위험도 있거든요. 

30년 전, 지금의 부모 세대가 아기를 키울 때와 비교하면 그 사이에 의학이 발전하여 새롭게 발견된 사실들이 많아요. 옛날의 내 상식을 우기면 젊은 세대와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제는 지식은 스마트폰에 무료로 널려 있고요. 기술은 나날이 발전해요. 말하기에 있어 지식과 기술보다 더 중요한 건 태도입니다. 먼저 말하기 전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 상대방에게는 관심을 기울이고 나의 말에는 책임을 지는 태도. 

은퇴 후 어떻게 살면 좋을까? 궁금한 마음에 코칭을 받은 적이 있는데요. 그때 코치님은 절대 먼저 말하지 않았어요. 제가 먼저 도움을 청하면 그제야 말을 하지요. 그것도 미리 답을 하지는 않고요.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요. 저는 앞으로 현명한 노인의 소통은 코치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소통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글쓰기와 말하기, 말을 하고 싶은 사람은 우선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써야 합니다. 말하기는 쉬워도 글쓰기는 어렵습니다. 말을 청산유수처럼 잘 하는 사람도 방금 한 말을 글로 써달라고 하면 사색에 빠지거나 얼굴빛이 사색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진화의 원리가 그래요. 더 오랜 시간을 해온 행위는 쉽고요, 더 짧은 시간 동안 해온 행위는 어려워요. 인류는 수십만년 동안 말로 소통해왔어요. 글을 읽고 쓴 시간은 겨우 수천년에 지나지 않고요, 일반 대중이 누구나 글을 익히게 된 것도 겨우 100년 정도 된 일입니다. 말하기보다 글쓰기가 더 낯설고 어려운 행위입니다.

그리고 지난 수십년간 우리는 글쓰기보다 읽기에 집중했어요. 한국 사회가 산업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글을 읽을 줄 아는 노동자 대중의 수가 늘었기 때문입니다. 산업화 시대에는 리더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노동자가 필요합니다. 상사가 한 사람 한 사람 붙잡고 매번 일을 지시할 수 없기에 우리는 글로 업무 지시를 공유했어요. 업무 계획서를 작성하고, 사장이 결재를 하면 그 매뉴얼에 따라 모든 노동자가 업무를 실행했지요. 상명하복 정신으로 부지런히 일한 덕분에 우리는 산업화에 성공했고 가난한 처지에서 벗어났어요. 

산업화의 시대는 가고 정보화의 시대입니다. 산업화 시대에는 윗사람이 지시를 하고 아랫 사람이 따르는 구조였다면, 정보화의 시대에는 협업이 중요합니다. 정보를 윗 사람이 독점하면 안 되고요. 모두가 정보를 공유할 때 업무 효율이 높아집니다.

젊은이들이 땀흘려 농사 짓는 걸 보고 뭔가 도움이 되고 싶다면 노인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혼잣말입니다. "아이구, 고생스럽게 일을 왜 저렇게 하누. 더 쉽게 하는 방법이 있는데 말이야." 그 혼잣말을 계속 소리내어 하면 노망난 늙은이 취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온라인에서 글쓰기로 혼잣말을 해야 합니다. 

저는 14년째 매일 혼잣말을 합니다. 블로그 글쓰기로. '영어 조기 교육을 꼭 시켜야 하나? 영어가 필요하면 지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 스스로 하면 되지 않을까?' '아, 독서가 참 좋은 습관인데,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이 책은 정말 재밌는데 말이야.' '북한강 자전거길, 참 좋단 말이야.  그냥 기차에 자전거를 실고 가면 되는데.' 이렇게 주절주절 혼잣말을 합니다. 그걸 보고 출판사에서 연락이 오면 책을 내고요. 이제 전국에 강연을 다니게 됩니다. 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 앞에 서서 한 시간씩 마음껏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합니다. 

농사를 돕고 싶다면, 우선 노인은 자신이 평생 농사를 지으며 배운 지식과 기술에 대해 글을 써서 공유해야 합니다. 마을 젊은이들이 보고 도움을 청하면 좋겠지만, 안 그럴 수도 있어요. 아무도 안 읽을 수도 있어요. 괜찮아요. 그것도 공부입니다. 사람들이 왜 내 글을 안 읽을까? 농업 분야 파워 블로거들의 글을 읽으며 고민을 거듭하고요. 자신만의 콘텐츠를 계속 만들어갑니다.

만약 누군가 도움을 청하면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냅다 말을 이어가면 안 되고요. 우선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농사 지을 때 어떤 점이 제일 힘들까요?" 상대를 돕겠다는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귀 기울여 듣고요. 상대가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며 같이 고민해보는 겁니다. 

저게 실은 강원국 작가님이 선택한 길입니다. 나이 50에 청와대 연설비서관으로 일하다 물러나신 후, 세상에서 불러주는 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출판사에서 월급 150만원 받고 교정일을 합니다. 그러다 어떻게 하면 글을 더 잘 쓸 수 있을까? 당신이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에게서 배운 것을 글로 씁니다. <대통령의 글쓰기> 그리고 지금은 전국의 도서관으로 글쓰기 강연을 다니시고 있지요. 

어떻게 하면 더 잘 소통할 수 있을까? 좋은 어른으로 살 수 있을까? 강원국 작가님과 책을 쓰며 많이 배웠고요. 여러분도 책을 통해  그 소중한 가르침을 얻어가시면 좋겠습니다. 

<말하기의 태도> 전국 서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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