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돌이 독서 일기

이토록 멋진 성장담!

김민식pd 2018. 12. 14. 06:22

<채널 예스>에 실린 작가님의 영업에 넘어가서 냉큼 서점에 달려가서 사온 책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이슬아 글. 그림 / 문학동네)

이 책은 딸의 눈으로 본 엄마의 성장담이자, 그 엄마가 키운 딸의 성장담입니다. 엄마와 딸의 관계는 참 놀랍지요. 딸 둘을 키우는 아빠로서 가끔 샘날 때가 많아요. 아내와 딸들 사이 애정 전선에는 제가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면이 있어요. 특히 아침에 아내가 출근할 때, 두 딸이 달려나가 셋이서 서로 현관에서 끌어안고 부비부비 할 때, 끼고 싶지만 못 끼어요. 아이들은 엄마를 보며 자라고, 일하는 엄마는 아이들을 보며 버팁니다. 이슬아 작가는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해요.

 

우리는 서로를 선택할 수 없었다.

엄마와 딸, 서로가 서로를 고를 수 없었던 인연 속에서

어떤 슬픔과 재미가 있었는지 말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우정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의 우정.


(작가의 말 중에서)


책의 전반부에는 작가가 그리는 엄마의 삶이 나옵니다. 우리 엄마는 어쩌다 지금처럼 살게 되었을까?


열아홉 살이었던 그녀는 열심히 공부해서 한 대학의 국문과에 합격했으나 집에 돈이 없어 입학을 못했다. 

"등록금이라도 어떻게 해주시면... 나머지 학비는 제가 벌면서 다닐게요!"

(그녀의 아버지는 한숨을 쉬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대학 등록이 마감되던 날에 그녀는 처음 사본 소주를 들고 다락방에 들어간 뒤 3일 동안 나오지 않았다. 3일 뒤 부은 눈으로 다락에서 나온 그녀는 양푼에 비빔밥을 잔뜩 비벼 먹고는 다음날 진양상회에 취직했다. 

"미스 장은 나이가 어떻게 되나?"

"스무 살입니다."

미스 장의 월급은 45만 원이었다. 그녀는 그중 40만 원을 통장에 저금하고 세 명의 동생에게 각각 만 원씩을 주고 남은 2만 원만을 자기 용돈으로 썼다.   

(위의 책 42쪽)


엄마의 스무살을 바라보는 딸의 시선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져요. 그러면서도 그녀는 엄마의 씩씩함을 닮아갑니다. 대학 입학 후, 카페에서 알바를 하는데요. 시급이 작아요. 카페 알바는 어렵지 않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노동자 입장에서 불리한 고용 시장이지요. 시간 대비 고수익 일자리에 대해 궁리하던 작가는 돈을 많이 버는 일은 결국 흔하지 않은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문지식이 필요하거나, 엄청나게 복잡한 일이거나, 위험하고 고된 일이라거나, 어떤 이유로든 왠지 꺼리게 되는 일... 이를 테면 옷을 벗는 일이라든지?

대학생이 할 수 있는 알바 중 누드 모델이라는 일이 가장 시급이 세다고 느꼈고 (3만 원에서 5만 원 사이) 누드모델협회에 전화를 걸어 지원 자격에 대해 물어봐요. 


협회의 회장님은 어떤 몸이든 체형과 체중에 상관없이 무대에 설 수 있다고 말했다. 저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누드모델 일을 하기로 결심한 뒤 부모에게 알릴지 말지를 고민했다. 그들은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반대하지 않았지만 여러 사람 앞에서 옷을 벗는 일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속이는 것은 역시 피곤해.'

"엄마. 아빠."

"응?" "왜?"

"나 다음달부터 새로운 일로 돈을 벌까 해."

"무슨 일?"

"누드 모델"

...


(누드 모델을 하겠다는 딸에게 엄마가 묻습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해?"

"무대에 서기 전에 걸치는 가운이 필요해."

엄마는 자신의 구제 옷가게로 가서 거기에 있는 옷 중 가장 고급스러운 코트를 가져왔다. 

"알몸이 되기 전에 네가 걸치고 있는 옷이 최대한 고급스러웠으면 해." 


(위의 책 169쪽)


책을 읽다 이 대목에서 멍해졌어요. '아, 이토록 자애로운 엄마라니!' 자식이 뭘 하겠다고 하면 대부분은 그 직업에 대한 평가를 하고, 판단을 하고, 충고나 조언을 하지요. (며칠 전 소개한 <당신이 옳다>에서 정혜신 선생님이 좋은 대화를 가로막는 4가지 금기어라고 했던, 충조평판 : 충고 조언 평가 판단) 

'글을 쓰겠다고? 굶어죽기 딱 좋다!' '니가 무슨 통역사를 한다고 그래?' '처자식이 있는 40대 가장이 노조 일을 하는 게 말이 되냐?' 아버지가 제게 한 말들이 제게는 다 상처였어요. 평생을 살면서 모르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보다 가장 가까운 부모에게 받은 상처가 더 커요. 나중에 아이가 어떤 일을 하고 싶다고 하면 저도 저렇게 물어야겠어요.

"무엇을 준비해야 해?" "뭐가 필요하니?"  


글과 그림으로 이뤄진 책이라 하루만에 다 읽었어요. 일요일 오전에 아이 손을 잡고 서점에 가서 산 책을, 일요일 저녁 아내 곁에 누워 다 읽었어요. 아내는 옆에서 미셸 오바마의 <비커밍>을 읽고 있었어요. 둘이 읽는 책이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비커밍>도 그렇고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도 그렇고, 멋진 성장담이거든요. 어지간한 히어로물 저리가라에요. 마지막 장을 덮을 땐,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와, 진짜 멋진 성장담이다!"하고 감탄했어요. 옆에서 다른 책을 읽던 아내도 비슷하게 느끼겠지요. 

슈퍼 히어로는 얼굴을 가리고 정체를 숨기는 걸로 성장하는데요, 이슬아 작가는 몸을 드러내고 그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어 놓는 걸로 성장합니다. 저는 이슬아 작가가 더 멋진 영웅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멋진 영웅을 응원하는 길은 역시 저자가 쓴 책을 사는 일이겠지요. '예스 24' 온라인 서점에 이슬아 작가의 수필집이 올라오길 기다리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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