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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버팔로를 잡는 인디언이다

by 김민식pd 2013. 6. 11.

최근 종영한 나인 - 아홉 번의 시간여행을 정말 재미있게 보았다. SF라는 장르를 좋아해서 SF 번역가로 일했던 나로서는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 정말 반갑다. 예전에 조선에서 왔소이다라는 환타지 시트콤을 연출한 적이 있는데, 연출력이 부족했는지, 흥행에 참패를 겪었다. 시청률 저조, 제작비 초과, 광고판매 부진의 PD 삼거지악을 저지르고, 방송 4회만에 종영 결정이 내려져 12부작인데 7부에서 막을 내렸다. 당시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MBC에서 당신이 가장 연출료가 비싼 피디인거 알아? 1년 동안 시트콤 일곱 편 만들었으니까, 편당 연출료로 따지면 1천만원이 넘는 셈이잖아.” 아내의 농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시대를 앞서간 비운의 타임슬립 시트콤, '조선에서 왔소이다.') ^^ 

 

친구들을 만나면 내게 묻는 질문이 있다. “드라마 피디는 시청률이 대박나면 월급 더 받는 거니?” “아니.” 급여가 성과연동제가 아니라면 사기 진작에 문제가 있지 않느냐며 걱정하는 친구도 있다. 그럼 꼭 이렇게 얘기해준다. “시청률 더 나와서 월급 더 받아야한다는 건 시청률이 낮을 때 월급을 깎아도 좋다는 얘기거든? 창의력이 중요한 조직에서 시청률과 급여를 연동하는 건 결코 바람직한 급여체계가 아니란다.” “네가 시청률 올릴 자신이 없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친구들의 이런 반응,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나는 피디 사회는 버팔로 사냥으로 먹고 사는 100명의 인디언 마을이라 생각한다. 그 마을에는 모두가 창을 하나씩 들고나가 버팔로를 잡아서 먹고 산다. 100명이 버팔로를 몰아서 다 같이 창을 던지면, 3~4개의 창이 버팔로를 맞히고 그래서 잡은 고기를 100명이 나눠먹는다. 그런데 어느 날 인디언 하나가 나서서 이렇게 얘기한다. “매번 버팔로를 맞히는 건 난데 왜 내가 너희들이랑 고기를 나눠먹어야 하지? 이건 불공평하잖아. , 안되겠다. 지금부터 다들 창에 각자 이름 써. 그래서 버팔로에 꽂힌 창에 이름 적힌 사람만 고기 먹기.”

 

, 새로운 보상 체계를 적용시켜 사냥에 나간다. 버팔로를 맞힌 사람은 배 터져라 먹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쫄쫄 굶는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그동안 버팔로를 한 번도 맞히지 못해 굶어죽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한다. 100명이던 마을 사람은 70명이 되고, 다시 한 달이 지나면 50명이 된다. 50명이 사냥을 나가면 예전처럼 버팔로를 몰기도 어려워지고 창을 던져도 한두 개 맞은 버팔로는 그냥 달아나버린다. 결국 마을 사람 전원이 굶어죽게 된다.

 

나는 PD가 버팔로를 잡는 인디언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맞힐 때도 있고, 놓칠 때도 있다. 중요한건 그럼에도 사냥에 나가 창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프로그램 성과가 좋지 않다고 사냥에서 아예 배제하는 건, 실패의 경험에서 배워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는 일이다. 어린 후배들이 보기에도 그렇다. 인생이 살아볼만 하다고 느끼는 건 극적인 역전도 가능할 때다. 좀 빌빌하던 선배도 자신에게 딱 맞는 기획을 만나면 펄펄 나는 모습을 보여줘야 어린 후배들에게도 희망이 있다. 한 번 실패하면 영원히 내쳐지고 성공도 반복하는 사람만이 기회를 얻는 세상이라면, 그런 정글에서 즐겁게 일하는 보람은 없다. 승자도 패자도 다 같이 불안한 세상이 될 테니까.

 

드라마 나인을 보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신비의 향이 나온다. 만약 내게 그런 향이 있다면 10년 전 조선에서 왔소이다.’가 쫄딱 망했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가서 10년 전 죽을 것같이 괴로워하던 나에게 이렇게 말해줘야지. “너무 자책하지 마. 타임슬립이라는 소재, 10년 후에야 유행하고 심지어 그 중에는 대박 드라마도 나온단다. 그리고 살다보면 역전의 기회는 반드시 오니까 웃으며 버텨.”

 

동료들이 나눠주는 버팔로 고기를 얻어먹으며 하는 생각. ‘언젠가는 나도 버팔로를 맞히는 날이 올 테니, 일단 오늘은......... 감사히 먹겠습니다!’

 

(PD 저널 연재 칼럼 '김민식 피디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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