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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님의 어떤 조크

by 김민식pd 2013. 4. 29.

 

예전에 예능국에서 조연출로 일할 때, 몇몇 PD들이 국장님을 모시고 점심을 먹으러 간 일이 있다. 손님 많기로 유명한 여의도 콩국수 집 앞에서 그날도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여름 별미 콩국수 개시라고 써 붙인 옆 가게들은 다 텅텅 비어있었다. 그걸 보고 어느 선배가 한마디 했다. “똑같은 콩국수 집인데 어느 집은 줄을 서서 먹고, 어느 집은 파리나 날리고, 참 인생 불공평하네요.” 그랬더니 국장님 말씀. “? 너희가 만든 프로그램도 그렇잖아. 똑같이 밤새서 만드는데 누구는 30%가 넘고 누구는 5%도 안 나오잖아.” 순간 싸늘해지는 현장 분위기. 선배들의 얼굴을 살펴보니 국장님의 그런 조크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한 표정이었다.

 

중고등학교 진로 특강에 가면 아이들이 묻는 질문이 있다. “PD로 살면서 좋은 점은 뭐에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나라에서 학교 때 공부를 잘한 사람들이 하는 직업이 몇 개 있어요. 의사, 변호사, 판검사. 여러분이 공부를 정말 잘해서 의사가 되잖아요? 그럼 하루 종일 병들고 아픈 사람만 봅니다. 판검사가 되면요, 매일 매일 나쁜 사람만 만납니다. 도둑, 강도, 사기꾼, 유괴범 등등. PD가 되면요, 잘 생긴 남자, 예쁜 여배우, 노래 잘하는 사람, 춤 잘 추는 사람, 잘 웃기는 사람, 이런 사람들만 만납니다.” 아이들의 탄성이 터져 나올 때, 누가 다시 묻는다. “그럼 PD로 사는 최대 단점은 뭐에요?”

 

, 내가 만약 이 학교에서 전교 꼴찌라고 칩시다. 그런데 그걸 아무도 모르면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주위 친구들 몇몇만 안다. 조금 괴로울 거예요. 그런데 그걸 전교생이 다 안다. 많이 힘들겠지요? 심지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안다고 쳐요. 그래서 내가 지나가면 슈퍼 아저씨가 , 저기 문화중학교 전교 꼴찌 지나가네?’ 그러면 쪽팔려 죽을 것 같겠죠? PD는요, 시청률이 꼴찌를 하면 온 국민이 다 알아요. 심지어 신문에도 나고 막 그래요. ‘김민식 PD의 신작 드라마, 경쟁사에 밀려 참패정말 힘들겠죠?” 내가 하는 일의 결과가 만천하에 드러난다는 점이 PD에겐 즐거움인 동시에 괴로움의 원천이다. 일일 시트콤 연출할 때는 매일 아침마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시청률을 보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래도 이 친구들이 잘 해주어서 웃는 날이 많았다. 고맙다, 뉴논스톱 친구들)

 

신천에 있는 MBC 아카데미에서 교육발령 받느라 회사 근처에 가본지 오래되었는데 누가 그러더라. “요즘 MBC에 가면 엘리베이터에도 시청률 표가 붙어있던데요?” 순간 그랬다. “에이, 농담 하지 마.” “진짜에요!” 가보니 진짜더라. ‘지난주 주간 프로그램 순위라고 적어놓고 시청률 TOP 10’점유율 상승 TOP 5’를 함께 게시했더라. 그걸 보고 참 애매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방송사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프로그램을 만들며 수많은 밤을 지새운다. 그 중에는 시청률 톱 텐에 끼지는 못해도 프로그램을 향한 열정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피디도 있을 것이고, 그 피디를 믿고 자신을 내어준 출연자와 스태프도 있을 것이다. 매니저에게 시청률을 물어보고 낙담은 했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피디에게는 모른 척 웃으며, “요즘 주위에서 글로리아보는 재미로 산다는 사람 많아!” 라고 능청을 떠는 중견 연기자도 있을 것이다. 풀죽은 표정으로 자막의뢰서를 들고 가는 후배에게 요즘 반응 좋더라!”고 없는 말로 어깨를 두들겨주는 편집실 선배도 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란 그런 곳이어야 한다. 매일 매일 시청률의 부담을 안고 사는 피디가 세상의 비정한 평가에 다시 한 번 고개를 떨구는 곳이 아니라, 웃으며 농담을 나누고 서로 기운을 북돋을 수 있는 곳.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잘나가는 피디는 세상이 다 알고, 안 나가는 피디는 홀로 가장 괴롭다는 걸 알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잘 나가는 이를 향한 칭송보다 안 나가는 이를 위한 배려다. 그게 창작 집단으로서 방송사가 가야 할 길이라 생각한다.

 

(ps. 그리고 이건 절대 시청률 톱 텐에 못 드는 피디의 뒤끝이 아니다.)

 

PD저널 연재 칼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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