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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

제작비 청구의 달인

by 김민식pd 2013. 2. 27.

 

 

3월은 새내기의 계절이다. 신입생들이 방학을 마치고 교정에 들어서고, 신입 사원들이 연수를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서는 계절이다.

 

1996MBC에 입사해 새내기 조연출 시절, 처음 맡은 업무는 제작비 정산이었다. 당시만 해도 전산화가 되지 않은 시절이라 일일이 손으로 출연료 청구 내역서를 쓰던 때였다. 피디가 되면 멋진 가수랑 예쁜 여배우 자주 봐서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처음 한 일은 그 멋진 가수가 출연할 때 백댄서 몇 명이 무대에 올라가는지 헤아리는 일과 그 예쁜 여배우가 촬영 할 때 점심시간 전에 왔는지 후에 왔는지 체크하는 일이었다. 백댄서들 머리수를 헤아려 출연료를 계산하고, 촬영 나온 연기자와 스태프들의 근무 시간을 확인해 식대가 포함되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게 일이었다.

 

예능 조연출의 경우, 촬영, 편집, 자막 의뢰, 음악 선곡 등 제작 전반에 걸쳐 다양한 작업을 하는 터라 제작비 정산의 경우 방송에 드러나지 않는 일이라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십상이었다. 그러다보니 일용직으로 일하는 조명기사나 스크립터의 경우 몇 달 째 돈을 받지 못해 생활비 지출을 신용카드 대출로 돌려막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일하는 프로그램에서 그런 경우는 없었다. ? 나는 제작비 청구의 달인이었으니까.

 

피디가 되기 전에 나는 영업사원과 통역사로 일했다. 영업사원으로 일할 때 배운 건, 고객에는 외부 고객과 내부 고객이 있다는 것이다. 외부 고객은 전통적 의미의 고객, 즉 나의 상품을 사는 사람이고 내부 고객은 회사 내 회계 담당자, 마케터, 공장 출고 담당자 등 직장 동료들이다. 영업의 달인은 외부 고객 뿐 아니라 내부 고객 관리도 뛰어났다. 회계 처리가 빨라야 대리점 대금 지불이 원활하고, 마케팅 협조가 잘되어야 현장 영업이 쉬워지고, 출고가 제때 이루어져야 배달이 빨라지니까. 즉 외부 고객을 잘 모시기위해서는 내부 고객 관리가 우선이라는 것을 배웠다.

 

피디가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시청률에 목매고 사는 피디에게 제일 중요한 고객은 시청자다. 하지만 그 고객을 제대로 모시기 위해서는 스태프들과 작가를 잘 모셔야 한다. 좋은 제작진을 만나야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시청자가 외부 고객이라면 제작진은 내부 고객이다.

 

통역을 하면서 배운 건 돈 잘 챙겨주는 사람이 최고라는 거다. 통역대학원 재학 시절, 여러 회사나 정부 기관에서 통역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가장 고마운 고용주는 제때 돈을 챙겨주는 사람이었다. 미리 선급을 받아 일한 그날 바로 돈을 주는 회사가 있었고, 은행 계좌를 알려줬는데도 몇 달이 지나도록 입금이 되지 않아 전화를 해보면 사장 결재가 늦어져서 그런데 어쩌란 말이냐며 외려 짜증을 내는 경우도 있었다. ‘어차피 줄 돈인데 기왕 줄 거면 제 때 주면 좀 좋아?’

 

조연출 시절 가장 허드렛일이라는 제작비 청구 업무를 시작하면서 결심했다. ‘비록 편집은 남보다 못해도 제작비 청구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말자. 제작비 청구의 달인이 되자!’ 그 덕에 나는 당시 MBC 스태프들 사이에서 가장 빨리 급여를 챙겨주는 조연출로 소문이 났다. 내 돈도 아니고 어차피 지급해야 할 인건비를 줬을 뿐인데, 마치 내 돈으로 인심 쓰는 듯 인기가 좋았다. 그 시절 스태프들에게 인심을 얻은 덕에 나중에 연출이 되고 나서 제작진을 꾸릴 때 곤란을 겪은 적은 없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새 봄에 일을 시작하는 새내기라면 어쩜 업무를 맡고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일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영업이든 통역이든 연출이든, 결국 다 사람 마음 얻자고 하는 일이었다. 어떤 일이든 사람 마음 하나 얻을 수 있기를.

 

 

'행복한 동행' 3월호 김피디 가라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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