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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2017 MBC 파업일지

부디 방송은 전문가에게 맡겨주세요

by 김민식pd 2013. 1. 15.

부디 방송은 전문가에게 맡겨주세요.’

 

(월간 방송작가 1월호에 기고하기 위해 작년 12월 17일에 쓴 글입니다.)

 

월간 방송작가에서 원고 청탁을 받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이렇게 난처한 시기에 기회가 올 줄은 미처 몰랐다. ‘김민식 피디의 드라마 연출론혹은 시트콤 대본 작업으로 살펴보는 공동창작의 미래’, 이런 원고 청탁을 기대했는데, MBC 노조 부위원장으로서 새 정부에 기대하는 2013 방송의 미래라니, 이거 참 난감할세.

 

게다가 1218일이라는 원고 마감일은 좀 가혹하다. 사상 초유의 박빙이라는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두고 결과를 섣불리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다음 대통령에게 바라는 방송 정책을 쓰라니 솔직히 많이 쫄린다. 드라마 첫 회 방송 나가고 게시판 반응 보고 나머지 대본을 쓰겠다는 작가에게 촬영도 나가기 전에 무조건 16부작 완고를 내라는 격이 아닌가. 주인공 캐스팅에 따라 코미디가 될지 호러가 될지 아직 모르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작가님들에게 드라마 PD로서 내가 가진 연출관을 홍보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지면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드라마 피디가 된 건 마흔 살의 일이다. (고로 아직 시장에 홍보가 되지 않은 신제품인데, 그나마 중고 신인이라는 거.) 1996년에 MBC 예능국에 입사하여 청춘 시트콤 '뉴논스톱', ‘일밤 - 러브하우스', 공익 버라이어티 '느낌표'등을 연출했다. 2007년에 MBC 드라마국 사내공모에 지원했는데 누가 물었다. "예능만 10년을 했는데 어떻게 드라마 PD를 하려고?"

 

내가 생각하는 PD의 정의는 다른 사람과 좀 다르다. PDP는 프로듀서 producer, D는 디렉터 director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Producer,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라니, 턱도 없는 소리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만드는 사람이 피디다. 작가가 대본을 쓰고, 출연자가 연기를 하고, 카메라감독이 촬영을 해야 방송 한 편이 만들어진다.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Director, 사람들에게 일을 지시하는 감독이다? 미안하지만 나랑 같이 일하는 사람은 다 자기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10년 이상 대본을 써 온 작가에게 대사가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고, 수 십 년을 연기만 고민하며 살아온 배우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고, 평생 뷰파인더만 들여다본 카메라 감독에게 앵글이 이러니저러니 할 수도 없다.

 

그럼 피디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감독이라 불리는 직업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축구 감독, 야구 감독이다. 한글로는 똑같은 감독인데 영어로는 director가 아니라 coach. 코치란 무엇인가? 어떤 일을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을 모아, 그들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벤치에서 응원하는 게 코치의 일이다. 히딩크 감독을 보라. 그가 박지성보다 더 공을 잘 차는가? 아니다. 그는 자신보다 더 공을 잘 차는 사람을 선수로 기용하고, 그들이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다.

 

드라마 감독이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나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에게 대본을 맡기고, 나보다 연기를 잘하는 사람에게 배역을 맡기고, 나보다 촬영을 잘하는 사람에게 카메라를 맡긴다. 내가 일하는 방식은 간단하다. 대본을 읽고 좋은데요?’를 외치고, 연기를 보고 좋은데요?’를 외치고, 앵글을 보고 좋은데요?’를 외친다.

 

나는 방송 제작이 공동 창작이라 믿는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지 타이피스트가 아니다. 배우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지 인형이 아니다. 카메라 감독은 스스로 앵글을 만드는 아티스트지 명령을 수행하는 기계가 아니다. 작가와 주도권 싸움 하느라, 배우와 힘겨루기 하느라, 스태프들과 기 싸움 하느라, 내 소중한 시간을 죽이고 싶지 않다. 알량한 연출의 자존심을 세우려고, 작품을 함께 만드는 이들의 소중한 열정을 죽이고 싶지는 않다.

 

새 정부에 바라는 방송의 미래를 논하는 자리에서 생뚱맞게 웬 연출론이냐고? 나는 정부가 일하는 방식이 연출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사가 만사다. 어떤 전문가를 기용하느냐가 중요하다. MBC에 입사해서 16년을 다녔지만, 공영방송으로 MBC의 지배구조나 사장 선임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김재철 사장이 오기 전까지는...

 

그럼 어떤 사람을 쓸 것인가? 대본을 전문가인 작가에게 맡겨야하듯, 방송은 방송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언론의 역할에 대해 열정과 사명감을 지닌 참된 언론인을 방송사 사장 자리에 앉히면 방송의 미래는 밝아질 것이다. 대선 캠프 주위를 맴돌며 정치권에 줄을 대거나 특정 후보를 위해 언론 특보로 일한 사람은 방송인이 아니라 정치인이다. 방송 전문가라면, 권력의 감시와 견제 기능이라는 언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것이나, 정치 전문가라면 국민 여론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권력의 눈치만 살피다 방송을 망치고 말 것이다.

 

'PD 수첩 -검사와 스폰서' 편을 방송한 최승호 피디와 ‘PD 수첩작가를 전원 해고하였으니, 세상은 조용해질까? 검찰을 견제하고 감시해야할 언론이 그 기능을 상실하자, 검찰은 성추문에, 뇌물 수수에, 거짓 양심선언에, 자멸의 길을 걸었다. 결국 자중지란 끝에 검찰 총장까지 물러났지만, 아직도 대한민국 검찰에게 자정이란 멀고도 먼 길이다. 감추어진 비밀을 세상에 까발려야 할 이들이 자신의 비리를 숨기기에 급급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언론 장악의 폐해를 가장 잘 드러낸 사건이 작년 연말에 터진 후진타오의 측근인 링지화 스캔들이다. 지난 3, 북경에서 20대 대학생 하나가 여자 둘을 태운 페라리 승용차를 몰고 가다 사망한 일이 있었다. 노동자 평균 임금이 50만원인 나라에서 10억짜리 페라리를 모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링지화 부장은 자신의 아들이 페라리 사망사고를 내자, 자신의 부패를 은폐하려고 사망신고서에 올린 아들의 성까지 바꾸었다가 들통 나서 결국 집안의 몰락을 맞이하게 된다.

 

권력의 끝이란 이렇게 허망하다. 부정부패로 모아온 돈을 애지중지 키워온 아들에게 건네주자, 그 돈은 아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흉기가 되었고, 그 사건을 은폐하려다 인터넷 여론의 역풍을 맞고 결국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끊는 기폭제가 되었다. 링지화의 아들이 최고위층 자제이면서 사치와 향락을 즐기고 북경 시내 한복판에서 광란의 질주를 즐긴 이유? 사람들이 모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의 언론 통제를 믿었던 탓이다. 언론의 비판과 감시 기능을 제거한 권력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광란의 질주를 통제할 수 없어 결국 자멸의 길을 걷게 된다.

 

페라리는 멋진 차다. 그 차가 멋진 이유는 급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브레이크 없는 페라리는 살인 기계일 뿐이다. 언론이라는 제동 장치 없는 권력은 스스로의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자살 폭탄일 뿐이다.

 

새 정부에 바라노니, 방송을 다시 방송인의 손에 돌려줬으면 좋겠다. ‘피디 수첩작가들을 제 자리에 돌려놓고, 현업에서 쫓겨난 해직 기자들을 복직시키고, 방송사 경영진에게 잃어버린 개념을 다시 찾아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지름길이라 믿는다.

 

노조 부위원장으로 일하다 정직 6개월의 징계를 받고 2번의 구속영장 청구로 유치장을 다녀온 나를 보고 친한 작가가 물었다. “그런 사람 아니었잖아요?” 그런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예나 지금이나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보수 우파다. 언론사를 다니는 내게 가장 소중한 자유는 언론의 자유이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영방송의 주인은 국민이라고 믿는다. 자유민주주의자의 상식이 지켜지는 나라, 내가 새 정부에 바라는 것은 그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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