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짜로 즐기는 세상/짠돌이 육아 일기

선행학습은 인생의 스포일러다

by 김민식pd 2014. 1. 27.

나는 누구인가? 평생 이 화두 하나를 붙들고 산다. 나는 이야기꾼이다. 어려서 동화 구연을 좋아했고, 동생에게 이야기 해주고 돈 받기를 즐겼다. 영업 사원을 할 때는, 고객에게 상품 소개를 이야기 구술 형식으로 푸는 걸 좋아했다. 단순히 상품의 특성을 소개하기 보다, 신제품 개발에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는지, 썰을 푸는 것, 그게 내가 영업을 즐긴 이유였다.

 

기계가 인간의 육체 노동을 대신하는 시대, 컴퓨터가 인간의 정신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에, 인간 고유의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오래가는 직업인이 되는 길이라 생각하는데, 나는 그것이 이야기를 만들고 즐기는 능력이라 생각한다. 컴퓨터가 아무리 발달해도 이야기를 대신해 줄 수는 없을테니까. (물론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에 보면 이야기를 조합해내는 컴퓨터도 나오긴 하지만, 그건 정말 먼 훗날의 미래다.) 

 

이야기꾼이 싫어하는 건 스포일러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앞자리 승객들이 영화 얘기하다 내가 안 본 영화의 결말을 무심코 툭 얘기해버리면 순간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째려본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저리 없을 수가 있나!' 내게 스포일러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아는 친구들은 나를 놀리려고 일부러 앞에서 영화 얘기를 하는데, 그럴때면 나는 귀를 양손으로 막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식당에서 머리를 흔들며 스머프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꼭 중년의 자폐아 같아 보인다.

 

스포일러가 싫은 이유는 세상을 즐기는 흥을 깨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독서, 여행, 연애에는 공통점이 있다. 다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모험이다. 엔딩을 모르기 때문에 이야기의 흐름에 빠져들고 몰입의 즐거움에 흠뻑 젖어든다. 재미난 소설이란 독자의 호기심을 결말까지 몰고가는 이야기다. 여행이 즐거운 것은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공간, 한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을 진짜로 즐기는 이들은 떠날 때는 너무 꼼꼼하게 일정을 짜기보다 '오늘은 어떤 경치가 나를 깜짝 놀라게 해줄까?' 기대를 안고 즉흥적으로 떠난다. 그리고 연애, 연애의 가장 큰 즐거움이야말로 설레임이 아닐까? 어떤 결말이 펼쳐질지 모른다는 설레임.

 

그런 점에서 스포일러는 이야기를 망치지만, 심해지면 이야기꾼으로 살아가는 인생을 망치게 된다. 내가 보기에 요즘 아이들이 죽어라 하는 선행학습은 인생의 스포일러다. 선행학습이 아이에게 가르치는 건 학교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생님은 이미 학원에서 배운 것(그것도 몇년 전에!)을 다시 반복해서 가르치는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거다. 선행학습은 공부에 있어 치명적인 스포일러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보충하는 곳이 학원이었는데, 이제는 거꾸로다. 이건 사교육이 공교육의 영역을 침범하다못해 아예 죽이고 있는 형편이다. 교실에서 아이가 느껴야 할 호기심을 죽이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재미를 죽이는 것, 그게 선행학습이다. 

 

매일 학원 공부에 치어 사는 아이는 호기심을 느낄 틈이 없다. 그냥 스케줄표 쫓아가기만 해도 너무 바쁘고 지치니까. 엄마들은 아이가 몰입하는 순간은 게임 할 때 뿐이라고 안타까워하지만, 사실 아이를 그렇게 만든 건 부모의 욕심이다. 학습 능률이 가장 뛰어난 낮 시간에, 가장 지루한 학교 공부를 하고, 졸음과 피곤이 찾아오는 밤 시간에 학원에서 새로운 걸 가르친다. 그것도 주입식 공부로. 아이들을 이렇게 키우니 나중에 직장인이 되어도 근무 시간에는 능률이 떨어지고 꼭 야근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거다. 인생을 잘 사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다. 현재에 충실한 것. 너무 먼 미래를 바라보고 달리느라 아이들은 현재에 집중하는 법을 모른다. 아이들이 게임 속, TV 속 가상 현실에서 몰입의 즐거움을 찾는다고 부모가 걱정하는데, 그건 전적으로 부모 탓이다. 공부를 즐기지 못하도록, 현재를 즐기지 못하도록, 스포일러를 잔뜩 주입한 게 누군데. 

 

아이가 어려서 학원 안 가고 반항을 일삼는다면 크게 될 조짐이다. '체제 반항적이니까 뛰어난 예술가나, 도전정신을 가진 창업자가 되겠군.' 하고 생각하시라. 스티브 잡스를 보라. 대학도 때려치우고 나온 사람이다. 우리 시대에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이 입양아라는 점에서, 부모의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아니 때로는 부모의 과도한 사랑과 관심이 아이에게 오히려 더 큰 장애물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든다.

 

육아의 즐거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깜짝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와우, 얘가 벌써 이런 생각을 다 하네?' '와, 벌써 저렇게 어른스런 말도 할 줄 알아?' 비슷한듯 서로 너무나 다른 두 딸을 키우면서 매일 놀라는 즐거움을 누린다. 두근 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이 아이들이 어떻게 커갈 지 지켜보고 싶다. 그런 점에서 스포일러는 정말이지, 사양이다. 

 

 

아내의 생일 파티를 준비하며 선물을 포장하는데, 갑자기 민서가 포장용 리본을 제 머리에 달더라. 자기 자신이 엄마에게 줄 선물이란다. 맞다, 선물. 귀엽고 깜찍하고 때론 웃겨주기도 하는 종합선물셋트. 아이의 미래는 포장지에 꼭꼭 싸서 숨겨두고 싶다. 그리고 무엇이 나오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내 아이가 직접 선택한 미래라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민서야, 아빠를 놀라게 해줘.'

 

지난 30년간 세상이 바뀐 걸 보면, 앞으로 30년의 변화는 더 엄청나고 놀라울 것이다. 내겐 상상도 가지 않을 미래 세계에서 살 아이다. SF 소설의 주인공마냥 다루고 싶다. 내 짧은 식견으로 아이의 삶을 재단하기보다 믿고 맡기고 보겠다. 그게 스포일러 없이 육아를 즐기는 길 아닐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