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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여행예찬/은퇴자의 세계일주

이토록 다정한 대만

by 김민식pd 2026. 2. 26.

대만 여행을 처음 갔던 건 2015년입니다. <여왕의 꽃>이라는 드라마 촬영 때문에 갔어요. 한번은 사전 답사하러, 한번은 촬영하러. 가오슝이라는 도시에서 협찬을 받아 갔는데요. 우리나라는 추운 겨울인데 그곳은 따듯한 여름이라는 게 신기했어요. 동남아도 아닌데 겨우 3시간 비행해서 가는 이웃 나라에서 이렇게 따듯한 날씨를 만날 줄이야! 가오슝 관광공사 공무원이 촬영팀에게 돌린 쩐주나이차(버블 밀크티)도 맛있었고요. 시내 곳곳의 풍광도 예뻤어요. 

퇴직 후 겨울에는 따듯한 나라를 찾아다닙니다. 재작년에는 미얀마, 작년에는 스리랑카로 한 달 여행을 다녀왔어요. 스리랑카 여행의 만족도는 좀 많이 떨어졌어요. 숙소도 관광지 입장료도 바가지가 심했거든요. 1박에 5만 원하는 방이 에어콘도 없어요. 관광지 식당은 메뉴 당 1만 원이 넘고요. 돌아오는 길에 다음 여행으로 대만을 골랐어요.

일단 대만의 숙소는 1인실 평균 요금이 3만 원대였어요. 야시장에서는 저녁 한 끼에 5천 원에 해결할 수도 있어요. 돈을 아끼는 재미가 있어요. 전철 같은 대중교통도 잘 되어있지만, 전국적으로 깔린 공유 자전거 대여 시스템도 무척 만족스러웠어요. 그래서 결심했어요. 앞으로 당분간은 매년 대만에 오자고. 즉 더 나은 대안을 발견할 때까지는 대만을 올 거예요. 올해도 발리 한 달살이에, 라오스 배낭여행에 이어 대만을 왔는데요. 셋 중 가장 좋은 건 대만, 역시 나는 대만족이에요.

대만 여행을 오기 전에 대만에 관한 책을 읽었어요. 그중에는 이수지 작가의 <이토록 다정한 대만이라니>라는 여행 에세이가 있어요. 저자는 대만이 묘하게 다시 가고 싶어지는 곳이라고 해요. 화려해서라기보다, 맛있어서라기보다, 어쩐지 마음을 내려놓게 하는 어떤 ‘온기’ 때문이라고.

11월의 추운 어느 날, 소셜커머스 광고에 대만 3일 자유 여행 상품이 199,000원이라고 떠요. 저자는 그냥 따듯한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덥석 결제했고요. 이후 10년 동안 17번이나 대만을 찾았답니다. 책을 보니 유명 관광지보다 이름 없는 골목, 유명 맛집보다 골목 식당, 계획된 일정표보다 사람과의 우연한 만남이 더 좋았다고 이야기하는데요.

타이베이의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타이난의 햇빛에 바랜 간판들, 가오슝의 바닷바람과 노을 이 모든 것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길을 묻는 여행자에게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들이라고요. 가오슝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책을 읽다 ‘뭐야 그냥 ‘대만 사람들 정말 착하고 다정해요’가 핵심 내용이네? 이건 그냥 개인의 경험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요.

저는 퇴직하고 짝수달마다 해외 여행을 다닙니다. 전 세계 50개국 이상을 다니며 내린 결론. 어느 나라 사람이 특별히 착하고, 어느 나라 사람이 특별히 불친절하고, 그런 건 없어요. 어디나 좋은 사람이 있고, 안 그런 사람도 있어요.

그러다 가오슝에서 자전거를 타다 재미난 경험을 했어요. 가오슝은 대만의 부산 같은 곳이에요. 항구가 있고, 타이베이에서 오는 고속철도가 있죠. 아이허라는 강이 있는데요. 강변을 따라 조성된 자전거 길을 달리는 게 참 좋아요. 자전거를 배에 싣고 건너편에 있는 치진에 가면 예쁜 해변이 있어요. 매번 가오슝에 올 때마다 자전거로 즐겨 찾는 코스입니다.



구글 지도에 여객선 터미널의 위치를 물어보니 이렇게 나와요. 갔더니 관광유람선이 있어요. 내가 원하는 건 마을버스처럼 10분에 한 번씩 다니는 여객선이에요. 할 수 없이 지나가는 행인에게 물었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치진으로 가려고 하는데요. 어디로 가야 하나요.” (니하오, 워 쉬 한궈런. 워 샹 취 치진. 쩐머 쪼우?) <중국어 첫걸음의 모든 것>에 나오는 기초 회화 예문을 외운 덕분에 이 정도는 말할 수 있어요.

문제는 말은 외워서 하는데 상대방의 말은 잘 못 알아들어요. 대충 사람이 가리키는 방향과 숫자만 들려요. “저쪽 방향으로 %%%하세요. ###가 있는데, 거기서 @@@하지 말고 &&&하세요. 10분 정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요. 아저씨가 손으로 가리킨 방향으로 자전거를 달립니다. 가다 보니 길이 없어요. 응? 이건 구글 지도에서 말하는 장소와 멀어지는데? 이럴 때는 다른 사람에게 또 물어봅니다. 구글 지도가 알려준 곳으로 다시 갔어요. 이번에는 근처에 청소하시는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었어요. 막 웃어요. 엄청나게 유쾌하신 분인데 웃으면서 계속 뭐라 뭐라 하는데, 대충 파악하기로는...
“당신 아까도 어떤 남자한테 길 물었잖아. 그때 잘 가르쳐주더만. 그대로 가면 되는데 왜 또 왔어. 저쪽 방향으로 가라니까. 그런데 그냥 가면 길이 막혀서 돌아가라고 한 거야. 쭉 가다보면  ###가 있는데, 거기서 @@@하지 말고 &&&하면 돼.”
음...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 같은 이야기를 한다면, 그게 맞다는 뜻이지요. 이제는 믿고 길을 계속 따라가 봅니다. 그러다 보니 아! 구산 여객선 터미널이 나오네요. 

이게 올바른 경로입니다. 아, 구글 지도는 왜 이걸 안 가르쳐줬을까요?

그냥 제 생각인데요. 구글 검색은 유료 광고가 있잖아요. 어쩌면 관광객을 위한 유람선 터미널로 사람들을 유도하는 거죠. 내가 찾는 건 여기 일반 시민들이 이용하는 저렴한 여객선 터미널인데. 그런데 막상 배를 타려고 보니 탑승장이 안 보여요. 근처에 장기를 두는 노인들이 몇 분 계시기에 여쭤봤어요. 또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저쪽으로 가면 ###가 있는데, 거기서 @@@하지 말고 &&&하면 돼.”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니 탑승장이 있는데, 어라? 직원이 막네요. 여기는 일반 여객 탑승장이고, 자전거를 싣고 배에 타려면 나가서 반대편으로 가라고요. 나가서 터미널을 돌아 자전거 탑승장을 찾는데요. 아까 본 할아버지가 스쿠터를 타고 쫓아와서 다시 알려줍니다. “그러니까 내가 ###가 있는데, 거기서 @@@하지 말고 &&&하라고 했잖아.” 

그제야 알겠어요. 내가 자전거를 타고 있으니, 세 사람 다 자전거를 싣고 배를 타는 법을 알려준 거죠. 내가 또 엉뚱한 입구로 가니까 그걸 본 노인이 아예 스쿠터를 타고 쫓아온 거고요. 아, 대만 사람들은 왜 이렇게 다들 다정한 거죠? 다섯 번째 온 대만인데, 이번에도 또 어김없이 이 나라에 반하고 갑니다.



설 연휴에 포얼 예술 문화 특구에 갔더니 사자춤 공연을 했어요. 



공짜 구경을 하며 마냥 즐거운 짠돌이~^^



<여왕의 꽃> 촬영지였던 치진 가오슝 등대에서 사진을 찍었어요. 일하러 왔던 곳에 놀러 오니까 정말 좋으네요. 이게 은퇴자로 사는 즐거움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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