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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2017 MBC 파업일지

꽃을 보고 화가 나기는 처음일세

by 김민식pd 2012. 4. 26.

눈을 떴다. 낯선 공간. 둘러본다. 코 앞에는 낯선 남자가 자고있다.

 

고개를 돌리니 눈부신 조명이 눈을 찌른다. MBC 로비다. 천정에 조명은 저렇게 생겼구나. 16년을 다닌 회사가 왜 이렇게 낯설지? 아, 로비에 누워서 천정을 올려다 본 적이 처음이구나. 새벽 4시. 난 지금 로비에서 노숙 농성을 하고 있다. 내 옆에는 포항 지부에서 올라온 조합원 수십명이 함께 자고 있다. 

 

 

누군가 침낭 속에서 뒤척이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야."하고 볼멘 소리를 한다. 즐거운 파업을 하자고 해놓고 노숙을 강요하자니 미안하다.

 

어제는 25일 월급날이었다. 이번달에도 월급은 한푼도 들어오지 않았다. 매일 새벽부터 밤까지 회의하랴, 집회 프로그램 짜랴, 그 어느때보다 더 열심히 회사를 위해 일하는데, 정작 월급은 나오지 않는다.

 

회사 근처 한 은행이 요즘 대박이 났단다. 긴급 생활 자금 지원을 위해 은행을 MBC 직원들 덕분에. 은행은 예금보다는 대출로 돈을 버는데니까... 파업중인 MBC 노조원을 위한 특판 금리라 많은 동료들이 만세를 부르며 달려갔다는 얘기에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다. 한 후배 피디는 조심스레 물어본다. "파업이 언제까지 갈까요?" "왜?" "추가 대출을 받아야 할 것 같아서요." 

삶이 망가지는 건 순간이구나.

 

 

로비를 둘러보다보니 한쪽 구석에 즐비한 화분이 눈을 찌른다. 어제 하루 종일 100여개의 난 화분이 로비로 배달되더라. 인사 발령 나고 승진한 사람들에게 온다. 김재철 체재를 수호한 공을 인정받아 승진한 이들.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라면 승진하기 힘들었을 사람들이, 파업을 틈타 부역에 앞장서고 그 댓가로 승진이라는 떡고물을 챙겼다. 

 

 

 

꽃을 보고 화가 나기는 처음일세.

 

꽃을 보고 화가 나다니! 이런 바보같은 경우가 또 어디있는가? 

 

드라마 촬영하면 연출은 또라이가 된다. 뜨는 해를 보고 화를 내고, 내리는 비를 보고 화를 낸다.

"아직 밤씬이란 말이야!" "지금은 비오면 내일 방송 펑크거든!"

 

뜨는 해도 죄가 없고, 피는 꽃도 죄가 없거늘,

왜 난 아직도 세상이 내 뜻대로 되어야한다는 아집에 사로잡혀 있을까?

 

 

파업 88일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가자.

주말 동안, 남도 자전거 여행을 떠나야겠다.

산천에 가득한 꽃을 보며 다시 마음 속에 피어나는 독기를 다스려야겠다.

 

이 싸움, 질긴 사람이 이긴다. 

아니 승부에 관계없이 난 일단 즐기고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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