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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가장 적절한 위로는 무엇일까?

by 김민식pd 2018. 12. 7.

저는 강연을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책의 저자가 도서관에 찾아와 저자 강연을 할 때는 열 일 제쳐두고 달려갑니다.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저자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도 좋아요. 독서와 강연은 선순환입니다. 책을 읽고 저자에 대해 관심이 생기면, 강연에 쫓아가고요. 강연을 듣고 저자에게 반하면, 그의 책을 더 찾아 읽게되지요. 정혜신 선생님의 도서관 특강을 듣고 신작 <당신이 옳다> (정혜신 / 해냄)을 읽었어요. 

정혜신 선생님은 최근 15년의 세월을, 1970년대 고문 생존자와 자살이 이어지던 해고 노동자, 세월호 유가족 등의 국가 폭력 피해자들과 함께 지냈어요. 사회적 재난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오는 이들이 있어요. 자원 봉사자와 전문가들이지요. 세월호 유가족을 돕기 위해 달려온 자원 활동가들은 무엇을 해야 하나 하고 처음엔 우왕좌왕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마침내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되지요. 자격증이 있는 전문가들은 처음엔 활약을 보이다 시간이 지나면 곧 존재감을 잃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아요. 심지어 피해자들에게 거부를 당해서 떠나기도 하고요.

왜 그럴까. 왜 심리치유 전문가일수록 현장에서 실패하는가. 사람 목숨이 경각에 달린 현장에서 전문가가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많은 경우 그렇다면 그때의 자격증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관련 자격증을 가졌으니 오해를 무릅쓰고 정신의학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정신의학은 신경증, 정신 질환 등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기 위한 임상적, 학문적 틀 위에 세워진 의학의 한 분야다. 이 틀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의 고통과 갈등을 질병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전통을 유지한다. 그래서 정신의학은 사람을 '사람'보다는 '환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중략)

트라우마 피해자들은 자신을 환자가 아닌 고통받는 사람으로 바라봐주길 바란다. 특별한 욕심도 아니다. 전문가라면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약물 처방 말고, 들어주기 어려운 자신의 끔찍한 고통에 집중하고 깊이 이해하고 알아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위의 책 15쪽)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모든 사물이 못으로 보인다는 말이 있어요. 누군가 아픔을 호소할 때, 가장 좋은 위로는 일단 그의 말에 귀기울이는 것이라 생각해요. 상대의 문제에 대해 함부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건 때로는 상처가 될 수 있어요. 어려서 따돌림을 당할 때, 학급회의에서 따돌림의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한 적이 있어요. 반 친구들끼리 누군가의 외모를 비하하는 별명을 지어 부르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고요. 

아이들이 그랬어요.

"장난으로 하는 건데, 그 정도도 못 받아주냐?"

어떤 애는 그래요. 

"네가 못 생긴 건 사실이잖아. 우리가 틀린 말 한 적 있어?"

너무 괴롭고 힘들었어요. 우울한 표정으로 지내는 걸 보고 아버지가 물었어요. 학교에서 무슨 문제가 있냐고. 솔직하게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전교 일등이 따돌림 당하는 거 봤냐? 네가 공부를 잘 했다면 그런 문제는 없을 거야."

"네가 오죽 만만해 보이면 애들도 그러겠냐."

아버지가 내놓은 답은, 충고를 빙자한 비난이었어요. 더욱 깊이 좌절했지요.  

그 다음부터 저는 고민이 생기면 함부로 다른 사람과 상의하지 않아요. 그냥 조용히 책을 읽습니다. 어차피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타인에게 털어놓지 못한 괴로움은 글로 풉니다. 글을 쓰다보면 마음이 좀 풀리거든요. 누군가 고통을 호소할 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누군가 고통과 상처, 갈등을 이야기할 때는 '충고나 조언, 평가나 판단(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대화가 시작된다. 충조평판은 고통에 빠진 사람의 상황에서 고통은 소거하고 상황만 인식할 때 나오는 말이다. 고통 속 상황에서 고통을 소거하면 그 상황에 대한 팩트 대부분이 유실된다. 그건 이미 팩트가 아니다. 모르고 하는 말이 도움이 될 리 없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안다고 확신하며 기어이 던지는 말은 비수일 뿐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일상의 언어 대부분은 충조평판이다.

"그런 생각은 잊어. 너한테 좋을 게 하나도 없어." - 충조

"그럴수록 네가 더 열심히 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지." - 충조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어봐." - 충조

"그건 너를 너무 사랑해서 한 말일 거야." - 평판

"네가 너무 예민해서 그런 거 아니니?" - 평판

"남자는 다 거기서 거기야, 별다른 사람 있는 줄 아니." - 충조평판

(위의 책 106쪽)


책을 읽다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돌아보니, 저도 요즘 저런 언어를 많이 쓰고 있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함부로 충고하고 조언하고 있더군요. 모르는 게 많아 계속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공부의 방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인데, 자꾸 아는 척을 하고 있었군요.  

어려서 내게 상처 준 사람의 언어로, 어른이 된 내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등골이 서늘합니다. '충조평판' 네 글자를 머릿속에 기억해두려고요. 후배나 아이들이 고민을 토로할 때, 충조평판 없이 '아, 그렇구나.' '그래서 요즘 마음은 어때?' '아, 얼마나 많이 힘드니?' 하고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겠어요. 반드시 내가 답을 줘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려고요. 상대가 필요한 건 충고나 조언보다, 어쩌면 자신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주는 한 사람일 수 있으니까요. 

많은 이들이 힘들어하는 시대에요. 이런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 없을 땐 일단 하지 말아야 할 4가지 '충조평판'을 멈추는 연습부터 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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