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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현미경과 망원경 사이

by 김민식pd 2018. 11. 27.

(지난 글에서 이어집니다.)

2018/11/26 - [공짜 PD 스쿨/짠돌이 독서 일기] - 한승태 작가 덕질일기

국회도서관보다는 양돈장을 더 편안하게 느끼는 작가님 덕분에 책에 주로 나오는 건 통계자료보다 생생한 축산업계의 현실입니다. 책상머리에 앉아 쓴 책이 아니라 부화장이나 양돈장, 개 도축 현장을 찾아다니며 몸으로 쓴 책이니까요. 우리에게 고기를 제공하는 닭과 돼지가 어떤 과정을 통해 태어나고 살아가다 죽음을 맞이하는지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기록합니다. 책 서두에 나오는 “클로즈업은 통계의 대척점”이라는 말이 이 책의 기본정신을 말해줍니다. 케이지에 갇힌 동물에 대해 디테일한 묘사로 글을 완성합니다. 

지난 몇 년 기회가 있을 때마다 SNS를 통해 출판사에 문의했어요. 한승태 작가의 다음 책은 언제 나오느냐고. 차기작이 가장 기대되는 작가라고요. 그런 인연으로 추천사 원고 청탁을 받게 됩니다. ‘피디님이 오랜 시간 기다려온 한승태 작가의 신간이 나옵니다. 추천사를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제와 고백하자면 <고기로 태어나서>의 추천사를 쓰는 건 쉽지 않았어요. 시중에 나온 책을 읽고 리뷰를 쓰는 일과 아직 나오지 않은 책에 대해 추천사를 쓰는 건 많이 다르더군요. 부담도 있고요. 무엇보다 식용으로 사육되는 닭과 돼지와 개의 삶이 그토록 비참한지 몰랐어요. 제가 기억하는 닭과 돼지의 모습은 어려서 본 풍경의 일부였어요. 시골집 마당에 풀어 키우던 닭이나 헛간에서 오순도순 모여 꿀꿀거리던 돼지 가족만 떠올랐지요. 현대식 축산업의 현실은 너무 다르더군요. 효율성의 극대화라는 게 이렇게 잔인한 일인지 몰랐어요. 사료 값을 하지 못하는 닭이나 돼지들, 즉 알을 자주 낳지 않는 닭이나 체중이 빨리 늘지 않는 돼지들이 도태되는 장면에서는 원고를 덮고 눈을 감기도 했어요. 덜컥 겁이 났습니다. 이 책을 다 읽고 육식을 포기하면 어떡하지? 

저는 술 담배 커피를 하지 않습니다. 골프나 도박도 안 하고요. 독서가 최고의 낙이에요. 책만 읽어도 사는 게 얼마나 즐거운데, 굳이 알코올, 니코틴, 카페인의 도움을 받아야하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고기로 태어나서>를 읽고 동물성 단백질까지 끊어야 할 판이었어요. 육식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죄책감을 안고 책을 읽었지요. 개돼지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한승태 작가의 글은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을 주거든요. 비참하고 끔찍한 상황에서도  재기발랄한 유머가 수시로 터져 나옵니다. 

한승태 작가는 온몸의 감각을 돋보기로 활용합니다. 농장에서 일하며 겪는 모든 일에 볼록렌즈가 된 양 미세한 디테일까지 꼼꼼히 들여다봅니다. 마치 인간 현미경 같아요. 글을 쓸 때는 렌즈를 뒤집어 망원경 모드로 변신합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했던가요. 거리두기를 통해 유머를 완성합니다. 농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희극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거의 지구를 벗어나 외계인의 시선으로 봐야할 지경입니다. 한승태 작가는 배율 좋은 천체망원경 같은 사람입니다. 르포 작가로 일하지만 위장취업자라기보다 지구인으로 변장한 외계인 같아요.

‘이 책은 멸종 위기로부터 3억 광년 정도 떨어진 곳에 서식하는 동물들을 찾아 떠난 여행을 기록한 글이다.’

책을 여는 글은 어느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생태계 탐사를 마치고 쓴 보고서의 첫 문장 같습니다. 외계인의 시선으로 보면 유전자의 일치도 면에서 근친이라 할 수 있는 동물에게 인간이 하는 행동은 동족상잔의 비극처럼 보이겠지요. 동남아 사람과 한국인의 외모를 구분하기 어려운 외계인 학자라면 한국인 고용주의 노동자 차별을 이해하기 어려울 거예요. 이처럼 작가는 거리두기를 통해 유머와 위트를 완성하고요, ‘맛있는 고기’와 ‘힘쓰는 고기’ (사육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미안하게도, 그 결과 낄낄거리며 읽을 수 있는 책이 나왔습니다.

한승태 작가에게 배운 게 두 가지입니다. 매일 매일 일기 쓰듯 꾸준히 기록하는 자세와 글은 무조건 재미나게 써야 한다는 것. 저도 매일 글을 썼습니다. 박근혜 정권하에서 망가진 공영방송에 대해 2013년부터 <PD 저널>이나 <뉴스타파>에 계속 기고했어요. 2018년 정권이 바뀌고 공영방송 정상화 투쟁을 시작했을 때, ‘지난 5년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촛불혁명에 숟가락 얹으러 기어 나오느냐’하고 비아냥대는 이들이 있었어요. 그런 말들이 저를 괴롭히지는 않았어요. 제 블로그가 제 싸움의 증명이었거든요. 저는 5년 동안 침묵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저의 글이나 외침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의 싸움을 알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더 꾸준하게, 더 재미나게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출근하면 매일 한번 사장 퇴진 구호를 외쳤고요. 페이스북 라이브를 할 때도, 팟캐스트에 나갈 때도, 의미보다 재미를 중점에 두고 원고를 썼습니다. 한승태 작가의 책이 가르쳐줬거든요. 아무리 힘들어도, 웃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올 봄, 시사주간지 <시사인>을 보다가 한승태 작가의 새로운 글을 만났습니다. 지난 3월 작가는 광주로 가서 정의당 소속 후보의 캠프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셨더군요. 다음 책을 위한 취재의 일환이랍니다. ‘민주당 안 찍고 기아 타이거즈 팬이 아니라면 살기 고달프다’는 광주에서 그는 정의당 후보의 유세를 도우며 자원봉사자로 일합니다. 선거 운동이야 말로 감정노동의 극단이라는데요. 고난의 가시밭길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건 한승태 작가의 운명인가 봅니다. 이 재주 많은 이야기꾼이 인간의 천태만상을 드러낼 선거판을 겪으며 또 어떤 이야기를 써낼지 궁금합니다. 적어도 다음 책에서는 육식을 끊어야 하나 하는 고민은 안 들겠지요. 르포 작가로서 매번 극한 직업에 도전하는 한승태 작가의 오늘을 응원합니다.

(기획회의 11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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