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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한승태 작가 덕질일기

by 김민식pd 2018. 11. 26.

휴대폰에 메일 도착 알람이 떴습니다.

‘안녕하세요. 김민식 PD님. 처음 인사드립니다. 출판전문지 <기획회의> 편집팀장입니다. 이렇게 인사드릴 수 있게 되어 반갑습니다. <기획회의> 476호(2018.11.20) 이슈로 “한국의 기록자들”(가제)이라는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전체적인 기획의도는 기록문학의 중요성을 살펴보고, 한국의 기록자들을 주목해본다는 것입니다.’

원고 청탁 메일을 읽다가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2011년에 블로그를 개설하고 매일 한 편씩 글을 올린 지 어언 8년, 내가 “한국의 기록자들” 중 하나로 호명되는 날이 오는구나, 럴수, 럴수, 이럴 수가!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생각도 들어요. 책 읽은 이야기, 영화 본 이야기, 여행 다닌 이야기를 올리는 소소한 블로그를 가지고 기록문학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런 과분한 원고 청탁은 사양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 고민은 이어지는 글 덕분에 금세 사라졌습니다.

‘한국의 기록자들 중에서도 한승태 작가님께서 보여주고 계신 『고기로 태어나서』는 기록물의 측면에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꼭 주목해봐야 할 활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관련하여 추천사를 쓰신 PD님께서 한승태 작가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써주시리라 믿고, 연락드려요.’

그럼 그렇지.......

이제 새로운 고민이 고개를 듭니다. 문학 평론가나 서평가도 아닌 내가 감히 한승태 작가에 대해 쓸 수 있을까 하고요. 한승태 작가의 첫 책 <인간의 조건>을 만난 건 2013년 초의 일입니다. 2012년에 MBC 노동조합 부위원장으로 일하며 170일간 파업을 진행했습니다. 파업이 끝나고 드라마 피디로 복귀할 날만 기다렸는데요.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현업 복귀가 힘들어졌어요. 정직 6개월에 대기발령에 교육발령까지, 끝없는 징계로 괴로운 날이 이어졌지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간절하게 물었습니다. “요즘 뭐 재미난 책 없어?” 현실도피로는 독서가 최고거든요. MBC 노조 집행부 동료가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을 소개해줬어요. ‘<인간의 조건>? 앙드레 말로? 중국 공산당이 장개석의 군벌에 의해 떼죽음 당하는 이야기? 지금 상황에서 그런 책이 눈에 들어올까?’ 한국의 젊은 작가가 쓴 동명의 책이라고 하더군요. “한번 읽어봐. 진짜 재미있어.” 동료의 말에 책을 집었습니다.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라는 책은 한승태 작가가 5년간 우리 사회에서 가장 고된 노동 현장을 경험하고 써낸 책이에요. 임용고시를 준비한다고 집을 나온 저자는 혼자 힘으로 생계를 꾸리기 위해 생활정보지에서 일감을 찾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 살며 밭일도 하고, 돼지 농장에서 똥도 치우며 살아요. 당시 저는 구속영장 청구며, 징역2년형 구형이며 검찰에 시달리던 터라 MB 정부 치하에서 공정방송을 꿈꾸는 피디와 기자야말로 극한 직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한국 사회의 또 다른 노동 현실을 접하고 조용히 투덜거림을 멈춥니다. 책을 읽다가 몇 번이나 폭소를 터뜨렸어요. 이런 상황에서 내가 웃고 있다니, 지금 제 정신인가? 하는 반성도 잠깐, 도대체 이 작가는 어떻게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재미난 글을 쓰지? 궁금했어요. 잡지 리뷰 게재를 핑계로 출판사에 연락을 해 합정동 어느 카페에서 작가를 만났지요.

험한 노동 현장에서 노가다 일에 이골이 난 작가를 상상하며 우락부락한 인상에 다부진 체격을 예상하고 나갔는데, 겨우 서른 남짓 앳된 표정이 남아있는 키다리 청년이 나왔어요. 책상에 앉아 글공부할 선비 같은 인상이라 험한 일 하는 곳에서 일을 구할 때 어려움은 없었는지 궁금했지요.

“제가 일자리를 찾는 곳에서는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꽃게잡이 배든 돼지 농장이든, 늘 일손이 부족한 곳이고, 사람들이 오래 버티지 못하는 일터라 젊은 사람이 하겠다고만 하면 무조건 환영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대우가 좋다거나 급여를 확실하게 챙겨주는 건 아니지만요.”

힘든 노동현장에서 어떻게 이렇게 유쾌한 책을 쓸 수 있는 지 궁금했어요.

“누구나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열악한 노동 현장에 관한 책이라고 관심 있는 관계자끼리만 돌려보는 ‘내부문서’처럼 쓰고 싶지는 않았어요. 평소 이런 책을 보지 않는 ‘외부인’들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쓰는 게 목표였습니다.”

드라마 작가 지망생 중에서도 편의점에서 알바 뛰고 고시원에서 생활하며 극본공모에 응시하는 이들이 꽤 있습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면 결국 생계를 위한 일을 하는데 지쳐 글쓰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극단적인 노동 환경에서도 꿋꿋이 글을 쓴 한승태 작가의 비결이 궁금해졌지요.

“저는 책을 썼다기보다 그냥 매일 일기를 썼습니다.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으면 힘들 수 있지만 하루하루 조금씩 글은 쓸 수 있거든요. 일기에 소소한 것까지 기록하는 게 버릇이에요.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다. 누가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의 말도 한 마디 한 마디 그대로 적어두고 나중에 그 글들을 모아 엮으니 책이 되더라고요.”

한승태 작가의 이야기에 영감을 얻어 매일 일기 쓰는 기분으로 블로그에 글을 올렸습니다. 누구는 꽃게잡이 배, 비닐하우스,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도 글을 쓰는데 냉난방이 잘 되는 MBC 주조정실에 앉아 괴롭다고 투덜거리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 느꼈어요. 다양한 육체노동을 경험한 한승태 작가는 그 중에서 가장 힘든 일로 편의점과 주유소 알바를 꼽습니다.

“감정 노동이 더 힘들거든요. 서비스 업종은 하루 24시간 근무하는 기분입니다. 일할 때 겪은 괴로움이 집에 와서도 계속 생각나서 하루 종일 일하는 것처럼 힘들어요. 돼지 똥을 푸는 건 억울하진 않거든요. 그건 그냥 일이니까요. 하지만 편의점이나 주유소에서 일하다 손님에게 모욕을 받으면 그건 계속 머리에 남아요. 앙갚음할 수도 없으면서 분한 마음만 남아있으니 계속 집에 와서도 그 생각만 붙들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편의점 알바에겐 자유시간이 없는 셈이죠. 똥 치우는 일도 근무시간이 지나면 일은 끝나는데 말이죠.”

일본 작가가 쓴 <편의점 인간>이라는 소설을 읽으며 잠시 한승태 작가를 떠올린 적이 있어요. 그 소설가는 아직도 편의점에서 일을 하며 책을 쓴다고 하더군요. 일본 사회에서 사람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합니다. 그런 환경이라면 편의점 직원의 감정 소모도 덜하지 않을까, 그렇기에 편의점 근무를 하면서도 소설가 겸업이 가능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편의점이나 주유소 알바보다 돼지농장에서 똥 치우는 게 낫다고 말하던 한승태 작가는 사람들 곁을 떠나 동물들을 찾아갑니다. 시골로 가서 농장을 찾아다니지요. 식용 동물 농장 열 곳에서 일하며 생활하며 쓴 ‘맛있는’ 고기와 ‘힘쓰는’ 고기에 대한 기록을 들고 돌아옵니다. 그 책이 바로 <고기로 태어나서>입니다.

(다음편에서 이어집니다.)

2018/11/27 - [공짜 PD 스쿨/짠돌이 독서 일기] - 현미경과 망원경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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