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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

좌절의 시스템, 공채

by 김민식pd 2018. 11. 30.

방송사에 다닌다고 하면 주위에서 "아, 그 어려운 언론고시에 합격하셨군요."라고 해요. 그럼 웃으면서 머리만 긁적입니다. 저는 이게 언론고시인줄 몰랐어요. 고시라고 생각했다면 지원할 엄두도 못냈겠지요. 제가 입사한 1990년대엔 토익 점수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에 MBC 지원한 사람도 있어요. 저는 아주 운좋게 합격했어요. 평소 책을 많이 읽은 덕에 논술이나 면접은 어렵지 않았고요. 합숙 평가에 가서는 춤을 추면서 장기 자랑도 했어요. 최종 면접에 올라가서는 임원들을 개그로 웃겨드렸고요. 합격 통보를 받고는 저도 놀랐어요. 방송사는 사람을 참 재미나게 뽑는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2000년 이후, 경쟁률이 치열해진 탓에 언론고시라고 불리지요. MBC 드라마 신입 피디 경쟁률은 이제 1200 대 1입니다. 1명이 붙고, 1199명이 탈락하는 경쟁, 이건 모든 사람을 좌절시키는 시스템이지요. 

저는 장강명 작가의 열성팬입니다. 그는 연세대 도시공학과를 나와 동아일보 기자에 합격했어요. 전공과 관계없이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지요. 기자 생활을 하며 틈틈이 글을 써요. 신인 작가 공모전을 준비하기 위해 연차 휴가를 내고 틀어박혀 소설을 씁니다. 기자로 일하며 당선되고요. 전업작가의 길을 걷기 위해 남들이 '언론고시'라고 부러워하는 회사에 사표를 던집니다. 노동하는 자세로 성실하게 소설을 쓰지요. 2010년 이후 한국 문단에서 문학 공모전 최다 수상자가 됩니다. 아, 이런 삶, 정말 멋지지 않나요? 

<열광금지 에바로드>며, <댓글부대>며, <한국이 싫어서>며, 재미난 소설도 많지만 그가 쓴 르포도 있어요. 바로 <당선, 합격, 계급> (장강명 / 민음사).

합격과 당선을 통해 기자나 소설가라는 그들만의 리그에 들어선 장강명 작가가 한국 공채 문화를 들여다보고 내린 결론이 있어요. 

'문학상과 공채는 어떻게 좌절의 시스템이 되었나'

저 역시 궁금한 주제에요. 진로 특강을 다니며, 피디 지망생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럴 때마다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 않아요. 열심히 하라고는 하지만, 쉽지 않다는 걸 알아요. 번번이 고배를 마시고 몇 년 째 재수를 하는 이도 있고요. 좌절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요?

문학 담당 기자가 장강명 작가에게 전화를 합니다. 신춘문예 공모전 지원자들에게 선배 문인으로서 조언을 해달라고.

"떨어져도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네요. 공모전은 소개팅 같은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꼭 내 탓이 아니더라도 인연이 안 닿을 수 있는 거고, 안 되면 다음 소개팅 준비하면 되는 거라고요."

말을 마치고 난 뒤에야 '아, 이게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은 '청년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이 나를 몰라봐 주면 그 원고로 세계문학상에 또 응모하면 된다'는 식의 답을 듣고 싶은 게 아니다. (중략)

"음...... 마감에 쫓기면 무리하게 결말을 바꾸거나 요행을 바라면서 퇴고를 생략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러느니 차라리 이번은 아니다, 다음 공모전을 노리자, 그런 생각으로 원래 쓰려던 글을 쓰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당선, 합격, 계급> 14쪽)

96년에 입사 면접을 볼 때가 기억납니다. 5인의 지원자가 집단면접을 들어갔는데요, 들어가서 시작한 순간 분위기 파악했어요. '아, 잘못 왔구나...' 제가 4번째 앉았는데요. 1,2,3번 지원자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이 분들 평소 TV를 엄청 보더라고요. 거의 문화 비평가 수준으로 당시 방영중인 MBC 프로그램의 장점과 특징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어요. 멘붕이었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저는 TV를 거의 안 보거든요. 그 시간에 책을 읽지. 고민이 들었어요. 지나가면서 몇번 본 유명한 프로에 대해 마치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할까? 그러다 면접에서는 정직이 최선이라던 책의 구절이 생각났어요.

"김민식 씨, 올해 본 TV 프로그램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입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TV를 거의 보지 않습니다. 평소에 독서를 즐깁니다."

"TV도 안 보는 사람이 PD는 왜 지원한 겁니까?"

"저처럼 책을 즐겨 읽는 사람도 볼 만한 TV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만약 짧은 지식으로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다면, 저의 꼼수는 읽혔을 거예요. 입사하고 나서 알았어요. 피디가 평소에 하는 일이 거짓과 참의 구분이더라고요. 드라마 피디가 연기에 대해 NG와 OK를 내는 기준은 진실되어 보이느냐, 아니냐에요. 교양 피디가 인터뷰를 편집하며, 주로 보는 건 화자가 진실을 말하느냐 아니냐겠지요. 십년 넘게 상대가 거짓말하는지 아닌지 들여다보는 걸로 먹고 산 피디들이, 대학 갓 졸업한 20대 청년이 면접장에 앉아 능청스럽게 늘어놓는 거짓말에 속을 리가 없어요. 결국 책의 충고를 따르길 잘했지요. 어떤 순간에도 진실하라는 말.

상대에 맞춰 나를 바꾸기 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최악의 소개팅이 뭔지 알아요? 차이는 게 아니에요. 안 맞는데도 속이고 사귀는 겁니다. 소개팅에서는 A라고 해놓고, 막상 같이 살아보니 B인 경우이지요. '난 죽어도 B랑은 못 살아' 하는 사람이라면 속은 거잖아요. 진실을 말하는 게 최선입니다. 면접이든, 소개팅이든.

장강명 작가는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뭔가 아쉽다고 느껴요. 작가 지망생들에게 뭔가 실질적인 조언을 글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하지요. 방대한 자료 수집과 오랜 취재를 통해 써낸 책이 바로 <당선, 합격, 계급>입니다. 

기업 공채와 문학 공모전이라는 좌절의 시스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런 시스템이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입시 - 공채 시스템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노련한 기자 출신 소설가 답게 그는 한국 사회의 폐부를 찌르는 질문을 던집니다. 피디나 기자 시험을 준비하는 이라면 추천하고 싶고요. 작가 공모전을 지망하는 분이라면 많은 도움이 될 책입니다. 강력 추천합니당!

(이 책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요. 다음 기회에 더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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