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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여행예찬/짠돌이 국내여행

동해안 자전거 여행, 실패의 추억

by 김민식pd 2018. 10. 31.

1998년 MBC 예능국 조연출로 일하던 시절, 노동강도는 살벌했어요. 거의 주당 100시간씩 일을 했고요. 연차를 써 본 적은 없어요. 주말에도 일하고, 연말에도 일하고, 연휴에도 일했지요. 그 시절에는 그렇게 일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고요. 그러던 어느날 기적이 일어납니다. 스포츠 중계 방송 관계로 담당하던 주말 버라이어티 쇼가 2주 연속 결방하게 된 거죠. 그 주 방송분을 다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갑자기 결방이 되어 1주일 정도 쉴 수 있게 되었어요. 사전에 고지된 결방이 아니라 해외여행을 갈 형편은 못 되었어요. 항공권이나 숙박을 예약할 여유가 없었거든요. (해외여행에서 항공권 예매나 숙박 예매가 편해진 건 최근의 일입니다.) 보통은 그럴 때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데요. 저는 눈앞에 동해 바다가 아른거렸어요.

그로부터 10년 전. 대학 1학년 때 자전거 동아리에서 전국일주를 할 때, 가장 아름다웠던 곳이 포항에서 속초까지 올라가는 동해안 구간이었어요. 오른쪽에는 동해바다, 왼쪽에는 설악산, 산과 바다를 동시에 조망하며 자전거를 탔죠. 그 구간을 이번에는 반대로 타보고 싶었어요. 속초에서 포항까지 자전거로 달려야겠다고 마음 먹었죠. 산을 타보고 느낀 게, 똑같은 길이라도 오를 때 보는 풍광이랑 내려갈 때 보는 풍광이 다르더라고요. 동해안 바다, 이번에는 반대길로 내려가며 보고 싶었어요.

고속버스 터미널에 가서, 버스에 자전거를 실었어요. 속초에서 자전거를 내려 바다를 향해 달렸지요. 강릉을 향해 달리는 길은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어요. 87년에는 자전거 동아리에서 함께 달렸기에 길을 헤매는 법이 없었어요. 항상 선두에는 전국일주를 몇번 완주한 경험이 있는 선배가 있었거든요. 동해안 마을길을 요리조리 잘 찾아 달렸어요. 그런데 10년만에 혼자 가니 길찾기가 쉽지 않았어요. 저는 바다를 옆에 끼고 달리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바다로 향한 길을 탑니다. 그러다보면 갑자기 부두나 항만이 나타나며 바다에서 길이 뚝 끊겨요. 다시 큰길로 돌아나옵니다. 몇번 그렇게 고생을 하고 나니, 다음부터는 도로 표지판에 포항이나 삼척이라고 적힌 큰 길로만 달리게 되는데요. 문제는 그러다보니 7번 국도나 산업도로를 주로 타게 된다는 거죠. 옆에 버스나 트럭이 쌩쌩 달려서 겁이 났어요. 동아리에서 같이 탈 때는 10여대의 자전거가 유니폼을 입고 줄을 지어 달리니 차들이 알아서 피하고 그랬는데요, 혼자 가니까 알짤 없어요. 트럭의 경우, 갓길로 마구 밀어붙입니다. 차도를 달리는 자전거를 못마땅해하는 운전자가 많거든요. 갓길이나 인도의 경우, 노면이 불규칙해 사고의 위험이 큽니다. 자전거의 바퀴는 얇아서 작은 자갈 하나만 밟아도 미끄러지거든요. 아스팔트가 훨씬 안전해요. 트럭과 기싸움을 하면서도 차도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버티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당시 제 나이 서른 둘, 겁이 없던 시절이니 가능했지요. 요즘은 절대 트럭이랑 길을 다투지 않아요. 나이 50이 넘으면 뼈가 부러져도 잘 붙지 않거든요. 

한창 신나게 달리는데 날씨가 자꾸 꾸물꾸물 흐려졌어요. 점심 먹으러 들린 식당에서 주인 아저씨가 그러대요. 남해안에 태풍이 상륙해서 동해안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고 있다고요. 오후부터 폭우가 쏟아진대요. 당시 작은 해안 마을에 있었는데요. 그대로 태풍을 만나면 오도가도 못하고 갇힐 참이었어요. 서울 가는 버스가 있는 터미널은 큰 도시에만 있어요. 급하게 밥을 먹고 태풍이 오기 전에 버스 터미널까지 자전거로 달렸지요.

속초 방향으로 핸들을 틀어 다시 올라가는데요. 자전거 핸들바에 달린 백미러로 뒤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오는게 보여요. 태풍을 꼬리에 달고 달리는 형국이었지요. 태풍이 빠른가, 자전거가 빠른가. 나중에 <트위스터>라는 폭풍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태풍을 피해 달아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그때가 생각났어요. 백미러로 몰려오는 먹구름, 은근히 무서워요. 특히 그 백미러가 자전거 백미러라면... 

부슬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비를 맞으며 필사적으로 달립니다. 조금 있으면 태풍이 몰아치고 폭우가 쏟아지겠지요. 다행히 태풍에 따라잡히기 직전에 터미널에 도착했어요. 버스 짐칸에 자전거를 실고 서울로 돌아왔지요. 버스 구석에 비맞은 생쥐 꼴로 앉아 헐떡거리며 숨을 몰아쉬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선해요.  

이후, 한동안 동해안 자전거 여행은 엄두도 못 냈어요. 바빠지기도 했고요. 아내를 만나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하고 그러니 가족 여행을 다니지 혼자 자전거 여행 갈 시간은 없더군요. 그러다 2016년 봄에 동해안 자전거길 개통 소식을 신문에서 접했어요. 피가 끓어오르더군요. '동해안 자전거 길이라니! 달리고 싶다!'

블로그에 올리는 글만 보면 마음 먹은 건 다 하고 사는 것 같지요? 실은 실패의 기억이 더 많아요. 열 가지 정도 도전하면, 7개 정도 실패하고, 3개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그럼 그 세가지로 블로그 글감을 만들지요. 책이나 영화도 마찬가지에요. 읽는 모든 책이 리뷰의 소재가 되지는 않아요. 읽고 글이 떠오르는 책이나 영화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거든요. 

동해안 자전거길 개통 소식을 접한 후, 머릿속에 자전거 전국일주의 꿈을 그렸어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그 고민을 합니다. 그 고민의 결과가 자전거 출퇴근이었어요. 주말 양평 자전거 여행이었고요. 하루 100킬로를 달리는 체력을 만들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실천에 옮기지요.

  

(트럭이나 버스와 길을 다투지 않아요. 이렇게 자전거 전용도로가 동해안을 따라 깔렸으니까요. 인생은 즐거워라라라~~~)   


사는 게 하루하루 즐거워요. 하고 싶은 게 많아서요. 신문에서 책 리뷰를 보면 그 책을 읽고 싶고, 극장에서 영화 예고편을 보면, 그 영화를 보고 싶고, 노트북을 켰다가 바탕화면에 멋진 풍광이 뜨면 그 곳에 가고 싶습니다. 삶은 하루하루가 다 선물입니다.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는 시간이 매일매일 주어지니까요. 살아있다는 건 이래서 참 좋아요.


동해안 자전거 일주, 이번에는 성공할까요?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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