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MBC 예능국 조연출로 일하던 시절, 노동강도는 살벌했어요. 거의 주당 100시간씩 일을 했고요. 연차를 써 본 적은 없어요. 주말에도 일하고, 연말에도 일하고, 연휴에도 일했지요. 그 시절에는 그렇게 일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고요. 그러던 어느날 기적이 일어납니다. 스포츠 중계 방송 관계로 담당하던 주말 버라이어티 쇼가 2주 연속 결방하게 된 거죠. 그 주 방송분을 다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갑자기 결방이 되어 1주일 정도 쉴 수 있게 되었어요. 사전에 고지된 결방이 아니라 해외여행을 갈 형편은 못 되었어요. 항공권이나 숙박을 예약할 여유가 없었거든요. (해외여행에서 항공권 예매나 숙박 예매가 편해진 건 최근의 일입니다.) 보통은 그럴 때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데요. 저는 눈앞에 동해 바다가 아른거렸어요.

그로부터 10년 전. 대학 1학년 때 자전거 동아리에서 전국일주를 할 때, 가장 아름다웠던 곳이 포항에서 속초까지 올라가는 동해안 구간이었어요. 오른쪽에는 동해바다, 왼쪽에는 설악산, 산과 바다를 동시에 조망하며 자전거를 탔죠. 그 구간을 이번에는 반대로 타보고 싶었어요. 속초에서 포항까지 자전거로 달려야겠다고 마음 먹었죠. 산을 타보고 느낀 게, 똑같은 길이라도 오를 때 보는 풍광이랑 내려갈 때 보는 풍광이 다르더라고요. 동해안 바다, 이번에는 반대길로 내려가며 보고 싶었어요.

고속버스 터미널에 가서, 버스에 자전거를 실었어요. 속초에서 자전거를 내려 바다를 향해 달렸지요. 강릉을 향해 달리는 길은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어요. 87년에는 자전거 동아리에서 함께 달렸기에 길을 헤매는 법이 없었어요. 항상 선두에는 전국일주를 몇번 완주한 경험이 있는 선배가 있었거든요. 동해안 마을길을 요리조리 잘 찾아 달렸어요. 그런데 10년만에 혼자 가니 길찾기가 쉽지 않았어요. 저는 바다를 옆에 끼고 달리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바다로 향한 길을 탑니다. 그러다보면 갑자기 부두나 항만이 나타나며 바다에서 길이 뚝 끊겨요. 다시 큰길로 돌아나옵니다. 몇번 그렇게 고생을 하고 나니, 다음부터는 도로 표지판에 포항이나 삼척이라고 적힌 큰 길로만 달리게 되는데요. 문제는 그러다보니 7번 국도나 산업도로를 주로 타게 된다는 거죠. 옆에 버스나 트럭이 쌩쌩 달려서 겁이 났어요. 동아리에서 같이 탈 때는 10여대의 자전거가 유니폼을 입고 줄을 지어 달리니 차들이 알아서 피하고 그랬는데요, 혼자 가니까 알짤 없어요. 트럭의 경우, 갓길로 마구 밀어붙입니다. 차도를 달리는 자전거를 못마땅해하는 운전자가 많거든요. 갓길이나 인도의 경우, 노면이 불규칙해 사고의 위험이 큽니다. 자전거의 바퀴는 얇아서 작은 자갈 하나만 밟아도 미끄러지거든요. 아스팔트가 훨씬 안전해요. 트럭과 기싸움을 하면서도 차도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버티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당시 제 나이 서른 둘, 겁이 없던 시절이니 가능했지요. 요즘은 절대 트럭이랑 길을 다투지 않아요. 나이 50이 넘으면 뼈가 부러져도 잘 붙지 않거든요. 

한창 신나게 달리는데 날씨가 자꾸 꾸물꾸물 흐려졌어요. 점심 먹으러 들린 식당에서 주인 아저씨가 그러대요. 남해안에 태풍이 상륙해서 동해안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고 있다고요. 오후부터 폭우가 쏟아진대요. 당시 작은 해안 마을에 있었는데요. 그대로 태풍을 만나면 오도가도 못하고 갇힐 참이었어요. 서울 가는 버스가 있는 터미널은 큰 도시에만 있어요. 급하게 밥을 먹고 태풍이 오기 전에 버스 터미널까지 자전거로 달렸지요.

속초 방향으로 핸들을 틀어 다시 올라가는데요. 자전거 핸들바에 달린 백미러로 뒤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오는게 보여요. 태풍을 꼬리에 달고 달리는 형국이었지요. 태풍이 빠른가, 자전거가 빠른가. 나중에 <트위스터>라는 폭풍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태풍을 피해 달아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그때가 생각났어요. 백미러로 몰려오는 먹구름, 은근히 무서워요. 특히 그 백미러가 자전거 백미러라면... 

부슬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비를 맞으며 필사적으로 달립니다. 조금 있으면 태풍이 몰아치고 폭우가 쏟아지겠지요. 다행히 태풍에 따라잡히기 직전에 터미널에 도착했어요. 버스 짐칸에 자전거를 실고 서울로 돌아왔지요. 버스 구석에 비맞은 생쥐 꼴로 앉아 헐떡거리며 숨을 몰아쉬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선해요.  

이후, 한동안 동해안 자전거 여행은 엄두도 못 냈어요. 바빠지기도 했고요. 아내를 만나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하고 그러니 가족 여행을 다니지 혼자 자전거 여행 갈 시간은 없더군요. 그러다 2016년 봄에 동해안 자전거길 개통 소식을 신문에서 접했어요. 피가 끓어오르더군요. '동해안 자전거 길이라니! 달리고 싶다!'

블로그에 올리는 글만 보면 마음 먹은 건 다 하고 사는 것 같지요? 실은 실패의 기억이 더 많아요. 열 가지 정도 도전하면, 7개 정도 실패하고, 3개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그럼 그 세가지로 블로그 글감을 만들지요. 책이나 영화도 마찬가지에요. 읽는 모든 책이 리뷰의 소재가 되지는 않아요. 읽고 글이 떠오르는 책이나 영화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거든요. 

동해안 자전거길 개통 소식을 접한 후, 머릿속에 자전거 전국일주의 꿈을 그렸어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그 고민을 합니다. 그 고민의 결과가 자전거 출퇴근이었어요. 주말 양평 자전거 여행이었고요. 하루 100킬로를 달리는 체력을 만들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실천에 옮기지요.

  

(트럭이나 버스와 길을 다투지 않아요. 이렇게 자전거 전용도로가 동해안을 따라 깔렸으니까요. 인생은 즐거워라라라~~~)   


사는 게 하루하루 즐거워요. 하고 싶은 게 많아서요. 신문에서 책 리뷰를 보면 그 책을 읽고 싶고, 극장에서 영화 예고편을 보면, 그 영화를 보고 싶고, 노트북을 켰다가 바탕화면에 멋진 풍광이 뜨면 그 곳에 가고 싶습니다. 삶은 하루하루가 다 선물입니다.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는 시간이 매일매일 주어지니까요. 살아있다는 건 이래서 참 좋아요.


동해안 자전거 일주, 이번에는 성공할까요?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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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동우 2018.10.31 06: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진속에 보이는 저 아파트..굉장히 낯익은데요..
    제가 사는 곳입니다.
    언제 이렇게 오셨다 가셨는지..
    오늘도 제가 산책했던 곳인데..
    항상 응원합니다!!
    화이팅!!

  2. 섭섭이짱 2018.10.31 07: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블로그 글을 보면 모든걸
    완벽하게 준비해서 한번에
    착착착 다 잘 하시는걸로 생각했는데....
    실패하시는것도 있으시군요.
    그래도 실패한 7개 얘기들도
    가끔은 살짝 공개해주세요. ^^

    동해안 자전거 여행하면
    그냥 바다보이는 도로를 따라 달리면
    되는거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쉽지 않은거였군요..
    자전거 길이 요즘 생긴건지 몰랐어요....

    하루하루를 즐겁게 사시는 피디님
    얘기를 매일 매일 읽을 수 있어서
    무척 행복합니다. ^^

    동해안 자전거 여행기 과연 어떠했을지...
    두근 두근하네요

  3. 워기 2018.10.31 07: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 100시간... 글을보니깐 자전거 여행 했던 기억이 나네요ㅎㅎㅎ

  4. 2018.10.31 08: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5. 꿈트리숲 2018.10.31 08: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7번 국도 타고 정동진까지 내달린, 자전거가 아니라 자동차로 내달린 기억이 있어요. 정동진의 일출이 제 평생 일출 중에 넘버원이 되어서 아직도 생생합니다.

    피디님의 성공만 보고 배경이 빵빵할거야, 내지는 재능있으니까 그렇지 할 뻔 했는데 보이지 않는 눈물 겨운 노력과 실패가 있었다니 한편으로는 위안이 됩니다.ㅎㅎ

    별다른 시도가 없어 이제껏 큰 성공도 큰 실패도 없었던 저인데, 더 많이 시도해봐야겠다 싶어요.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시도!!

  6. 김수정 2018.10.31 09: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삶은 하루하루가 다 선물입니다.'
    가슴한 켠에 조명 한 개가 팟하고 켜지는 느낌이 드네요.
    야간 근무 후 피곤한 아침, 따뜻하고 긍정적인 글말에 위안을 얻고 갑니다.

  7. 가리봉맨 2018.10.31 09: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는 내내 즐거워지는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저는 부끄럽지만 자전거를 어른이 돼서 군대에서 배웠습니다.
    어떻게 배웠을지 짐작이 가시죠? ㅎㅎ
    자전거를 생각하면 군대가 연상되서 그리 즐겁진 없지만, 이 글을 읽고나니 다시 타볼까 하는 마음이 슬며시 드네요.

  8. 푸포피 2018.10.31 10: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멋진 삶을 사시는군요 동해안 바다의 경치를 만끽하며 타는 자전거 정말 타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실패했던 동해안 반대편의 질주 완주 꼭 하셨으면 좋겠어요 처음 블로그 들어왔는데 좋은글 힐링 되는글 읽고 갑니다 ㅎ

  9. 이순정 2018.10.31 12: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전거로 부산까지 가는글 보며 글올라올때마다 막~ 설레였는데...
    이젠 동해안..또 기분좋은 설레임 시작입니다

    저도 바구니자전거타고 시장말고 부산으로 출발하는 날을 위해 체력길르는중입니다.

  10. 아리아리짱 2018.10.31 19: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pd님 아리 아리!
    자전거 타고 달리시는 모습이 더절로 떠오릅니다.
    하루 하루가 행복으로 이어지게 노력하는 pd님을
    응원하며 함께 하고자 노력합니다. ^^

  11. The snowball 2018.10.31 21: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열개중에 3개만 성공한다는 피디님의 말씀에 힘을 얻습니다
    저도 실패가 당연한 것인줄 알면서도 실패할 때마다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실패가 당연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즐겁게 살도록 노력해야겠어요

    오늘도 역시 피디님의 좋은 글 읽고 힘을 얻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12. 유진 2018.10.31 2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 오늘 동백에서의 강연 너무나 유익했고 즐거웠습니다. 세바시 통해서 우연히 피디님 알게되고(남편이 저보고 그 유명한 피디를(엠비씨 프리덤) 여태 몰랐냐며...) 공동육아 어린이집 했던 엄마들과 영어회화 암기 카톡방 운영하게 되고 벌써 세 번째 외우면서 이게 참 삶의 활력이 됩니다. 책도 두 권 다 읽고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선물도 하면서 긍정의 에너지를 전염시키도 있어요~늘 지금처럼 행복한 에너지 뿜어주시는 저희들의 멘토가 돼주시길...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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