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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여행예찬/짠돌이 국내여행

낙동강을 달리다

by 김민식pd 2018. 10. 15.

자전거 전국일주 5일차 일기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모텔에 구비된 간단한 아침을 먹습니다. 컵라면, 토스트, 팝콘이 준비되어 있어요. 요기를 하고 자전거를 꺼내 길을 나섭니다. 구미 터미널에서 다시 국토종주 자전거 도로로 가는데 좀 헤맸습니다. 

어려서 저는 울산에서 자라, 공업도시는 다 울산같은 줄 알았어요. 울산의 경우, 공업단지는 바다를 면한 도시 외곽 해안에 있고, 시내에는 주거 시설만 있어요. 구미는 다르더군요. 시내에 작은 공장들이 많습니다. 생뚱맞은 도시 설계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강 건너 공장 지대가 보입니다. 낙동강이 이렇게 큰 강인줄 몰랐어요. 기차나 자동차로 지나칠 때 보던 풍경과는 다르네요. 


강변에는 구미 공업 단지 기념탑이 있습니다.

1973년 9월 30일, 대통령 박정희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금오산 기슭의 쓸모없는 낙동강변 350만평을 땀과 슬기 협조와 단결로써 전자공업단지를 이룩하였다.'

쓸모없는 강변에 공업단지를 왜 애써 만들었을까요? 물류 이동이 쉬운 해안 지역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곳이 박정희 대통령 고향이고, 생가가 있는 곳이니까요. 그 시절에는 이런 일을 하면서도 부끄러움도 없었나 봐요. 세금을 투입하는 대규모 사업을 진행하는데, 사적인 인연으로 밀어붙여도 옆에서 '아니되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던 거지요. 

어려서 경상도에서 나고 자랐어요. 스무 살에 서울에 처음 올라와 느낀 감정은 부끄러움이었어요. 경상도 군인들이 권력을 위해 무고한 시민들을 해쳤다는 부끄러움... 지난 10년, MBC를 망가뜨린 사장들이 하필 저와 같은 지역 출신입니다. 제가 안고 사는 부끄러움은 오래도록 씻을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상념을 뒤로 하고,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습니다. 

종점인 낙동강 하구둑까지 229킬로 남았습니다. 바다를 보러 가는 길이 참 멉니다. 저 거리를 다 내 다리의 힘만으로 가야합니다. 

데크로 잘 깔린 자전거 도로를 신나게 달리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자전거를 끌고 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근처에는 마을이 없어 자전거 가게까지 한참을 끌고 가야 할 듯 합니다. 살펴보니 자전거 체인이 풀어졌어요. 잠깐 자전거를 세우고 봐 드립니다. 

자전거 체인이 벗겨지는 이유는, 대부분 무리한 기어 변경입니다. 오르막이 나타났을 때, 갑자기 기어를 바꾸면 앞 체인과 뒷 체인 사이에 간격이 벌어지며 기어가 빠지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기어 장치에는 스프링이 있어 다시 본래대로 돌아가려는 힘이 있어요. 이럴 땐 끼어를 쭉 한번 바깥으로 빼주었다가 놓으면 제 자리로 쉽게 돌아갑니다. 다만 문제는, 체인에 윤활유가 많아 손에 새카맣게 기름이 묻는데요.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자전거 전국일주를 앞두고 1회용 비닐 장갑을 따로 준비했어요. 바퀴를 분리하거나 간단한 수리를 할 요량으로 챙겼는데, 요긴하게 쓰입니다. 고친 자전거를 타고 가시는 모습을 보니, 흐뭇합니다. 


오늘도 고개를 넘습니다. 정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득합니다. 저 높이를 다 페달을 밟아 올랐다는 게 신기합니다. 4대강 자전거 길이지만, 은근히 산을 타고 고개를 넘는 코스가 많습니다. 강이 산을 끼고 도는 경우, 데크로 따로 길을 내기 쉽지 않을 때는 기존에 있는 임도를 자전거 길로 활용합니다. 한강 달리는 것보다는 좀 힘듭니다. 


경북 상주 낙동강 자전거길 옆에는 도남서원이 있어요. 지역에서는 유명한 관광지인가 봐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비들이 글공부하던 공간에, 쫄쫄이 바지 입은 날라리 차림으로 들어옵니다. 차림새가 민망하지만,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여기를 오랴 싶어 그냥 시침 뚝 떼고 구경을 다닙니다. 

낙동강 자전거 길, 길이 참 좋네요. 1987년에 자전거 전국일주를 할 때는 이런 자전거 전용도로가 없었어요. 그래서 국도변을 달렸는데요. 항상 덤프 트럭이나 관광 버스와 길을 다투어야 했어요. 시골 국도로 달리는 대형 차량들은 자전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바로 옆으로 덤프 트럭의 커다란 바퀴가 위협하듯 바짝 붙어 지나가면 겁이 덜컥 납니다. 스무살, 겁없던 시절이니 가능했던 여행입니다. 나이 50에 제가 다시 자전거 전국일주에 도전할 수 있는 건, 전국적으로 자전거 전용도로가 만들어진 덕분이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체력은 약해졌지만, 세상이 좋아졌어요. 그 덕에 다시 전국일주를 가는 거지요.

점심을 먹으려고 식당에 들렀어요. 나오는 길에 주인 아주머니가 물었어요.

"비에 맞았능교?"

화창한 날이라 비 맞을 일이 없었거든요. 

"아뇨. 전혀!" 라고 말씀드리고 나오는데, 뭔가 좀 이상했어요. 왜 오늘같이 좋은 날씨에 그런 질문을 하시지? 다시 생각해보니, 아주머니의 질문은 "입에 맞았능교?" 즉, 음식이 입맛에 맞더냐는 물음이었어요. 그런데, 전혀 맞지 않다고 답했으니! 얼른 다시 돌아가, "음식 맛있게 먹었습니다. 저는 비에 맞았냐고 물어보신 줄 알았어요."하고 웃으며 나왔어요.

사람이 이렇게 간사해요. 20년을 경상도에서 살아는데도, 금세 잊혀지는게 사투리군요. 언제부터 서울 살았다고 참... 모국어도 알아듣기 이렇게 힘든데, 외국어는 오죽하겠어요? 영어 청취가 안 된다고 좌절할 일은 아니에요. 


오늘 점심은 닭개장 6000원,

저녁은 돼지국밥 7000원.

숙소는 35000원. 하루 경비는 48000원 썼습니다.



구미 - 달성보 - 창녕보를 지나 총 120킬로를 달렸고요. 

숙소는 적교장 모텔입니다. 사장님이 트럭으로 픽업도 해주시고, 사모님은 빨래도 해주십니다. 내일은 간만에 깔끔한 자전거 복장으로 달리겠군요. 

행복한 자전거 여행자의 하루가 또 이렇게 저물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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