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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무림고수가 되고 싶다

by 김민식pd 2018. 9. 12.

(국립 어린이 청소년 도서관 간행물 <도서관 이야기>에서 원고 청탁이 왔어요. 청소년을 위한 독서 칼럼에 기고한 글입니다.)


도서관에서 꿈꾸는 무림 고수의 길


어린 시절 저의 꿈은 무림고수가 되는 것이었어요. 학교에서 왕따였거든요. 도대체 그런 투표를 왜 하는지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시절 저는 반에서 가장 못생긴 아이로 뽑혔어요. 그걸로 집요하게 놀리던 아이들이 심지어 외모를 비하하는 별명까지 지어 불렀지요. 화를 내면 그깟 장난도 못 받아주는 놈이라고 따돌렸어요. 정말 죽도록 괴로웠어요. 학교생활이 힘들면 집에서라도 마음 편하게 지내야 하는데요, 저는 집에서도 구박대기였어요. 공부를 그다지 잘하는 편이 아니었거든요. 성적표가 나올 때마다 맞았어요. 공고 훈육 주임이던 아버지는 때리는데 선수였어요. 아버지에게 맞은 매자국은 푸르딩딩하게 온 몸에 문신처럼 남았어요. 집에서는 공부 못한다고 맞고, 학교 가면 못생겼다고 놀림을 받았어요. 학교도 가기 싫고 집에도 가기 싫었는데, 그때 저는 동네 도서관으로 달아났어요. 도서관은 제게 도피처이자 안식처였거든요.

학교에서 나를 괴롭히는 친구들은 동네 도서관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요. 아버지도 도서관 간다고 하면 뭐라 하지 않았어요. 집에서는 도서관 가서 공부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저는 열람실 대신 종합자료실에서 시간을 보냈어요. 김용의 무협소설 ‘영웅문’에 빠져있었거든요. 지금은 ‘사조영웅전’으로 알려진 무협소설인데요, 책에는 곽정이라는 주인공이 나와요. 저처럼 미련하고 별 재주가 없어 늘 악당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에요. 착한 심성을 가진 덕에 좋은 사부님들을 만나고요. 그 분들에게 전수받은 무공을 꾸준히 연마해서 결국 최고의 고수가 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랑스런 여인을 만나고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지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저는 도서관으로 달아났어요. 무협지를 펼치는 순간, 눈앞의 고난은 사라지고 무림고수가 되어 악당을 응징했어요. 대학에 들어가서도 무협지를 즐겨 읽었는데요. 어느 날 생각해봤어요. ‘소설 속 주인공의 내공이 몇 갑자 상승해도 소설을 읽는 내가 그만큼 강해지는 건 아니지 않은가. 현실의 나를 단련할 방법은 없을까?’


무협지 대신 자기계발서를 읽은 이유


그때부터 저는 제 인생의 내공을 길러줄 사부님을 찾아 도서관 서가 사이를 헤맸어요. 무협지 대신 자기계발서를 찾아 읽기 시작한 거지요. ‘왜 나는 어려서 친구가 없었을까?’ 이런 고민이 들면 친구 사귀는 법을 가르쳐주는 책을 읽고요. ‘왜 나는 여자 친구가 없을까?’ 하는 생각에 남녀의 심리에 대해 말해주는 책을 읽었어요. ‘어떻게 하면 영어를 더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숱한 영어 학습서도 읽었고요. 그 시절에 읽은 사교술이나 처세술은 훗날 영업사원으로 일할 때 도움이 되었고요. 여자에게 인기를 끌려면 유머 감각을 익혀야한다는 이야기에 사람들 웃기는 걸 취미로 삼다 훗날 코미디 피디가 되었어요. 

평생 동안 책 속에서 답을 찾으며 살아왔고, 그 덕에 통역사로, 예능 피디로, 또 드라마 피디로 즐거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책에 빚진 게 많아 이제 조금은 갚고 싶다는 생각에 책을 쓰기 시작했어요. ‘해외 유학이나 어학연수를 가지 않은 사람도 영어를 잘 할 수 있나요?’ 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라는 책을 썼고요. ‘어떻게 하면 드라마 PD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직업을 얻을 수 있을까요?’ 라고 묻는 분들을 위해 <매일 아침 써봤니?>라는 책을 썼습니다. ‘삶이 힘들 땐 무엇을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여행의 즐거움을 노래하는 새 책을 쓰고 있는 중이고요. 

큰 딸 민지는 고등학교 2학년입니다. 어느 날 제 책상 위에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화내는 법>이란 책을 올려놓았어요. “아빠 이 책 꼭 읽어봐. 진짜 좋아.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줄 거야.” 민지는 어떻게 이 책을 읽게 되었을까요. 학교에서 친구와 힘든 일이 있었는데, 그 고민을 풀기 위한 답을 찾다 이 책을 만나게 되었대요. 책을 읽고 마음이 풀렸다고 해요. 책에서 민지가 밑줄 그은 대목을 읽을 때는 마치 딸아이가 제게 말을 거는 것 같았어요. 민지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어요. 


“민지 덕분에 아빠가 좋은 책을 읽게 되었네. 무엇보다 기쁜 건, 네가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책에서 답을 찾는 사람이 되었다는 거야.”


어린 시절, 저는 재미난 책을 읽으며 힘든 시간을 견뎠어요. 좋은 책, 나쁜 책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시간의 흐름을 잊을 정도로 재미난 책은 다 좋은 책이라고 믿어요. 고교 시절 즐겨 읽었던 무협소설이 그랬어요. 제게 독서의 즐거움을 일깨워줬으니까요. 책과 친해진 덕분에 지금은 과학책이나 인문사회학 서적도 술술 쉽게 읽게 되었어요. 혹시 저처럼 부모님이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친구가 있다면 재미난 책을 읽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언젠가는 지금의 괴로움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희망합니다. 지금의 저처럼요.


김민식 MBC 드라마 PD,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 <매일 아침 써봤니?>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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